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우뚝하고 굳어버린 레이시아의 모습은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저 볼륨감 넘치는 몸을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꾹 눌러참았다.
아직 거기까지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욕망이 미친 듯이 끓어올라도?
참아야했다.
당분간은 그녀의 앞에서 담백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야 더 번민하고 더 흔들릴테니..'
그래서였다.
얼른 그녀를 끌어안아 품 속에 가두라고 부르짖으면서 몸을 파들파들 떨어대는 손가락의 격렬한 몸부림을 무시하며 천천히 그것을 뒤로 빼낸 것은.
"음, 역시 잘 어울리네요."
그렇게 손을 뒤로 물리면서 얼굴 위로는 흡족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은 덤이었다.
옆머리에서 느껴지는 머리핀의 무게가 생소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여전히 멍해보이는 얼굴을 한채로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옆머리에 매달린 그것을 어루만졌다.
톡-
새하얀 손가락과 부딪힌 흰색의 머리핀이 슬며시 흔들렸다.
그런 식으로 내가 채워진 머리핀을 어루만지는 레이시아의 손놀림은 뭐랄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생경한 무언가를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모습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그걸로 인해 그녀의 안에 뭔가가 깃들었음을.
'이럴 때가 중요하다고 했었지.'
다른 건 몰라도 여자 꼬시는 것 하나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놈이 자랑삼이 늘어놓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그때 놈이 그랬으니까.
상대가 반응했다는 확신이 들면 기세를 잡아 확 밀어붙이거나 그게 안 먹힐 것 같으면 아싸리 깔끔하게 물러나 나중을 기약하라고.
그리고 내 어줍잖은 식견에 따르면 지금은 물러나야할 때였다.
레이시아의 안에 디아나라는 존재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이상 여기서 더 밀어붙인들 역효과만 날 게 뻔하니까.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해서 방긋 웃으며 그리 선언하니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꼭 '벌써..?'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학원에서 출발할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차이라 할 수 있는 그 반응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방금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지명권을 소모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제 지명권이란 놈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따먹은 이상 이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을테니까.
'전체 1등은 좀..'
어려울 것 같긴 한데.. 그것도 뭐 레이시아가 하기에 달렸겠지.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면서 실기도 그렇고 필기도 그렇고 올백에 가까운 성적이라니 그게 말이냐고 방구냐고.
속으로 툴툴대면서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레이시아와 함께 낮과 저녁 사이에 걸친 애매한 시간대의 거리를 거닐었다.
학원이 점점 가까워지니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확실한 건 아까하고 비교하면 한결 말 수가 적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따라 덩달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도 잠시, 저멀리 후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에 맞춰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가게 주인이 곱게 포장해준 머리끈이 든 봉투를 살짝 흔들어보이니 그걸 확인한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웃었다.
"회장님은 좀 아쉬우시겠습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농담조로 덧붙이니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 위로 살짝이지만 금이 갔다.
동시에 어깨가 흠칫거린 게 아무래도 찔리는 거라도 있는 모양.
그 동요를 모르는 척 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농담조를 유지한채로.
"모처럼 합법적으로 농땡이를 칠 수 있는 기회였을텐데 말이죠."
"아, 음.."
내 말에 뭐라 답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레이시아가 이내 푸스스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말이지?"
"음.. 저는 사실 회장님이 절 안 좋게 보고 계신 줄 알았거든요."
그 말에 레이시아는 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한 것이겠지만.
물론,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오해도 풀겸 자리를 마련했던 건데.."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면서 중얼거리듯 말하니 레이시아가 농담조로 맞받아쳤다.
"이런, 그럼 이 머리핀은 뇌물이었나? 잘 봐달라는?"
어째 농담이 꼭 농담같지만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가 제게 머리핀을 선물한 저의가 뭘지.
농담처럼 툭 던져놓고는 흘깃흘깃 내 얼굴을 훔쳐보면서 내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거나 긴장 때문인지 몰라도 살짝 경련하는 눈동자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여기서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아뇨."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라는 뜻으로.
그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살짝 흔들린 순간.
"그냥 식당에서 보니까 옆머리가 신경쓰이시는 것 같으셔서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내 발언이 레이시아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갔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효과가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답한 순간 레이시아가 슬며시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으니까.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저 멀리 떨어져있던 후문이 어느새 훌쩍 다가와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정말로 이 자리를 끝내야할 시간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머리카락 말이다.
혹시나 고새 약효가 다하진 않았을까 시험삼아 한 가닥을 뽑아보니 전체가 까맣게 물들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긴 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고 있자니..
"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나지막한 탄성이 농익은 붉은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머리는 이걸 마시면 원래대로 돌아갈거다."
처음 내게 약병을 건네줄 때처럼 품속에서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내든 그녀가 그것을 날 향해 내밀었다.
물론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대로 입 안에 대고 털어넣었다.
그것으로 진짜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전 먼저.."
"음."
들어가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아를 뒤로한채 그대로 후문 쪽을 벗어났다.
그렇게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어후."
나는 곧바로 뒤집어 쓰고 있던 케이프부터 벗어던졌다.
