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참 신기한 남자라고 레이시아는 생각했다.
사실 학원에서 처음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딱히 별 생각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제 앞에 쌓인 일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일하러 갈 생각뿐이었다.
모처럼 합법적으로 얻은 휴일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게 참 슬프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멈춰버리면 여기저기서 일이 꼬여버리는 것을.
그래서 디아나한테 건네줄 거라는 선물인지 뭔지만 골라주고 바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식당부터 들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솔직히 그럴 시간도 아까웠으니까.
그러지 못했던 건 시간이 너무 일러서 지금 가봐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남자의 말 때문이었고.
확실히 그 말이 맞았으니까.
그도 생도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시간을 피하고 싶었던 건지 약속 시간을 조금 이르게 잡았었으니까.
그래서 굳이 입씨름을 하지 않고 일단 따라갔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을 뿐더러 나온 김에 식사를 해결한다면 들어가서 밥먹을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갓 나온 음식을 마주한 순간.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럽지만 솔직히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갓 나온 음식을 마주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으니까.
마지막에 그랬던 것이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음식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일일텐데 말이다.
정말로 먹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스쳐서 섣불리 숟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드르륵-
분명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남자, 그러니까..
'이안이었나?'
아무튼 그의 앞에 놓여져있던 접시가 이쪽으로 배달되었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가슴 속으로 가득 채우고 있던 돌아가서 밀린 일을 처리할 생각, 친우인 디아나에게 얼쩡거리는 남자에 대한 불편함같은 것들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건.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때부터 마음이 묘하게 편해졌던 것 같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혼자서 생각했던 것하고는 다르게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배려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남자답지 않게 배려심도 깊었고 마주앉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뭔가도 있었다.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남자한테 배려를 받는다는 건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입장이었지 배려를 받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디아나가 눈앞에 남자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다니.
분명 이런 점 때문에 좋아하게 된 거겠지.
이러니 반할 수밖에.
그래서였다.
이 남자라면 디아나의 상대로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친우의 옆자리를 차지하기엔 고작 이 정도가지곤 부족했으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고작 몇 도 차이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나 싶을 정도로.
속이 확 풀어질 정도로 따뜻한 게 들어간 탓일까.
알게 모르게 곤두 서 있던 신경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편안했다.
평소라면 소란스럽다며 질색했을 이 분위기가 말이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상대방의 입가에 걸려있는, 스튜에 젖은 빵만큼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 때문이었지도 모르고.
아무튼 확실한 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말이 술술 나왔다.
대부분 하소연에 가까운 말이긴 했지만.
디아나도 이랬던 걸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보면 볼수록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의 앞에서 장담했던만큼의 순위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자의 몸으로 통합 2위라는 성적을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마 디아나가 일찌감치 점찍어두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문과 여자들이 그를 노리고 덤벼들었겠지.
그 중에는 왕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상대의 신분?
압도적인 능력만 있다면야 그런 것따위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러한 신탁이 내려온 시점이니만큼 더더욱.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요."
식당에서 먹은 것만으로는 살짝 부족했는지 좌판에서 꼬치를 구매한 이안이 그 중 하나를 내밀어왔다.
솔직히 냄새가 너무 유혹적이라서 무척이나 끌리긴 했지만, 내밀어진 것을 보고 사양하려 했다.
아무래도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굳이 그쪽을 내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랬는데..
그런 자신의 속내도 모르고 억지로 쥐여주더라.
'이걸 어쩐다..'
어떤 맛이 날지 무지하게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니 왠지 디아나한테 죄를 짓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차마 손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꼬치에서부터 풍겨져나오는 달달한 냄새를 맡고 있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 혼자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저쪽은 말 그대로 별생각없이 자신을 배려해서 한 행동일 뿐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나하나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였다.
머뭇거리던 태도를 집어치우고 조심스레 그쪽으로 입을 가져다댄 것은.
'확실히..'
풍겨오는 냄새만큼이나 괜찮은 맛이었다.
맘같아서는 아까 그 좌판 주인을 왕실로 초대해서 제대로 맛보고 싶을 정도였다.
동시에 지금 상황이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왕궁이나 학원같은 곳에서 자신이 이렇게 걸어다니면서 뭔가를 먹었다면?
아주 난리가 났겠지.
분명 체통을 지키셔야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시녀들이 득달같이 몰려와 자신을 뜯어말렸을테니 말이다.
그 모습을 상상한 탓일까.
꼭 마치 '그것'을 할 때처럼 묘한 해방감이 몸을 감싸안는 게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기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자니..
"생각할수록 이상하네요."
이안이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다.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지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의문을 눈빛 속에 담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던지니..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회장님만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돌아온 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누구도 저런 의문을 제기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 스스로조차도 말이다.
그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기에 해왔을 뿐인데..
저쪽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그렇잖습니까? 한 명한테 일이 몰리고, 그 한 명이 없으면 모든 게 어그러지는 구조라니."
그 한 명이 져야하는 부담이 너무 크다며 이안이 불평 비스무리한 말을 입에 담았다.
"글쎄 능력이 있다면 당연한 일 아닐까."
