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얘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셔서 이러는 걸까.
혹시 빵과 함께 나온 스튜에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기라도 했나?
그래서 손대지 않으려는 거고?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어서 흘깃 레이시아의 앞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살펴봤지만 딱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멀어서 내쪽에서는 안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아니, 그래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물어봐도 대답은 안 하고 '으음..'하고 애매한 소리만 흘려대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흘겨보다가 새삼 깨달았다.
쟤가 왜 저러는 지를.
그러고보니 얘..
'왕녀였지.'
심지어 장녀라서 유력한 왕위계승권자기도 했다.
그렇다고 경쟁자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나이 차가 상당하긴 하지만 2왕녀라는 존재가 버젓이 존재하니 말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저러는 걸 거다.
음식에 뭔가 섞여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레이시아의 지지층이 워낙 두텁다보니 상대적으로 수세인 2왕녀파 입장에선 레이시아가 경쟁에서 퇴장해주는 것만큼이나 최상의 시나리오도 없으니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전에 몇 번이고 그런 시도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저렇게 조심하는 거겠지.
'음..'
그리 생각하면 이건 내 실수가 맞았다.
해서..
일단 내 몫으로 올라온 것을 한 입 떠먹은 뒤에 그것을 그대로 레이시아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그런 내 행동에 그녀가 멈칫하는 틈을 타서 그녀의 것을 내 앞으로 끌고왔다.
"드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 내 행동이 의외였던 것일까.
물끄러미 내쪽을 바라보길래 똑같이 시선을 돌려주니 레이시아 쪽에서 먼저 눈을 피했다.
스윽-
역시나 내가 생각한 그 이유가 맞았나 보다.
내가 떠밀어준 것을 조심스레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레이시아를 보며 같이 먹으라고 가져다 준 빵을 한 입 크기로 찢어서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방금과 똑같은 크기로 찢어서 레이시아의 앞에 놓인 그릇 위에다가 조심스레 올려주었다.
그런 내 행동에 레이시아가 움찔했지만, 못 본 척 가볍게 무시한 뒤 내 할 말을 했다.
"한 번 같이 드셔보세요. 더 맛있을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했건만 레이시아는 내가 손수 찢어준 빵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향해 의미모를 시선을 던져댈 뿐.
덕분에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해진 가운데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온 것은 아까 주문을 받아갔던 예의 그 점원이었다.
젊은 커플을 보면 참견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건 아줌마 아저씨들의 종특이라도 되는 걸까.
"어쩜, 연인 분이 엄청 자상하시네~"
옆을 지나가다가 내가 하고 있는 걸 확인한 점원이 부러워 죽겠다는 투로 그리 말했다.
덕분에 레이시아의 얼굴이 굉장히 어색해졌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데 분위기상 그럴 수가 없어서 꾹 눌러 참는 느낌?
그런 그녀를 대신해 부정한 건 다름아닌 나였다.
"그런 거 아닙니다."
쓰게 웃으면서 레이시아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말을 척 내놓으니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살짝 기분 나빠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런 표정을 한채 묵묵히 제 몫의 스튜를 떠먹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맛있는 음식은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한 입 두 입 맛있는 게 입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어지는 게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어때요? 괜찮지 않나요?"
"음, 뭐.."
"물론, 평소에 드시는 것들에 비하면 못 미치겠지만.."
"왕녀라고 맨날 휘황찬란하게 먹는 건 아니다만."
"아.."
그건 몰랐다는 듯 볼을 긁적이니 그런 내 표정을 확인한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웃었다.
"애초에 시간이 없어서 샌드위치같은 걸로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기회를 잡자마자 압박을 가해오는 걸 보니 맛있는 것 덕분에 살짝 느슨해졌어도 레이시아는 레이시아였다.
그 정도로 바쁜 나를 네가 쓸데없이 붙잡고 있는 거다.
꼭 그런 느낌으로 말하길래 알아듣지 못한 척 흘려넘겼다.
"그래도 이렇게 따뜻할 때 먹는 건 꽤 오랜만이군. 기미니 뭐니 하고 나면 다 식어있기 태반이라서 말이지."
음식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게 굉장히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접시 아랫 부분에 손을 댄채 그 온기를 즐기는 레이시아를 보고 있자니 살짝 안쓰럽게 느껴지긴 했다.
확실히 아이스크림같은 차게 먹는 것들을 빼면 음식은 따뜻할 때 먹는 게 최고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식으면 맛이 덜해지는 법.
그래서일까?
레이시아는 김이 풀풀 올라올 정도로 따뜻한 스튜를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까 전보다는 기분이 확실히 풀어진 것 같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레이시아를 살살 구슬렸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가 불만을 품고 있을 게 뻔한 부분을 살살 긁어주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속에 담긴 이야기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로 바쁘십니까?"
물론 적당히 디아나의 핑계를 대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나도 널 찾아가고 싶어했는데 네가 바쁠까봐서 망설이더라.
대충 그런 느낌으로 입을 털어주니 학원에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두텁기 그지없었던 레이시아의 가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음, 뭐.."
"학생회 분들은 그렇게까지 바빠보이진 않던데.."
그런 식으로 시작된 대화는 식사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좀 망설이는 것 같더니만 한 번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고나니 그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저항감이 덜해졌던 걸까.
"나야 왕녀로서 처리해야할 일도 같이 처리하고 있으니까."
"아.."
"그들에 비하면 바쁠 수밖에 없지."
"그 정도로 일이 많은가요?"
"매일 전국에서 처리해야할 서류가 올라오니까."
나름 오랫동안 그러한 일상을 반복해온 걸까.
