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애부터 데려다주자.
그래야 에반젤린의 부모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을테니까.
혹시 또 아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클레어의 약점 비스무리한 것을 알게 될지도?
"..스승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해서 일단 그렇게 물었다.
어쩌면 꺼려할지도 모른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게 한 짓이 있다보니 혹시 내가 조카인 에반젤린한테 해코지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걸까.
뭐,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그렇게 클레어까지 합류시키고 나서 움직이려고 하니..
"..목은 왜 그래? 다쳤어?"
여태껏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앨리스 쪽에서 대뜸 그런 질문이 날아왔다.
내가 아까전부터 목덜미를 부여잡고 있으니 그게 못내 신경쓰였던 걸까.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클레어 년이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영역표시라도 하듯 이빨 자국을 새겨놨으니까.
곧바로 앨리스와 합류해야하는데 그걸 훤히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서 목덜미에 난 자국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적당히 손으로 가려둘 생각이었는데..
'깜빡했네.'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에반젤린이 말한 고모가 클레어였다는 사실이 말이다.
아무튼 질문을 받자마자 손으로 슬쩍 만져보니 아까보다는 확실히 가라앉은 것 같아서 적당히 핑계를 대고 넘어가려 했다.
"아, 이거요? 그게.."
고개를 돌린 순간 눈으로 들어온 앨리스의 눈빛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눈빛.
그것을 마주한 순간 막 입밖으로 흘러나오려던 말이 다시 안쪽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깨달아버렸으니까.
앨리스가 내가 클레어를 따라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봐버렸다는 걸.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본 거지?
아까 들어갔던 그 골목하고 이곳 사이의 거리는 꽤 먼데 말이다.
심지어 주변에 오가는 사람도 이렇게나 많은데 그걸 다 뚫고 그 광경을 봤다고?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당황이라는 것을 한웅큼 집어먹고 있던 그 순간.
'잠깐만..'
눈치챌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앨리스의 눈빛 속에 깃들어있는 것들이..
내가 상상한 것들하고는 많이 달랐다.
내게 짙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배신감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더 짙게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증오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고.
'왜..?'
그렇기에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가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인지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억지로 그것에서 눈을 돌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만 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그거고 받은 질문은 질문 아니겠는가?
일단 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었던만큼 어떤 식으로든 그걸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설령 그렇게 내뱉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서두른다고 뭐랑 좀 부딪혔었거든요."
해서 쓰게 웃으면서 목덜미를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니 날 향하고 있던 앨리스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뭔가 살짝 답답해하는 느낌?
"..그래? 조심 좀 하지."
그래서일까?
말을 하는 표정도, 목소리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억지로 쥐어짜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러니까 진짜로 왜 그러는 건데.. 응?'
대체 뭐가 그렇게 안타까워서 사람을 시한부 환자 바라보듯이 바라보는..
'아.'
설마?
그 순간 딱 하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만약에..
그러니까 정말로 만약에..
저번에 클레어한테 처음으로 협박 비스무리한 걸 받았을 때 소란을 일으키고 튄 장본인이 앨리스라면?
그래서 내가 클레어한테 약점을 잡혀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는 거라면?
그녀가 저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진짜라면 상황이 좀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건데..
이렇게 되면 에반젤린과 그 가족을 이용해 클레어를 역으로 압박한다는 계획도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만 급해서 진입각을 잘못 잡아버리면 둘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버리게 될 테니까.
'이걸 어쩐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담.
당장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부분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생각치도 못한 경우였으니까.
디아나한테 클레어와의 관계를 들키는 경우는 몇 번 상상해봤다.
그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봤으니까.
그렇지만 앨리스한테 들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생각해둔 대응책이 있을 리가 있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여기서 내가 '아몰랑!'을 시전해버린다면?
분명 둘 사이에서 칼부림이 날 거다.
지금도 봐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클레어의 뒤통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눈빛만보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어 그것을 클레어의 등에 박아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지 않는 건 아마 나하고 에반젤린 때문일 것이고.
'거참..'
아니 얘는 왜 쓸데없이 그런 장면을 봐버려 가지고는..
어쩐지 술술 잘 풀린다 했더니만 와.. 이게 이렇게 꼬여버리네 진짜.
속으로 툴툴대던 날 일깨운 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온 치안대 건물의 모습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에서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일까.
에반젤린의 부모는 건물로 통하는 입구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둘한테도 클레어의 존재는 의외였던 것일까.
에반젤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부모는 에반젤린을 안고 있는 것이 클레어임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가족들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살짝 쓴웃음을 지은 클레어가 살짝 졸린 듯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소녀의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에반젤-"
"으웅.."
클레어 덕분에 무사히 바닥으로 착지한 에반젤린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제 눈을 비볐다.
안도감 때문에 피로가 확 몰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잠기운이 흠뻑 젖어서 가물거리던 소녀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저어기, 엄마랑 아빠 있네?"
제 고모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쫑긋하고 떨리는 귀.
그 귀엽기 그지없는 반응을 확인한 클레어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 순간 보는 사람까지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얼굴을 한채 침을 꼴깍 삼킨 소녀가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엄마아앙-!"
와앙하고 그동안 꾹꾹 눌러참고 있던 눈물을 한 번에 터뜨리며 제 부모를 향해 우다다다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제 엄마의 품 속으로 포옥하고 다이빙을 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 손 꽉 잡고 있으라고 그랬지?"