"그래도 이렇게 한 명한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는 조금..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는 쉬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문또한 그 누구도 제기한 적 없는 것이었으므로.
"선배님은요?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글쎄.
잘 모르겠다.
말했다시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왕족으로서,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만하는 일이라고 교육받았고 생각했기에 해왔던 것일뿐 그런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그렇기에 처음이었다.
그로인해 걱정을 받는 것은.
그래서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자신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하고.
'..괜찮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말했다시피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괜찮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요즘들어 답답함이 느껴지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뭔가에 쐐기를 박아넣은 건..
"만약 괜찮지 않으시면.. 조금 쉬엄쉬엄 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속삭임처럼 울려퍼진 한 마디였다.
쉬엄쉬엄이라니.
자신이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흔들림이 한층 더 격해진 순간, 속삭임이 다시 한 번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차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하고, 그게 당연한 거라는 것처럼 잔잔하게.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않습니까. 본인이 행복하지 않고 힘들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헛소리라고 일축해버렸을 것이다.
헌데 그러지 못하는 건..
그만큼 자신이 지쳤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이미 한계와 직면해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해왔던 걸지도 모르지.
의무라는 이름에 묶여서 말이다.
이쪽이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걸까.
이안은 그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아까는 그쪽에 집중한다고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도라는 위명에 어울리는 하나같이 활발하기 그지없는 소리들.
그것들을 귀에 담으며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다들 각자 할 일이 있는 걸까.
눈에 띄는 이들마다 제법 바빠보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바빠보이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처럼 일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건 아닐까하고.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살짝 떨어진 곳에 쪼그려앉아있는 이안의 모습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인 것일까.
꾀죄죄한 옷을 걸치고 있는 남매를 앞에 둔 그는 둘에게 손에 든 것을 조심스레 내밀고 있었다.
저건 또 언제 사온 것일까.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음식을 건네받아 나눠가지는 남매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음..'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간질간질거리는 느낌?
자그마한 깃털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그곳을 간지럽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기묘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리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못한 채 오도카니 서 있으니..
꼬마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는 것으로 둘을 돌려보낸 이안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얼굴에 살짝 씁쓸해보이는 미소를 베어문채로.
그 얼굴을 본 순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는 아이들인가?"
"음, 아뇨."
그러면 왜 선뜻 도와준 것일까.
"그냥.. 보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저도 사실.. 음.."
"아.."
대답을 들은 순간 후회했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마음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그런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자니..
"아, 이만하면 문 열였을 것 같은데 한 번 가볼까요?"
그리 말하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이안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보니 나타난 것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곳이었다.
쭉 늘어선채 온갖 것들을 팔고 있는 가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그러고보니 뭘 선물할 생각이지?"
"음, 글쎄요.. 일단은 머리핀을 생각하고 있긴 한데.."
머리핀이라.
나쁘지 않았다.
일단 선물받는 입장에서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질만한 물건도 아닐 뿐더러 디아나는 머리를 묶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니까.
한 번 선물해주면 분명 요긴하게 사용할테지.
"디아나가 선호하는 스타일을 알고 싶은 건가?"
"그렇죠."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었으니까.
디아나라면?
그가 뭘 선물해주던, 하다못해 아무 장식도 없는 흔하디 흔한 머리끈을 선물해주더라도 행복하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보일테니까.
그런 아이니 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잘 어울리는 게 좋겠지.
주는 입장에서도 받는 입장에서도 말이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자신이야말로 적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디아나를 봐온만큼 그 아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게 그 아이한테 어울리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니까.
'어디보자..'
쓸만한 게 있으려나?
일단 비싸보이는 것은 피하는 게 좋겠지.
그 정도로 지갑사정에 여유가 있어보이진 않으니까.
가격대가 적당해보이는 것들 중에서 디아나한테 잘 어울릴만한 것.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긴 채 주변을 훑어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좌판 위에 놓여져있는 새하얀 장식이 달린 머리끈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백옥같은 걸 깎아서 만든 것일까.
귀여운 토끼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는 머리끈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앞으로 몇 시간을 더 뒤지더라도 저것만한 걸 찾아내지 못할거라는 것을.
그만큼 조건에 딱 부합하는 물건이었다.
디아나는 안 그런척 해도 은근 귀여운 걸 좋아하니까.
특히 토끼나 고양이같은 것에는 맥을 못 추곤 했다.
그러니 저걸 선물해주면 분명 부끄러운 척 하면서도 입꼬리를 움찔움찔하면서 기뻐할 터.
"저거 어때?"
그래서 곧바로 그것을 손으로 짚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이안도 그게 딱이라고 생각한 건지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그것을 집어들어서 주인 쪽으로 향했으니까.
그렇게 이안이 계산을 하러간 사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회장님."
계산이 끝났나 보다.
그래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섰는데..
스륵-
굵직한 손가락이 이마를 스치며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그에 저도 모르게 흠칫한 순간.
딸칵-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 뒤로 따라붙은 건..
"음, 역시 잘 어울리네요."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와 함께 귓속으로 파고 들어온 웃음기어린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옆머리 쪽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무게에..
쿵- 쿵- 쿵- 쿵-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었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큰일났다..'
이상한 것이 가슴 속에 자리잡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