그런 게 익숙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녀와 어떤 식으로 가까워지면 좋을 지를.
"신기하네요.."
그래서 생각난대로 내뱉어봤다.
"뭐가 말이지?"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미끼를 덥썩 물더라.
뭐가 그리 신기하냐고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얼굴을 긁적거리며 말하길 망설이는 척을 했다.
그런 내 몸짓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웃었다.
"왜? 실례되는 말인가 보지?"
"으음.."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듣고야 말겠다는 것일까.
레이시아가 걸음을 옮긴 채 팔짱을 꼈다.
말해주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거참..'
아까는 빨리 돌아가지 못해서 난리더니 이제는 시간 끄는 걸 빌미로 이쪽을 압박해보시겠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레이시아가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의 상황을 보다 편안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뭐가 계기였을까.
평소에 먹던 차게 식은 음식들과는 다르게 속을 따뜻하게 풀어주는 뜨끈한 스튜?
아니면 자신의 하소연 비슷한 말들을 성심성의껏 들어준 내 태도?
뭐가 계기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렇다면야 나야 환영이었다.
애초에 내 노림수가 그거였으니까.
그녀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일종의 휴식시간처럼 여기게 되는 것 말이다.
'일단은 그렇게 시작해야지.'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다보니 급발진을 했다간 분명 탈이 날테니까.
그래서였다.
오늘 저번에 챙긴 로브를 챙겨와서 보란듯이 그녀의 눈앞으로 들이밀 수 있음에도 굳이 챙겨오지 않았던 건.
'어차피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테니까.'
그런 건 조금 더 친분을 다진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레이시아의 물음에 답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사실 전 왕족이면 다 편하게 놀고먹으면서 사는 줄 알았거든요."
연이은 그녀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털어놓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끼니 챙겨먹을 생각도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고 하시니까 뭔가 음.."
살짝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흘깃 레이시아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런 내 눈에 비친 레이시아의 얼굴은 굉장히 묘했다.
어딘가 웃음을 참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듯한 느낌?
"왠지 국민으로서 감사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네요."
"감사라.. 나야 내 의무를 다하는 것 뿐인데."
내 말이 낯간지럽게 느껴졌던 걸까.
큼하고 작게 헛기침을 한 레이시아가 거기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물론, 그리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그 최소한의 의무마저도 다 하지 않는 사람이 천지인데요."
그러니까 감사받을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을 내저으니 그녀가 무심결에 후하고 웃었다.
그녀도 동감하는 모양.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뭐가 말이지?"
"음..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레이시아가 그건 또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던져왔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척 가볍게 흘려넘기면서 마침 눈으로 들어온 좌판 쪽으로 향했다.
좌판에서는 꼬치구이를 팔고 있었다.
무슨 고기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달착지근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게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두 개만 주시겠어요?"
"아이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내가 내민 것을 넙죽 받아드는 주인에게서 돌아서니 한 발 늦게 합류한 레이시아가 살짝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나는.."
자긴 괜찮다는 걸까?
아직 주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거참..
물론,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말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니 살짝 심술이 났다.
그래서..
"네? 저 먹으려고 산 건데.."
그건 또 뭔 소리냐는 뜻으로 받아치니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붉은 기운이 확 치솟았다.
그야말로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들이킨 게 많이도 민망했던 모양.
"점심을 애매하게 먹었더니 살짝 출출해서요."
그렇게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흘깃거리고 있으니 주문했던 게 내 앞으로 등장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 말과 함께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꼬치구이의 비주얼은 좌판에서 나온 것 치고는 상당히 훌륭했다.
'오우..'
여기에 콜라만, 아니 하다못해 아무거나 탄산이 들어간 음료수까지 있었다면 그야말로 완벽했을텐데.
다시 한 번 콜라개발에 대한 욕망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걸 야무지게 한 입 뜯어먹었다.
어떤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흡사 닭다리살과 유사한 육질을 가진 고기가 내 이빨 밑에서 뭉개지며 속 안에 품고 있던 육즙을 촤악하고 뿜어냈다.
미리 밑간을 좀 해둔 것인지 살짝 짭짤한 그것이 겉에 발려있던 달달한 소스하고 이리저리 뒤섞이는데..
'오우 쉣..'
그야말로 극락이 따로없었다.
아니, 지옥이었다.
한 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단짠의 지옥.
이런 건 바로바로 리뷰를 해줘야지.
"소스가 엄청 맛있네요."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내 칭찬이 기꺼웠던 걸까.
기분좋게 웃으며 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주인으로부터 돌아서니 내 손에 들린 꼬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 식탐이 많은 타입 같지는 않았는데 아까 식당에서 먹은 스튜가 위장에 불을 지른 걸까.
'하긴..'
그렇게 따뜻한 걸 먹는 게 오랜만이라고 그랬으니까.
없던 입맛도 생길 수밖에 없겠지.
어쩐다..
원래부터 줄 생각이긴 했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놀리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자요."
참았다.
먹을 것같고 놀리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또 없으니까.
물론 그냥 건네주지는 않았다.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의식한 처럼 새 것이 아닌 한입 베어문 쪽을 그녀를 향해서 내미니 레이시아가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그렇겠지.
얼핏보면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하고 별 차이 없어보여도 이건 꽤 차이가 크니 말이다.
일단 이쪽은 내 입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나?
아까하고는 다르게 그 사실이 의식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일까?
레이시아는 간절해보이던 태도하고는 다르게 살짝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해서..
"괜찮다니까요? 방금 제가 직접 확인해봤잖아요?"
나는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를 그렇게 인식한 것처럼 빵긋 웃으며 망설이던 그녀의 손에 내 몫의 꼬치를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른 가자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