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취할대로 취한 여자들 사이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내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느낌이라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썩어 있었던 모양이다.
기회가 생기자마자 냅다 튀어버린 제인이라는 병사를 대신해 날 안내하던 앨리스가 어느 순간부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옆에서 걸으면서 힐끔힐끔 시선을 던져대는데..
솔직히 좀 간지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음..'하고 짧게 소리를 냈더니 그 즉시 앨리스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그.. 혹시 화났어..?"
그러더니 누가들어도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황급히 그런 말을 꺼내드는 게 아닌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유가 뭐 때문이었는지를.
그러니까 지금 앨리스는 대차게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골이 났다고 말이다.
그 계기는 아마도.. 아까 보좌관실에서 있었던 일이겠지.
그러니까 나하고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북쪽 코스를 낼름 골라잡았던 것 말이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도 그녀가 그런 판단을 하게 된 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냥 할 말 없어서 그랬던 건데..'
하긴, 진실을 아는 건 나뿐이니까.
진실을 알 리 없는 앨리스 입장에서는 내가 아무 말 않고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화가 나서 그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테지.
그런 것들을 근거로 삼아서 내가 화가 났다고 착각하고서 슬금슬금 내 눈치만 보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몇 번이나 말했듯 나는 꽤나 다양한 타입의 주인공들을 경험했었다.
개중에서 제일 골 때리는 놈을 꼽자면 역시 바로 전회차의 그 놈이 될테지만 가장 특이한 놈을 꼽자면 그건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2회차였나 3회차였나..
'이제 시발 기억도 제대로 안 나네.'
아무튼 여자 꼬시는 데 도가 튼 놈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한국산 카사노바 놈이 언젠가 말하길..
-여자 입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나오잖아? 그럼 일단 좆됐다고 보면 돼. 그게 튀어나올 정도면 진짜로 빡쳤다는 소리거든.
라고 했었다.
그래서..
"..괜찮아요."
그런 놈의 가르침을 앨리스를 상대로 한 번 사용해봤다.
과연 그게 남녀가 역전된 상태에서도 먹힐지 궁금해서 시도해봤던 것인데..
'..통하네?'
통하더라.
심지어 효과도 매우 강력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간 순간 앨리스의 얼굴은 뭐랄까.. 숨이 턱하고 막힌 얼굴?
대충 그런 얼굴이었으니까.
화가 난 것 같으니 달래주긴 해야되는데 어떻게 하면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짐작이 안 가서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꼭 그런 얼굴을 한채 연신 내 얼굴을 힐끔거리는 앨리스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다가..
"후우.. 저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추가타를 때려박았다.
아마 상대적으로 눈치가 없는 디아나라면?
내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괜찮구나.'했을 거다.
아니, 애초에 내 옆에 서 있는 게 디아나였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도 않았겠지.
통하지도 않을 걸 굳이 쓸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디아나가 아니라 앨리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름대로 남자어에 능통한 편에 속했다.
그러니까 방금 내 '괜찮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괜찮다.'라는 말과 아예 다른 말이라는 걸 알아들을 정도의 눈치는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일까?
한숨까지 곁들여서 추가타를 때려박은 순간 앨리스의 반응은 압권이었다.
연신 이쪽의 반응을 살피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데..
그걸 보고 느꼈다.
그녀를 쥐고 흔드는 건 이쯤해야될 것 같다고.
초조함 때문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일까.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축이는 앨리스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다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날 따라 멈춰선 앨리스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알아요. 선배님께서 절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하신 거라는 것쯤은."
굳이 편한 코스를 내버려두고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북쪽 코스를 콕 찝어 택한 앨리스의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내가 파견기간동안 실적을 최대한 많이 쌓을 수 있게해서 월말평가에서 그와 관련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지.
후방에서 아무리 굴려봐야 전선에서 적 모가지 하나 수확한 것만 못하니 말이다.
동부가 남부마냥 격전지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경에서 간간히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 들었다.
그런 곳으로 파견나간 이들에게 뒤치지 않으려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꾸준하게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답은 북쪽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한 점들을 다 알고 있노라고 은근슬쩍 어필하니 어두워졌던 앨리스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짝 밝아졌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저하고 꼭 상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셨죠?"
"..응."
자기가 너무 급했다면서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길 가장자리에 세워져있는 좌판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좌판 앞에 도착한 순간 어어하는 사이에 내 손에 잡혀 끌려온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좌판에서 팔고 있는 크레이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이걸로 봐드릴게요."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앨리스가 피식하고 미소짓게 만드는데에는.
그 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파견 첫날부터 뺑뺑이를 돌리긴 좀 그랬는지 코스를 돌고 돌아오자마자 레아가 최후의 휴식을 만끽하라면서 그대로 우릴 쫓아냈으니까.
본격적인 파견근무가 시작된 건 그 다음날부터였다.
일부러 그렇게 잡아둔 건지 아니면 그냥 우리가 재수없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와 앨리스의 첫 근무는 밤시간대였다.
그러니까 한창 피크 시간대였다는 소리다.
덕분에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다.
왜 병사인 제인도 그렇고 관리자인 레아도 그렇고 북쪽 코스라는 우리의 선택에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지를.
'시발..'
정신없을 거라는 예상정도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뭐 삼보일배도 아니고 무슨 세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사건이 우릴 반겨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취객의 난동?
그 정도는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했다.
