〈 6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짝사랑 녀와 협박당하는 남자, 그리고 협박녀라는 기묘하기 그지없는 조합이 완성되었지만 그게 바로 빛을 보는 일은 없었다.
초대를 받고, 그것을 수락하긴 했지만 오늘 당장 자리를 갖는 건 우릴 초대한 그들에게도 초대를 수락한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무리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그렇고 앨리스도 그렇고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밥보다는 휴식이 더 간절한 처지였다.
생각치도 못하게 초과근무를 하게 되었던만큼 더더욱.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음을 말하기도 애매한 게 나와 앨리스한테는 근무일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거기에 과연 그런 게 존재하긴 할지 모르겠지만 클레어의 스케쥴까지 고려해야하니 그 자리에서 바로 일정을 잡는 것또한 여러모로 무리였다.
그래서 일단 나와 앨리스가 먼저 시간을 맞춰본 다음에 그걸 가지고 내가 클레어와 조율을 한 후 클레어가 그걸 세피아한테 전하는 걸로 마무리하고 일단 그 자리를 파했다.
솔직히 좀 황급하게 마무리지은 감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종의 억제기 역할을 해주던 에반젤린네 가족이 자리를 뜨니 안 그래도 사납던 앨리스의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졌으니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찢어놓을 수밖에.
그렇게 일단 둘을 갈라놓은 다음에 앨리스를 케어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뭔가 돌파구가 생길지도 모르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앨리스와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했는데..
'시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앨리스의 케어에 들어가기도 전에 치안대에 비상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건..
"습격을 당했다구요?"
"그래, 그래서 지금 의무실에서 치료중이라더군."
다름아닌 주인공 놈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그리 놀랍진 않았다.
그냥 올 게 왔구나하는 느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 주인공이란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으니까.
그런 게 존재할 리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니..'
그딴 게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아무튼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렸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다만 타이밍이 좀.. 거지같았을 뿐.
하필이면 일 끝내고 퇴근하기 직전에, 앨리스의 케어에 들어가려는 찰나에 사건을 물고 오다니.
'이 놈 이거 설마..'
일부러 노린 건 아니겠지?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워서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럴 리 없지.'
아니,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옷 갈아입고 퇴근하려다가 그대로 앨리스와 함께 세트로 묶여서 보좌관실까지 붙잡혀온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인신매매같다더군."
그리고 그런 내 시선 속에 담긴 것을 눈치챈 레아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내 조연으로서의 짬밥이 속삭였다.
이거 좆된 것 같다고.
그만큼 서로 엮이면 안 되는 단어들이었다.
주인공과 인신매매라는 단어는 말이다.
그런데 둘이 엮였다?
그럼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튀어나온다고 보면 된다.
인신공양이 취미라서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잡아다가 강제 장기자랑을 시키는 사교도나 악마 뽕에 심취해서 악마들한테 제물을 바치며 힘을 구걸하는 악마숭배자란 새끼들 중에 하나는 말이다.
최악의 경우는 그 둘이 이미 손을 잡고 짝짜꿍을 하고 있는 건데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니까 실제로 그럴 것 같은 각이 보일 때나 생각하고..
"많이 다쳤답니까?"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 놈의 안위 말이다.
치료중이라는 걸 보면 부상을 입었다는 소린데 설마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인 건 아니겠지?
레아의 표정이 진지하긴 해도 굳어있지는 않은 걸 보면 심각한 부상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놈이 뒈져버리면 나도 여기서 끝이니까.
해서 애꿏은 침만 꼴깍 삼키며 레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골목에서 기습을 당했다는데 운 좋게 직격은 피했다더군. 팔뚝만 살짝 베였다나?"
레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답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것만으로도 대충 어쩌다가 다쳤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으니까.
보나마나 알량한 정의감에 취해서 무턱대고 범인들을 쫓아가다가 모퉁이 같은 데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한테 당한 거겠지.
안 봐도 백퍼센트다.
내가 그동안 봐왔던 주인공이라는 놈들이 전부 그랬으니까.
그나마 걔들은 그런 식의 기습을 회피할 실력이라도 있었지 이번 주인공 놈은 대체 뭘 믿고 범인들을 쫓아 골목으로 들어간 걸까.
척봐도 비리비리한 것이 실전경험이라고는 동네 똥개하고도 싸워본 적 없을 것 같은 놈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놈의 자신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주인공이라고 해서 칼이 '어이쿠! 주인공 님이시네.'라고 외치면서 피해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옆에서 자꾸 생도님 생도님하고 떠받들어주니까 지가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던 걸까.
아무튼 뭐, 무사하긴 하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덕분에 놈이 물어온 사건의 뒷처리는 이쪽의 몫이 될 것 같았다.
검쓰는 놈이 팔뚝을 다쳤다는 건 상처가 나을 때까진 전력 외라는 소리니까.
그 말은 이제 그 놈 몫까지 신나게 구르게 될 거라는 뜻이고.
"그래서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랍니까?"
그래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건..
"그건 지금부터 조사해봐야겠지?"
너무 대책없어서 경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성의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대답이었다.
따로 조사해보라는 걸까.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식으로 서임한 것도 아니고 파견근무 뛰러온 짬찌들에게 프리롤을 부려해버리는 이 대범함은 대체..
어디 한 번 잘 해보라는 듯 방긋방긋 웃고 있는 레아를 보며 진지하게 의심해봤다.
