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51)화 (51/366)



〈 5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놈의 얼굴은 뭐랄까..


멍해보였다.

하긴, 그렇겠지.

방금 제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을테니까.

그저 손바닥 안에 남은 아릿한 통증만이 방금 충돌이 있었다는 걸 속삭여주고 있을 터.

허나 놈은 그걸 만끽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주인공과 더불어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교수가 대련의 종료를 선언하며 우리 둘을 밑으로 내려보냈으니까.


'흠..'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한 걸까.

바로 조금 전까지 검을 쥐고 있었던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그것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주인공 놈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돌렸다.

방금 그 대련으로 놈이 뭘 느꼈던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다음 차례로 호명된 앨리스가 보여줄 대련에 더 관심이 갔다.


저번에 디아나한테 대판 깨지고 나서 이를 갈고 훈련하는 것 같던데 말이다.


어디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볼까?


그렇게 확인하게된 앨리스의 대련은 뭐랄까..

"저건 좀.."

"심하네.."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들기 충분했다.

정확히는 당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얄밉게 느껴지는 방식이랄까.

그만큼 효율적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체력을 아끼시겠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앨리스의 머릿속이 일전의 대련에 대한 복수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그에 비해 디아나는?

상대가 누구든 성심성의껏 대련에 응했다.

그렇게 체력을 소모한 디아나와 체력을 온존한 앨리스라는 리매치가 성사되는 듯 했으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앨리스는 준결승을 한 걸음 앞두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부상을 입어버렸으니까.

물론,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냥 대련 중에 발을 헛디딘 바람에 발목을 살짝 접질렸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사히 상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대련이 끝나자마자 심판을 맡고 있던 교수가 딱 선을 그어버렸다.

여기까지라고.

자칫 잘못하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부상을 키울 수가 있다는   이유였다.

앨리스는 그런 교수의 결정에 항의했지만..

어쩌겠는가?

대련에 관한 모든 권한은 교수가 쥐고 있는 것을.

앨리스가 쉬이 물러나려 하지 않으니 교수는 자기가 꺼낼 수 있는 것중에서 제일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이상 시험의 진행을 방해한다면 지금까지의 결과또한 무효처리  수 있음을 명심하도록."


그런 말까지 나오니 앨리스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4강따리라도 하는  0점보다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지명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말이다.

'많이 분한가 보네.'


하긴, 디아나한테 갚아줄 생각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을테니까.

헌데 별 것도 아닌 부상으로 좌절되어 버렸으니 허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겠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다가간 건.

"선배."

바로 앞에 서서 그녀를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분명 귀를 쫑긋하며 몸을 움찔거렸을텐데 말이다.

그만큼 분한 걸까.

"앨리스 선배."

"..왜."

목소리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살짝 쥬시했다.


설마 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울었어요?"

"아, 아니야! 울긴 누가 울었다고.."

아닌데.


펑펑 운 건 아니어도 분해서 찔끔 정도는 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런 걸로 해주자.

"발목은요?"


"..괜찮아."


"흠.. 한  확인해봐도 돼요?"

아마도 딱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제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내리깐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앨리스의 몸이 멈칫했던 건 말이다.


"무, 뭐?"


"발목이요. 확인해봐도 되냐고요."


아니, 내가 뭐 허벅지 안쪽 보여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발목인데 저렇게까지 동요할만한 일인가 싶었지만..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니 그럴만 하긴 하더라.

그래도 이제와서 무를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거 내가 보고 만다.'


뭐를?

그야 발목이지.

"그으.."

그런데 쉽게 허락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답지 않게 말꼬리를 쭉 늘어뜨리면서 망설이는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눈치였고.

"내, 냄새가.."


아, 뭐야 그거였어?

그런 거라면야 뭐..

"땀냄새가  거기서 거기죠 뭐."

그러니까 얼른 발이나 댑시다.


이럴 시간 없거든요?

그냥 한 말이 아니었을 증명하듯 곧바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니 앨리스가 접질렸던 발을 재빨리 뒤로 빼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삔 거 방치하면  좋다니까요."


"그, 그래도.."

응, 도망쳐봐야 거기서 거기야.

내가 손을 뻗을 때마다 앨리스가 아까 대련할 때처럼 발을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회피를 시전했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천천히 구석으로 몰아붙이니 벤치 삼아 앉아있던 계단 턱 부분에 발이 턱하고 걸렸으니까.

그렇게 무사히 목표를 포획하는데 성공한 나는 그것을 내 얼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하, 하지말라고..!"

거참 안 어울리게 부끄러워 하기는.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앨리스의 소극적인 저항을 싸그리 무시한채 그녀가 신고 있던 부츠를 조심스레 벗겨냈다.


곧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부츠 사이에서 뽕하고 튀어나왔다.


'발목이 기네..'


심지어 가늘기까지해서 한손으로도  감쌀  있을 정도였다.

앨리스가 걱정하던 나쁜 냄새?


그런  나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맡는 것만으로도 살짝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향기가 났다.


그와 별개로 아까 열심히 뛰어다닌 탓인지 확실히 땀이 많이 차있긴 했다.


살짝 미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으으.."

내 손가락이 땀에 젖은 살결을 타라 미끄러지는 느낌이 그리도 민망했던 걸까.

앨리스의 입에서 끙끙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ASMR처럼 귀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환부로 추정되는 곳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곳을 지그시 누르자..


"읏..!"

작게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그리도 민망했던 것일까.

흘깃 시선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안 그래도 빨갛게 익어있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게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대체 어디가 자극적이냐고 묻는다면 답할 자신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아파요?"

"으, 응읏.."