아예 앞뒤분간 못할 정도로 취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적당히 술이 들어가서 분노조절장애로 거듭나버린 년들은 나와 앨리스가 입고 있는 기사 정복과 패용하고 있는 공권력의 상징을 목도한 순간 언제 그딴 걸 앓았냐는듯 순식간에 완치가 되곤 했으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난동을 부리는 이가 한 명일 때의 이야기고..
하나가 둘이 되면 경우가 많이 달라졌다.
그쯤되면 우리의 손에 들린 공권력의 상징보다 자길 빡치게 한 상대한테 더 눈길을 주곤 했으니까.
보다못해 뜯어말리면 이때다하고 더 빡쳐했고 말이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여자들의 싸움도 장난 아니라는 걸.
'어우..'
뭔 놈의 머리를 이렇게 쥐잡듯이 잡아뜯어놨다냐..
분명 시작은 쌍방과실이었을텐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져서 피해자로 둔갑해버린 여자의 몰골을 내려다보다가 입고 있던 정복의 상의를 벗어서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손놀림이 너무나도 야무져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이미 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있었으니까.
"어, 엇.."
졸지에 내 옷을 뒤집어 쓴 여자가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사이 피해자를 쥐잡듯이 잡고도 제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여자에게 친히 물리치료를 해주고 있던 앨리스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에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치료되는 기쁨을 버티지 못한 건지 떡실신한채 병사들의 손에 잡혀 끌려나가는 여자 겸 가해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우..'
아주 골고루도 팼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앨리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내가 걸쳐준 정복 상의를 손으로 꼬옥 움켜쥔 채 그것으로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피해자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설 수 있으시겠습니까?"
딱딱한 표정에 딱딱한 목소리.
그것들은 안 그래도 신나게 쥐어터져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피해자를 겁에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다리에 힘이.."
그러면서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내쪽을 힐끔대는 피해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앨리스가 살짝 몸을 숙이더니..
"아앗..!"
피해자의 팔을 잡고 가차없이 일으켜세웠다.
그러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가 두르고 있던 내 정복을 압수하더니 대신 제 것을 둘러주었다.
"자."
그리고는 압수한 걸 다시 내 어깨에 둘러주더라.
그러면서 단추까지 일일히 채워주는데..
그게 꼭 다시는 다른 년들에게 그걸 입혀주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듯 했다.
대충 그런 식으로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건들이 일상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그렇다고 맨날 그렇게 술냄새 풀풀 풍기는 사건들만 처리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낮 시간대에 순찰을 도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밤에 하는 순찰에 비하면 낮 순찰은 그야말로 땡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세 걸음 내딛을 때마다 취객이 튀어나오진 않았으니까.
물론, 여기도 낮부터 달리는 양반들이 좀 있어서 가끔씩은 낮순찰을 도는 와중에도 취객이 튀어나와 난동을 부리기도 했지만 밤에 비하면야 뭐..
'양반이지.'
이렇게 밤에 도는 것에 비하면 마냥 꿀같아보이는 낮순찰에도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벌어지는 일들이 비교적 획일화된 밤에 비해 가끔씩 생각치도 못한 사건과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선배."
"응?"
"쟤.. 미아같은데요?"
불안한 얼굴을 한채 연신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소녀의 모습은 누가봐도 길잃은 아이의 그것이었다.
대충 한 일곱살정도 되었을까.
금방이라도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울먹한 눈을 하고 있는 빨간머리 소녀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컸을 때 어떤 모습일지 미래가 기대될 정도로.
특이한 점은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내가 그 꼬맹이를 미아라 판단한 것도 바로 그 옷 때문이었다.
눈에 확 띄게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는 그 옷은 거리를 떠도는 고아가 입을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부모를 따라서 놀러나왔다가 아차하는 사이에 부모와 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튼 저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기에 앨리스한테 양해를 구하고는 곧장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내 목적이 설마 자신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내가 말을 걸 때까지 소녀는 내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쪽을 봐달라는 뜻으로 살짝 손을 흔들어보인 순간 소녀의 어깨가 움찔하고 튀어오른 것은.
그와 함께 울먹울먹한 눈동자가 한층 더 그렁그렁하게 변하길래 나는 즉시 소녀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물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혹시 길 잃었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 모양.
'음..'
그런 소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입고 있는 정복 상의에 새겨져있는 문양을 조심스레 부각시켜보았다.
"혹시 이 표시 알아?"
혹시 몰라 시도해본 것인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부모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교육을 확실하게 해둔 것인지 소녀가 앙증맞은 머리통을 열심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했다.
"그럼 오빠가 도와줘도 될까? 아, 참고로 오빠 이름은 이안이야. 이안 데일."
그리 말한 뒤 살짝 웃으면서 소녀의 이름을 물으니 나이가 어려도 잘생기고 에쁜 건 아는지 소녀가 찹쌀떡같은 뺨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물음에 답했다.
"에, 에반젤린이요.."
"그래? 예쁜 이름이네."
그렇게 내가 소녀를 어르고 달래는 사이 앨리스는 묵묵히 나와 소녀의 옆을 지켜주었다.
그런 앨리스의 모습이 소녀에게는 꽤나 멋있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이 언니 이름은 앨리스야. 멋있지?"
내 말에 소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팔랑팔랑 흔든 순간 앨리스가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멋쩍어하는 그 반응을 확인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실적도 쌓고, 착한 일도 하고 겸사겸사 앨리스의 애간장도 사르르 녹여줄 수 있는 일석삼조의 계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