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52)화 (52/366)



〈 5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래서?"


살짝 기막혀하는 시선이 얼굴로 푸욱하고 날아와꽂혔다.


제법 따끔한 그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통합 2위를 달성한 보상이랍시고 교수를 통해 전해받았던 백금빛의 토큰 하나를 레이시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보시는 대롭니다."


널 지목하겠다.


그런 내 뜻을 말대신 내려놓은 토큰을 손가락으로 한 번 툭 두들기는 것으로 표현하니 레이시아가 곱디 고운 눈썹을 슬며시 찌푸렸다.


 상태로 날 바라보는데..


'디아나한테 쓸거라면서?'

꼭 그리 묻는  했다.


그 말에 무어라고 답을 하는 대신 말없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랬더니..


"..미안하지만 거절하지. 장난에 어울려줄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서 말이야."

돌아온  단호한 목소리였다.


더는 신경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레이시아가 내쪽을 향해 던지고 있던 시선을 다시 제 손에 들린 서류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얼굴 위에 띄우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서류 너머로 얼핏 보이던 고운 얼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못 들었나? 분명 거절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썩 꺼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피식하고 웃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리고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아마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레이시아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밑으로 내리며 날 향해 가소롭다는 눈빛을 보내온 것은.


"아직 순위 확인을 하지 않은 모양이지?"


간단히 말해 어딜 감히 2위따리에 불과한 네가 1위인 날 넘보냐는 뭐 그런 소리였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내가 자기한테 지명권을 사용하면 자기도 스스로한테 지명권을 사용해 그걸 방어하겠다는 소리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거절하신다는 겁니까?"

내 말을 듣고 끈질기다고 생각한 걸까.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고운 입술 사이로 한숨을 살짝 흘린 레이시아가 입고 있던 제복의 주머니를 뒤적여 내가 꺼내놓은 것과 똑같은 크기의 토큰을 내 토큰 옆에 내려놓았다.


차이가 있다면 토큰에 새겨져있는 숫자였다.

과연 1위한테 주어지는 것이라 그런 걸까.

디테일도 그렇고 색깔도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보란듯이  몫의 지명권을 꺼내놓은 레이시아가 날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러면  대답이 되겠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제가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이쯤에서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치 못해 그녀가 놓쳐버리고만 자그마한 틈을.


"확실히.. 지명권을 가지고 있으면 혹시라도 지명당했을 때 그걸 거절할 수 있다는 규칙이 존재하긴 하죠."

그리 말하니 날아와 꽂힌 건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 억지를 부린 거냐고 꾸지람이라도 하는 듯한 그 시선에 나는  참지 못하고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에 레이시아의 눈이 가늘어진 순간.

비로소 꺼내놓았다.

"그렇지만 그건 지목당한 이가 남성일 때에만 해당하는 걸로 아는데요."

그녀가 놓쳐버린 자그마한 틈을.


그랬다.

지명권을 이용해 지명권을 카운터 칠  있는 경우는 지목당한 이가 남성일 때뿐이라고 학원에서 발표한 내용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꽤나 긴 내용  어디에도 여성이 지명을 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렇겠지..'

애초에 그런 케이스 자체가 극히 드물 뿐더러 혹시나 발생한다 하더라도 여성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명권을 얻을 정도라면?

남자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하다는 증거다.


그런데 그런 남자와의 하루를 거절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라도 있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상대가 있더라도 거절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이 세계의 여자들은 상당히 출세 지향적이니까.

'뭐, 아무튼..'


레이시아가 꺼내놓은 것으로는 내 지명을 거절할 수 없다는 소리다.

내 지적 덕분에 한  늦게  사실을 깨달은 탓일까.


레이시아의 눈이 아까보다 살짝 커져있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덧붙였다.

"설마 이제와서 규칙을 바꾼다거나 그러시진 않으시겠죠?"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었나 보다.


그녀의 자존심을 긁기 위해 그리 덧붙인 순간 레이시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하는 꼴을 볼  있었으니까.

"하긴, 회장님께서 그러실리가 없죠. 생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실 정도로 공명정대하신 분인데."


혹시 모를 개짓거리를 막기 위해 약을 팍팍 치고 있자니 제 상황이 상당히 난감하다는 걸 눈치챈 레이시아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더니..

"감당할 자신은 있고?"


대뜸 그리 묻는 게 아닌가?


 질문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나는 그녀가 작전을 바꿨다는 걸 알아차렸다.

거절하는 방법이 먹히지 않게 되어버렸으니 내쪽에서 지레 겁을 집어먹고 포기하도록 만드려는 모양.


그래서일까?


레이시아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게 굉장히 진중했다.


그리고 엄숙했다.


 상태로 그녀는 묻고 있었다.


자신을 지명하게 될 경우 그로인해 발생하게될 수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작전이라 생각했다.

아마 지금 여기  있는 이가 내가 아니라 평범한 평민 남성이었다면  말에 지레 겁먹고 꼬리를 말았을테니까.


'그렇지만 난 아니지.'


뭐라고 답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다.


"네? 그게 무슨.."


내가 뭘 감당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다는 투로 물으니 레이시아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럴  알았다는 것처럼.

그런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같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뭐?"

"디아나 선배한테  선물을 고르는데 회장님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말씀드렸던 건데.."


그쪽은 대체 뭘 생각한 거냐.

꼭 그리 말하는 것처럼 슬며시 말끝을 흐리면서 눈을 가늘게 뜬채 레이시아를 바라보니..