고통스러워 하는 것하고는 다르게 그리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두면 퉁퉁 부어오를 것 같아서..


"잠시만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대련 중간중간마다 마시려고 챙겨놓은 물주머니를 허리춤에서 끌러내어 그녀의 발목에 대주었다.

막 받았을 때처럼 시원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이거 대고 있어요. 알겠죠?"

"으응.."

아까처럼 다리 굽히고 있으면 불편할테니 어디 받침대가 되어줄만한 거 없으려나..

앨리스의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고개만 돌려 좌우를 살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움찔한 순간, 목소리의 주인인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네 차례다."


아니 벌써?


방금 전까지 두 번째 시합 아니었어?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슬쩍 고개를 돌려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해보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아마 저걸 연료로 삼아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쳐부쉈던 거겠지.


'아이고야..'


 그래도 상대가 디아나라서 기가  죽어있었을텐데 대가리가 제대로 깨졌을 이름모를 선배를 향해 심심한 애도를 보내면서 나는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본능이 속삭였으니까.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결승에서 제대로 빡친 디아나를 맞이하게 될 거라고.

솔직히 그래도  것 같지는 않지만, 화났을 때의 디아나가 어떤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를 화나게 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즉시 연무대 위로 올라가니..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히죽하고 웃으면서 날 반겨주었다.


그래서..

"..어?"

압도적으로 발라줬다.

아니, 주제에 어딜 감히 끼를 부리고 지랄이야 지랄이.

주인공 놈과 맞붙었을 때처럼 살짝 멍한 표정을 한채 굳어버린 교수의 옆을 지나쳐 다시 연무대 밑으로 내려가니 아까 전부터 몸으로 날아와 꽂히던 시선들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관심사 밖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라 디아나와 앨리스였으니까.

'어디보자 어디에 있..'


응?

둘이 왜 붙어있다냐?

설마  잠깐 사이에 모종의 합의를 통해 대통합을 이뤄내기라도  걸까?


궁금한 마음에 그쪽으로 다가봤더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훌륭한 찌르기였다."


날 보고 디아나가 그런 말을 하기 무섭게 앨리스 쪽에서 '아으으..'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거기 말고 여기 봐달라는 것처럼.

자기가 관심이 필요한 환자라는 걸 십분 활용하는 앨리스의 행동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신경쓰이긴 했다.


다친 건 진짜니까.

"괜찮아요?"

"응, 살짝 저릿저릿하긴 한데.."

그러면서 아까 내가 쥐여준 물주머니를 괜히 주물럭대며 연신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내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눈치였다.

왜?


주무르기라도 해달라고?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좀..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린 것일까.

앨리스는 즉시 노선을 수정했다.


"맞다. 목 안 말라? 물 마실래?"

그러면서 발목에 대고 있던 물주머니를 떼서 자연스레 내쪽으로 내미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신경쓰지 않는 척 은근히 이쪽을 힐끔거리다가  모습을 확인한 디아나가 즉시 딴지를 걸고 넘어졌다.

"목이 마르다면 이걸 마시도록."

디아나의 물주머니와 내 것이긴 하지만 앨리스의 손에 들려있는 물주머니.

그것이  눈앞에서 나란히 출렁거렸다.


얼른 자길 선택해달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 알만할 거 다 아시는 분들이 유치하게 왜 이러시는 걸까? 응?

나름 곤란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쪽 편을 들어주게 되면 다른 한쪽이 삐질테니까.

그래서 '으음..'하고 난감하다는 기색을 내비춰봤지만 둘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참에 확실히 하겠다는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날 구원한 건..

"디아나 앨런!"

준결승전 첫 시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교수의 외침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사람은 가야지.


호출당한 디아나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물러남으로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준결승전 상대에게 고스란히 풀어냈다.

기본적으로 수비적으로 일관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데..


그런 디아나가 익숙치 않았는지 상대는 허둥지둥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퍼억-!

"윽.."


그대로 어깨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깨를 얻어맞으면서 들고 있던 대련용 검까지 같이 떨궈버렸으니까.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 되긴..


"디아나 앨런! 그리고 이안 데일! 앞으로 나오도록."


이렇게 됐지 뭐.

 준결승전 상대랍시고 올라온 이의 실력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마 앨리스와 디아나의 중간 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시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싱겁게 끝나버렸다.


창든 사람을 상대하는 게 익숙치 않은지 거리를 내어주지 않고  간격 내에서 찌르기를 반복하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놓쳐버렸으니까.


그렇게 준결승전을 거쳐 마침내 결승전까지 올라온 나는 당초 예상했던대로 디아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 딱 예상했던대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결과도 딱 내가 예상했던대로였다.


무슨 뜻이냐고?

'그야..'

내가 이겼다는 소리지 뭐.

덕분에 대련이 끝나고 나서 주변이 많이 소란스러워지긴 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라 기사부 1위 자리를 사실상 확정지었다는 것이니까.

'자 그럼 이제..'


필기시험만 남은 건가?

딱 대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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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필기시험에서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발 이건 사기지..'


통합 1위라는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다.

세상에는 언제나 천외천이 존재함을 알려주듯 압도적인 사기캐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으니까.


그래, 레이시아라는 사기캐가 말이다.


덕분에 2위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니..'

학생회장에다가 왕녀일까지 하면서 시험까지 잘보는 건 대체 뭔..

말이 되냐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학원에서 공표한 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허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한테 그러셨었죠?"

당초 계획했던대로 지명권을 사용했다.

"학원에 소속된 학생이라면 그게 '누구'든지 지목 가능하다고."


레이시아의 앞에서 보란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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