아무리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만히 걷기만 해도 덥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헌데 이런 것까지 뒤집어 쓰고 있었더니 땀이 장난 아니었다.
해서 그것부터 벗었더니 확실히 한결 낫더라.
그렇게 벗은 케이프를 팔에 걸어놓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머리쪽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모양.
다른 이에게 보여서 좋을 모습은 아니었기에 즉시 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모습을 숨기려 했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출발할 때만큼이나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니까.
다들 수업들으러 간 걸까.
아니면 밥?
아무튼 오가는 이 한 명 없이 한적한 후문 쪽 산책로를 걸으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수확이 결코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 이러면..'
레이시아한테도 떡밥은 던져놨고, 남은 건 그게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동안은?
이전처럼 디아나와 앨리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둘을 적당히 자극하면 될 터.
'아.'
그러고보니 카트린느도 있었지.
저번에 주인공 놈을 대신해 약을 받으러 갔었을 때 나중에 한 번 들리겠다고 말해놨으니 말이다.
그녀는 그걸 빈말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었다.
그렇게 말을 한 이상 진짜로 찾아갈 생각이니까.
'주인공 놈한테 건네준 약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주인공 놈이 있을 때는 피할 생각이다.
놈이 옆에서 버티고 있으면 약의 정체에 대해 물을 수가 없을테니까.
'딱봐도 평범한 약은 아닌 것 같던데..'
주인공 놈이 그것에 대해 캐묻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겠는가?
뭣보다 주인공 놈이 있으면 여러모로 방해였다.
놈이 신경쓰여서 카트린느한테 작업을 치기 힘들테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놈의 앞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고수할 필요가 있으니까.
'흠..'
농익을대로 농익은 몸매와 그런 몸매를 가진 것치고는 어린아이마냥 자각없이 행동하던 카트린느의 기묘한 매력을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고 있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그런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은..
인생사란 항상 새옹지마라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따라붙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법.
덕분에 나는 여태껏 일이 잘 풀린 대가를 한 번에 몰아서 받게 되었다.
조금 기묘한 형태로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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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
이렇게 말이다.
"..네?"
뭐라굽쇼?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따로 할 말이 있다길래 남았더니 이게 뭔..
솔직히 클레어가 디아나가 한 눈을 판 틈을 타서 내게 따로 찾아와 끝나고 나서 남으라는 말을 했을 때 어느 정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정도는 했었다.
애초에 형식상의 제자에 불과한 나를 그녀가 따로 남길 이유라고 해봐야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단도직입적으로, 저렇게까지 대놓고 노골적인 요구를 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래서였다.
벗으라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벙찐 표정을 지었던 건.
그런 내 표정이 클레어에게는 조금 다르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자니 클레어의 얼굴 위로 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못 들었어? 벗으라니까?"
아까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그녀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살짝 빨갛게 충혈된 것이 누가봐도 나 '욕구불만'입니다 하는 느낌?
아니, 대체 무엇이 검밖에 모르던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던 말인가?
'..설마 나?'
에이 설마..
라고 부정하기에는 짚이는 점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얘를 진짜 어떻게한다?
그녀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들어주기에는 클레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내 경험에 따르면 보통 저렇게 흥분이 뇌수까지 침투한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들은 늘 진짜 상상도 못할 미친 짓을 저지르곤 했으니까.
그랬다.
클레어는 지금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날 겁박하면서 말이다.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녀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설마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해서 그녀의 안에 쌓일대로 쌓인 가학성이라는 놈이 내게 치녀 짓을 한 걸 계기로 폭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클레어와 내 정조를 두고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나는 눈앞의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멀쩡하던 그녀가 저렇게 된 데에는 내 지분이 한 70퍼센트 정도는 있을테니까.
애초에 내가 정체를 들키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정체를 들키고 나서 그녀가 날 상대로 욕망을 드러낼 때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저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원래라면?
그녀는 주인공의 스승으로 한창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더더욱 책임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건..'
책임져야겠지.
절대로 저번에 당했던 자극적인 손놀림이 생각나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인만큼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것일뿐.
"응? 나한테 약속했었잖아? 입 닫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로?"
아니, 근데 눈 좀 진짜 어떻게 해주면 안 될까.
아무리 나라도 저건 좀 부담스러운데.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 지경이었다.
해서 그것을 살짝 피하면서..
"..그래서 벗으라고요?"
날 벽까지 몰아붙인 여자의 물음에 답했다.
살짝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그 정도면 움찔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맛탱이가 가버린 그녀에게는 흥분을 돋궈주는 조미료밖에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응, 맞아."
클레어가 누군가를 협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싱글벙글한 미소를 얼굴 가득 베어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단 말로 얘를 진정시키는 건 무리라는 걸.
그렇다면?
머리끝까지 차올라있는 저 흥분부터 어떻게 해줘야겠지.
일단 저걸 해결하고 나면 그나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질테니까.
그래서..
"싫다면요?"
보란듯이 튕겨주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그녀를 노려보면서.
그런 내 행동에..
"흐응..?"
클레어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꼭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의 그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