실은 이 년이 겉만 멀쩡하지 과도한 업무량때문에 홰까닥해버린 건 아닐까하고.
그런 내 의문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오르기라도 했던 걸까.
피식하고 웃은 레아가 짧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름 좋은 기회니까 한 번 열심히 해봐."
라고.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저 년의 손에 들려있는 근무평가서 내용이 달라질 거라는 걸.
그 말은?
하기 싫어도 해야된다는 소리였다.
지명권을 포기할 게 아니라면은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해서 일단 레아에게 이만 꺼지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뒤 앨리스와 함께 보좌관실을 빠져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딱봐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얘부터가 문제야.'
그런 걸 봐버린 탓일까.
앨리스는 살짝 멍해보였다.
거기에 한 놈은 사실상 전력 외니..
이대로라면 그 주황머리 년하고 내 힘만으로 주인공 놈이 물어온 사건을 파헤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그 주황머리 년이라고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는 것 정도?
그래도 수도학원 기사부 소속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힘 쓸 일 생기면 1인분은 너끈히 해주겠지만 그 외에는 글쎄..
솔직히 확신이 안 섰다.
관상학적으로 그 주황머리 년은 전형적인 힘만 쎈 바보였으니까.
삼국지로 따지면 딱 무력만 높아서 내정용으로 쓰기도, 그렇다고 전투용으로 쓰기도 애매한 타입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는 건 결국 조사하는 건 나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야된단 소리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봤다.
과연 그게 가능하긴 할런지를.
그렇게 고민해본 결과 나온 결론은 '가능하긴 하다'였다.
문제는 내가 그러기 싫다는 거고.
그렇다면?
'한 명이라도 멀쩡하게 만들어야겠지.'
특히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 표정이 멍한 걸까.
평소라면 진작에 내 시선을 눈치채고도 남았을텐데 오늘따라 영 반응이 느린 앨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에 정신을 차린 앨리스가 당황하는 사이, 어렵지 않게 빈 방을 찾아낸 나는 그대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창고로 쓰이는 곳일까.
먼지 특유의 꿉꿉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방 안으로 그녀를 이끈 나는 그대로 문부터 걸어잠궜다.
찰칵-
하고 쇠와 쇠가 맞물리며 울려퍼진 소리와 함께 앨리스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린 걸까.
그렇게 어깨를 흠칫거리는 그녀를 벽쪽으로 밀어 팔 사이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파르르 떨리며 당황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선배."
"..."
"봤죠?"
딱 두 마디를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앨리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흡 떠졌다.
그것과 시선을 맞추며..
"..보셨구나."
힘없이 웃어보였다.
뭔가를 포기한 사람처럼.
솔직히 통할지 안 통할지 나조차도 확신이 안 서는 행동이었는데..
'통하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앨리스가 그대로 패닉에 빠져버렸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던 걸까.
"나, 나는.."
쉬지 않고 그 말만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앨리스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부스스 웃어보였다.
"혹시 저번에 그것도 선배였어요?"
많은 것이 생략되어있는 말이긴 했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그런 내 물음에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꽉 깨문 입술만으로도 답이 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쳤지만.
"..그렇구나 선배였구나."
다시 한 번 힘 없이 웃으니 앨리스의 눈동자또한 다시 한 번 흔들림을 내보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번에도 그녀는 답을 하지 못했다.
이번 건 아까전부터 꽤 궁금했던 거였는데 말이다.
'뭐, 어차피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솔직히 그녀가 내 말에 답을 하던 말던 딱히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와 나 사이로 흐르고 있는 이 분위기, 이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내가 주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럴 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아슬아슬해 보이도록.
속으로 그리 읊조리면서 눈에서 최대한 힘을 뺐다.
그리고는 푸흐흐하고 힘없이 웃으면서..
"선배."
다시 한 번 앨리스를 불렀다.
내 딴에는 최대한 아슬아슬해보이는 모습을 연출해봤던 건데..
다행히 통하는 것 같았다.
앨리스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불안한 떨림을 내보였으니까.
꼭 마치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뭔가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제가 불쌍해요?"
그리 물었다.
내가 불쌍하냐고.
그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을 입밖으로 낸 순간 앨리스가 입술을 콱 깨물었으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랬다가 혹시라도 날 자극하게 될까봐 억지로 참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 반응을 눈에 담으며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날 동정해요?"
그 말에도 앨리스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 외에 모든 것이 답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널 동정한다고.
널 돕고 싶다고.
그래서..
"그럼 도와줄래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속삭이듯이.
그런 내 발언이 의외였던 것일까.
앨리스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그렇게 날아와 꽂히는 시선과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어느새 그런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내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거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대충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를.
앨리스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굉장히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한테 복수할 수 있게?"
흡족한 마음으로 덧붙였다.
이전처럼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혼란으로 흐릿하게 변해있던 앨리스의 눈동자가 살짝이지만 또렷해졌다.
"원래라면 힘들 것 같았는데.."
꿀꺽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내 것인지 앨리스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소리를 들으며..
"선배가 도와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속에서 갈고닦은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흐릿함과 또렷한 그 중간 쯤에 머물러있던 앨리스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뭔가 결심을 굳히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롭고도 명료한 빛이.
"도와주실거죠?"
그것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이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처럼 딱 끊어서.
그러자 돌아온 것은..
"..응."
살짝 이를 악문 듯한 대답이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시발..'
이제 나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