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런 내 행동에 디아나가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이제 가보셔야하는 것 같은데요? 출발하려나 봐요."
기둥 너머로 얼핏 보이는 풍경을 힐끔거리며 그리 말하니 디아나의 시선이 내 얼굴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 사이를 정신없이 배회했다.
가야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발이 떨어지질 않는 걸까.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자, 잠.."
해서 친히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얼른 가라는 뜻으로.
그에 디아나가 발에 힘을 실으며 버텨보려 했지만 힘은 이쪽이 더 쎄서 말이지.
힘과 힘 대결이 되어버리면 디아나는 절대 날 이길 수 없었다.
뭐, 다른 것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렇다보니 결국 디아나는 내가 떠미는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잠깐 버티다가 그대로 기둥 뒤에서 밖으로 밀려난 디아나를 향해 생긋 웃으며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었다.
'맘같아서는 기차 앞까지 배웅해주고 싶지만..'
그건 힘들겠지.
그랬다간 주변이 아주 난리가 날테니까.
아쉬운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녀는 일행들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고 내쪽을 돌아보았다.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이는 그 모습이 꼭 주인하고 떨어지기 싫어하는 강아지같아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디아나가 내쪽을 돌아보는 타이밍에 맞춰서 절대로 다치지 말라고, 다쳐서 돌아오면 가만 안 둘 거라고 입모양만으로 말을 전했다.
'제대로 전해졌으려나?'
다행히 무사히 전해진 것 같았다.
내쪽을 돌아보던 디아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피식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린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디아나를 떠나보낸 바로 그 날, 나도 파견근무지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다.
일행이 무려 셋이나 있었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수도로 배정된 건 나와 주인공 놈, 그리고 앨리스만이 아니었다.
주황머리에다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년 하나가 더 딸려왔으니까.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하고 주인공 놈, 그리고 앨리스까지 이렇게 달랑 세 명이 전부였다면 조를 나누는 게 상당히 애매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네 명이라면?
'둘씩 나누면 딱이구만.'
저 주황머리 년도 싫어할 것 같진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연병장에서 만났을 때 나와 주인공 놈을 번갈아 바라보며 헤죽대던 걸 보면 남자에 참 관심이 많아보였으니까.
내쪽에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러있던 것으로 봐서 주로 노리는 쪽은 아무래도 내쪽인 것 같았지만 일단 주인공 놈도 쳐다보긴 했으니까 그쪽을 붙여준다고 하면 사양하진 않겠지.
'그래, 앞으로 넌 주인공 담당이다.'
그렇게 워낙 흔해빠진 얼굴이라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 주황머리 년의 역할을 결정짓는 사이 그 누구보다 수도 지리에 빠삭한 탓에 자연스럽게 안내역을 맡아 일행을 이끌고 있던 앨리스가 건물 하나를 앞에 두고 멈춰섰다.
그에 덩달아 멈춰서니 '치안대'라고 적힌 커다란 현판을 내걸고 있는 건물 하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긴가?'
여기 멈춰선 걸 보면 그렇겠지 뭐.
다행히도 학원하고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굳이 숙소를 이쪽으로 옮기거나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론 학원에서 통근을 하게 되면 아침에 조금 고달파지기야 하겠지만은..
'그래도 학원 기숙사가 훨씬 낫지..'
건물 외관을 확인한 순간 내 본능이 속삭이더라.
여긴 무조건 아니라고.
아니, 대체 안에 뭐가 있길래 아직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짬내가 이리 진동을 한단 말인가?
역시 구성원들이 여자로 바뀌었어도 군대는 군대라는 걸까.
내 안에 있던 자그마한 환상같은 게 파사삭하는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걸 느끼고 있자니 앨리스가 우릴 잠깐 제자리에 세워놓고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두 명의 경비병 중에 선임으로 보이는 여자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다 뿌듯해졌다.
그래도 선배랍시고 먼저 나서서 일처리를 하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았으니까.
예전의 그녀였다면?
선배고 뭐고 아마 나몰라라 했겠지.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수업도 밥 먹듯이 땡땡이를 치던 양반인데 파견근무라고 성실하게 참여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진짜 여태까지 어떻게 안 짤린 거지..'