"이이잉.."
꾸짖는 듯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여성의 얼굴 위에는 짙은 안도감이 떠올라있었다.
그렇게 다신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꼬옥하고 끌어안은 모녀를 아빠 쪽에서 한 번에 끌어안는 것으로 잠시 흩어졌었던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훈훈하구만.'
덕분에 분위기가 굉장히 흐뭇해졌다.
코 밑을 문지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보상도 이렇게 훈훈해야 할텐데 말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쉽게 진정이 되질 않는 것인지 코를 훌쩍거리는 에반젤린을 아빠 쪽으로 넘긴 여성이 딸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살짝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했다.
그리고는..
"우선 두 분께 감사인사부터 드려야겠군요."
한손으로 제 앞섬을 지그시 누르며 나와 앨리스를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께 사례를 하고 싶은데.."
여성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순간 앞으로 나선 것은 다름아닌 앨리스였다.
"전 괜찮습니다. 애초에 얘가 다 한 거라서요."
내게 공을 몰아주려는 것일까.
에반젤린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도 나고, 불안해하던 아이를 안심시킨 것도 나라면서 앨리스가 자기는 한 발 물러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에 나와 앨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던 여성의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발했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그쪽의 뜻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정도 주억거리더니..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세피아 아르논입니다. 그쪽은.."
"이안 데일입니다."
"그렇군요.. 이안 데일.."
내 이름과 얼굴을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얼굴이 근질근질한 걸 느끼고 있자니..
"그런데 언니하고는 어떻게.."
마침내 그녀의 관심이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제 3자마냥 서 있던 클레어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 그나저나..'
언니라고?
누가봐도 세피아 쪽이 언니로 보이는데?
세피아가 늙어보인다는 뜻이 아니다.
행동이나 태도가 그렇다는 거다.
몸짓 하나하나에 어른스러움이 진득하게 배어있는 세피아에 비하면?
클레어는 언니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철딱서니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클레어 쪽이 언니였다니..
그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으니 그때까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클레어가 앞으로 나섰다.
"..내 제자야."
그 입에서 튀어나간 건 상당히 양심없는 발언이었지만.
골목에서 나한테 그런 짓까지 해놓고서는 뭐?
내 제자야?
그렇구나아.
요즘은 제자 손을 이용해서 자위도 하고 그러는 구나.
'뭐, 하긴..'
아무리 그래도 가족 앞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겟지.
그러니 둘러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게 그녀에게는 최선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렇군요. 제자.."
아무튼 클레어가 날 가리키며 그리 말한 순간 내쪽을 향하고 있던 세피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잘 아는 눈빛이었다.
내가 주인공 놈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솔로로 늙어가고 있으면 으르신이라는 양반들이 보통 저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짝을 못지어줘서 안달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문제는 세피아가 그런 눈빛을 한채로 나와 클레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여자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이거 까딱 잘못하면..'
코 꿰일지도 모르겠는데..
점점 더 빛을 발하는 세피아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있으니 이제 좀 진정이 된 것인지 에반젤린이 제 아빠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언니하고 오빠한테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일까.
아빠의 말에도 에반젤린은 쉬이 앞으로 나서질 못했다.
아무래도 실컷 울고 나니까 뒤늦게 그게 부끄러워진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바닥만 바라보며 앙증맞은 발을 꼼지락대는 소녀의 앞에 조심스레 쪼그려앉았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춰주니..
"가, 감사합니다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에반젤린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길 잃어버리지 말고."
"네에.."
앞으로 잘하라는 뜻으로 머리를 두어번 정도 쓰다듬어주니 소녀의 고개가 조금 더 밑으로 향했다.
부모의 눈에는 그런 딸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세피아도 그렇고 아빠 쪽도 그렇고 아주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마음같아서는 저택으로 초대해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빠 쪽이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 그리 중얼거렸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해."
세피아의 입에서 시원할 정도로 흔쾌하게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본인이 나서서 처리하겠다는 듯 살짝 앞으로 나선 그녀가 나와 앨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우리 둘을 초대하고 싶다느 의사를 밝혔다.
그런 세피아의 초대를 앨리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세피아가 제 언니인 클레어를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은 말이다.
"언니도 오실 거죠?"
"..나도?"
"새롭게 들인 제자라면서요. 어찌보면 한 식구가 된 거나 마찬가진데 언니가 직접 소개해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어쩐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더라니.
결국 이게 목적이었구만?
역시 가족이라고 해야할까.
세피아는 클레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저렇게 처음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자체를 주지 않는 걸 보면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치트키까지 동원했다.
"에반젤린? 고모가 집에 놀러왔으면 좋겠니?"
"웅!"
"그러면 직접 부탁해보려무나."
역시 클레어의 조카라고 해야할까.
세피아의 사주를 받은 에반젤린의 일격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고모오오 나 보러 오면 안 돼요? 응? 응?"
그 클레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함락당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품 안에 포옥하고 안긴 채 가슴팍에 자그마한 머리통을 비비적대는 에반젤린의 모습은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결국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세 분다 오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딸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나와 앨리스는 물론 클레어에게까지 무사히 승낙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세피아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발 이거.. 밥먹다가 칼부림나는 건 아니겠지..?'
생각치도 못하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