화아악-

레이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거기서 사실상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답지 않게 당황에 퐁당하고 빠져버린 레이시아는 아까와 같은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더니 결국 이틀 뒤에 학원 후문을 나가면 있는 가게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럼 이틀  그곳에서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

그리고 정확하게 이틀 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서 정문 쪽으로 나갔다.


일부러 사람이 별로 없을만한 시간대를 골라 택한 덕분일까.


후문 쪽은 오가는  한 명 없이 조용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쓴 케이프의 끈을 슬며시 잡아당기며 그대로 후문을 통해 학원을 빠져나오니..

볼 수 있었다.

내가 언급했었던 가게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오도커니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말이다.


저번처럼 가발이라도 뒤집어 쓴 것일까.

머리색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과는 달랐지만 무늬없는 흰색의 원피스 위로 슬며시 드러난 볼륨감 넘치는 몸매가 그녀의 정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의외네.'


저번에 정신  차리는 틈을 타서 억지로 밀어붙인 느낌이 없잖아 있는 탓에 어쩌면 싹 무시하고 안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러자니 왕녀라는 입장과 학생회장이라는 지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아무튼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레이시아를 향해 다가가니 그런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돌아서있던 그녀가 내쪽으로 돌아섰다.

후웅-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골목을 훑고 지나간 바람이 그녀의 몸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달큰한 향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꼭 마치 소프트 아이스크림같은 것에서나  법한 설탕 섞인 우유 냄새라고 해야할까.

달달하면서도 맡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 냄새를 만끽하고 있자니 불려나오게 된 것이 영 불만스러운지 팔짱을 낀채 삐딱하니 서 있던 그녀가 내 앞으로 척척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시도록."


대뜸 주머니 안에서 자그마한 약병 하나를 꺼내 날 향해 내미는 게 아닌가?

아니, 그래서 이게 뭔데.

약병을 받아드는 대신 그리 묻는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돌려주니 살짝 한숨을 내쉰 그녀 비어있는 손을 들어올려 제 머리를 가리켰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병 안에 든 것이 대충 어떤 역할을 해주는 것인지를.


분명 정체를 숨겨주기 위한 것이겠지.


그래봐야 머리색 뿐인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혼동을 주기에는 충분하니까.


"그냥 이대로 마시면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길래 여전히  향해 내밀어져있는 병을 받아들어 조심스레 뚜껑을 땄다.

냄새는..


'달달하네.'

맛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엿같은 맛만 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조심스레 그것을 들이키니 보라보라한 색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멜론같은 맛이 났다.

그렇게 안에 든 것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쪽에서부터 근질근질한 느낌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라.

뭔가 변화가 일어나긴 하고 있는 걸까.

거울이 없어서 확인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확인해보니..

꼭 염색한지 오래된 머리마냥 뿌리 부분이 검게 물들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음..'


이거 원래대로 돌아가긴 하는 거겠지?


약간 불안감을 느끼고 있자니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건지 내 머리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아가 뒤로 젖히고 있던 로브의 후드 부분을 뒤집어 쓰며 몸을 돌렸다.


"그럼, 얼른 가지. 시간이 없으니까."


아하, 이왕 이렇게  거 후딱 해치우고 끝내버리시겠다?


그리하고 말겠다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매를 뒤틀었다.

어딜.

내가 이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데.

그렇게 빨리 돌려보내줄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최대한 뽕을 뽑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죠. 보나마나 아직 식사 전이신 것 같은데."

빨리 들어갈 생각으로 가득  있는 레이시아의 관심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지.


그래서 제안해봤다.

밥부터 먹자고.


이미 먹었을 가능성?

내가 볼 때는 없었다.

그걸 막기 위해 일부러 애매한 시간대에 약속을 잡았던 거니까.

그리고 그런 내 제안에 나와 나란히 걷기 싫다는 듯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레이시아가 멈칫하더니 내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이건 또 뭔 개짓거리냐.'라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시간이 너무 일러서 가려고 생각해둔 곳이 아직 안 열었을  같아서요."

언제 열지도 모르는  앞에서 멍하니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그런 느낌으로 시간을 때워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어필하니 '으음..'하고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얼굴 위로 내비치던 레이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로  생각이지?"

"음, 근처에 제가 잘 아는 가게가 한 군데 있긴 한데.."

물론, 앨리스가 저번에 소개해준 가게였다.

앨리스에게 소개받은 곳에 레이시아를 데리고 가자니 살짝 양심이 따끔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곳이 그곳밖에 없는 것을.


처음 보는  중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들어간다는 선택지도 있긴 하지만 그랬다가 맛이 끔찍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또 없을테니까.


결국 적당한 곳은 앨리스가 소개해준 그곳 뿐이었다.

해서 은근슬쩍 그것을 어필하니 레이시아가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곧장 그곳으로 안내하니 의외로 레이시아는 가게 외관을 확인하고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긴 것만 보면 가게 외관을 확인하자마자 감히 날 이런 누추한 곳으로 데려온 거냐면서 언짢아할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두 분이신가요~?"


참으로 다행히도 가게를 보고 있는 건 저번에 봤던  점원 아조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기라도 한 것일까.


머리카락 색을 바꿨다지만 얼굴을 보고 알아보기라도 했으면 꽤 귀찮아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저번에 먹었던 그대로 주문을 끝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을 풀풀 풍기는 음식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래서 식기 전에 바로 식사를 시작하려 하니..

"..안 드십니까?"


제 앞으로 올라온 음식을 바라보며 고사를 지내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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