내가 학원측 관계자였다면?
진작에 짤라버렸을 거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아닌 건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실하게 선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가 있는 반면..
'저 년은 진짜..'
파견근무를 나온 건지 남자 꼬시러 나온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헬렐레하고 있는 년도 있었다.
그래, 바로 지금 내 옆옆에 서 있는 주황머리 년처럼 말이다.
얼굴을 뚫어버릴 기세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에 그것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히죽히죽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욕망에 젖은 채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덤이었다.
"으응? 왜~? 혹시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어디서 말꼬리를 늘리고 지랄이야 지랄이.
확 그냥 인중도 같이 늘려버릴까보다.
맘같아서는 생각한 걸 실제로 행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계획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어차피 오늘 잠깐 보고 안 볼 년이니까.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건물이 훨씬 커서요."
"그럴 수밖에 없지이 수도 치안을 총괄하는 곳이니까아."
그런 식으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주인공 놈을 대신해 주황머리 년을 상대해주고 있자니 앨리스가 기사 정복 차림의 여자를 대동한 채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이들인가?"
"네, 선배님."
앨리스가 저렇게까지 깍듯한 걸 보면 꽤 높은 사람인가?
그런 것치곤 좀 많이 젊은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언제 교태를 부리고 있었냐는 듯 각을 딱 잡고 서 있는 주황머리 년을 시작으로 주인공을 거친 시선이 내쪽에 와 닿았다.
"흐음.."
아니, 왜 또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건데..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애매한 미소만 머금고 있으니 살짝 웃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그렇게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치안총감의 보좌관이자 파견기간동안 우리를 책임질 우리의 직속 상사라는 걸.
그것 외에도 여러가지 설명들이 툭툭 던져졌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왜들 이리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걸까.
오다가다 마주친 기사들도 그렇고, 병사들도 그렇고 어째 이쪽을 뚫어보라 쳐다보는 것이..
꼭 우리 속의 원숭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공 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까부터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고.
그런 우리 둘의 기색을 느낀 걸까.
내부 시설을 안내해주겠다며 우리들을 이끌고 다니던 치안총감의 보좌관, 레아가 이해한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나와 주인공 놈을 향해 사과를 건네왔다.
말이 사과지 짬찌인 너희들이 이해하라는 말이었지만.
다들 남자 기사라는 존재가 생소해서 그러는 거라나?
그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아무튼 이제 근무조를 짜야 하는데.."
시설 안내를 끝마친 레아가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안건을 꺼내들었다.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자리에 서 있던 세 명이 동시에 침을 꼴깍 삼킨 것은.
아니, 앨리스야 나하고 한 조가 되고 싶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주황머리 년은 진짜..
아까 마음 속으로 부탁한대로 주인공 놈이나 마크할 것이지 눈치없이 끼어들려고 하는 주황머리 년을 속으로 까내리고 있자니.. '으음..'하고 살짝 침음성을 흘리던 레아가 손을 뻗어 일행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 결과 나는..
"우선 첫 주동안은 이렇게 가도록 하지."
바라는대로 앨리스와 조를 이룰 수 있었다.
'역시..'
살짝 무리할 정도로 앨리스의 옆자리를 고집한 보람이 있었다고 속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주황머리 년이 또 눈치없이 나섰다.
"첫 주동안이라는 말씀은 2주차부터는 조가 바뀐다는 말씀이십니까?"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말끝에 살짝 의문부호가 붙어있는 걸 보면 일단 확정은 아닌 모양이다.
아마 첫 주자 결과물을 보고 조를 새로 짤지 그대로 유지할지 결정하려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바라던대로 판을 깔아준 그녀를 찬양하기에는 말이다.
그렇게 조를 구성하고 나니 남은 건 순찰 돌 코스를 정하는 것 뿐이었다.
"음.. 잠시만 기다리도록."
아까 들었던 설명에 따르면 매일마다 순찰하는 코스가 바뀌는 구조인 것 같던데 파견근무자들은 아무래도 그 순환 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모양.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순찰 코스는 기본적으로 네 개가 있다."
그리 말하면서 서랍을 뒤적이던 레아가 그 안에서 꺼낸 것을 펼쳐보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저흰 북쪽으로 하겠습니다."
레아의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앨리스가 선수를 쳤다.
어쩌면 기분나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레아의 반응은 의외로 잠잠했다.
아니, 오히려 앨리스의 선택을 흥미로워하는 느낌?
"북쪽을?"
내게는 그 말이 꼭 '굳이?'로 들렸다.
그러다보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놈의 북쪽 코스에 뭐가 있길래 저렇게까지 흥미로워 하는 걸까.
나야 알 도리가 없었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중간이나 가자는 생각으로 침묵하고 있었더니 앨리스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음, 그 부분은 같은 조가 된 사람의 생각도 한 번 들어봐야할 것 같은데."
갑자기 화살이 내쪽으로 날아오더라.
네 생각은 어떠냐.
꼭 그리 묻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푸욱하고 꽂혔다.
그에 잠시 고민하다가..
"전 상관없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별 이유는 없었다.
뭘 알아야 고민을 하던 말던 하지 아는 거라고는 북쪽코스라는 이름 하나밖에 없는데 어쩌겠는가?
따라가야지.
물론, 거기에는 앨리스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렇게까지 먼저 선점하기 위해서 나선 걸 보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뭣보다 앨리스가 내게 해가 될만한 결정을 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럼 1조는 북쪽 코스를 도는 걸로."
그대로 결정이 되어버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여 확정을 지어버리는데 마침 잘 됐다는 태도라서 솔직히 살짝 찜찜하긴 했다.
그러니까 일에 엄청나게 치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으로부터 비롯된 찜찜함이라고 해야할까.
파견근무에서 거둔 성과가 월말평가 때 반영된다는 걸 고려하면 아무 일 없이 한가한 것보다야 바쁜 편이 낫기야 하겠지만은..
'이거 왠지..'
알아서 갈리겠다고 선언한 것 같은데..
으음..
뭐라 형용키 어려운 찝찝함을 느끼고 있자니 레아가 나와 앨리스를 밖으로 쫓아냈다.
설명하는데 방해가 되니 먼저 나가서 앞으로 돌게될 코스나 먼저 안내받고 있으라는 이유였지만..
'찝찝하다 찝찝해..'
내게는 왠지 이제와서 생각을 바꿔 다른 쪽으로 갈아타는 걸 막기 위해 억지로 쫓아내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이 그쪽으로 쏠려있어서 그런 생각만 드는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방밖으로 나오니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나와 앨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순찰코스를 안내하기 위해 차출된 모양.
"안녕하십니까. 생도님들."
물론, 그녀도 날 힐끔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관심을 숨기질 못한달까.
그에 속으로 쓰게 웃고 있자니 나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앨리스가 스스로를 제인이라 소개한 병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어떤 코스를 배정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북쪽입니다."
그 순간 난 봤다.
앨리스의 입에서 북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제인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걸.
꼭 마치 '귀찮게 됐다.'라는 느낌?
그러니 더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북쪽 코스가 어떤 곳이길래 보좌관인 레아도 그렇고 병사인 제인도 그렇고 하나같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앨리스가 제인이 보여준 틈을 곧바로 찌르고 들어갔다.
"아, 따로 안내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수도 토박이라서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저는.."
"따로 볼 일 보고 계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네넵!"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저렇게까지 기뻐하는 건데?
의문이 더 깊어지는 걸 느끼고 있자니 화려한 말빨로 제인을 돌려보낸 앨리스가 날 향해 작게 손짓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움직이다보니 알 수 있었다.
왜 다들 그런 반응이었는지를.
그러니까 북쪽 코스는 말하자면..
현실로 따지면 이태원같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술집하고 클럽이 엄청나게 몰려있는 그런 곳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이세계다 보니 클럽대신 홍등가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쉽게 말해 순찰 중에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만한 곳이었다.
북쪽 코스는.
홍등가하고 술집의 조합이라니.
거나하게 취한 취객들하고 드잡이질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참.. 행복하더라.
동시에 확신했다.
실적 하나만큼은 진짜 원없이 쌓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