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47)화 (47/366)



〈 4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유난히도 답답한 하루였다.


왜 그런  있지 않은가?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 안쪽이 뭉친 것처럼 꽈악하고 응어리지는 날이 말이다.

이런 날은 아무 생각없이  쉬는 게 최고인데..

"하아.."

왜 난 여기서 이렇게 일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회장님? 들어가도 될까요?"

열심히 하고 있는 지 단속이라도 하러  것일까.

부회장인 코나의 목소리를 들은 즉시,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꼿꼿하게 세운 뒤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서류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들려온 물음에 답했다.

"응, 들어와."

그렇게 문이 열린 순간 레이시아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절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나의 손에 누가봐도 그녀가 처리해야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류가 한뭉치나 들려있었으니까.

아니, 지금 쌓여있는 것도 다 처리 못했는데 여기서 추가를 한다고?

그쯤되니 그녀는 진심으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날 왕녀로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일하는 기계로 알고 있는 건지가.


"그럼, 얼른 부탁드릴게요~!"

힘내라는  살짝 움켜쥔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윙크를 해대는 모습이 그렇게 얄밉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서류는 배달된 것을.

'진짜아..'


맘같아서는 검토고 뭐고 보이는대로 도장을 쾅쾅 찍고 싶었다.


그러질 못하는  그랬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는 날에는 지금보다  배는 더 시달리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의 뛰어남을 원망했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유능했다면 이렇게 일에 치여 살지도 않았을텐데 말이다.


'이러다가..'

하나 더 추가되는 건 아니겠지.


이 몸을 과로로 죽게 만들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지만은..


설마가 사람 잡더라.

또다시 코나의 손에 들려 배달되어온 서류의 탑이 책상 위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책상 위에는  두 개가 나란히 자리잡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밀어버리고 싶다..'

레이시아는 불현듯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걸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건 그렇게 될 경우 그 뒷수습또한 그녀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고.

'하아..'


진짜 요즘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곱게 빗은 머리가 흐트러지건 말건 책상에 얼굴을 처박은 채 낑낑대던 것도 잠시, 레이시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디아나 보고 싶다..'

이렇게 답답할 때는 역시 디아나를 놀려줘야 제맛인데.


지친 일상 속에서 활력소가 되어주던, 유일하게 친우라 부를 수 있을만한 이의 얼굴을 떠올린 레이시아는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해보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자신은 이렇게 디아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디아나는 그런  같지가 않았으니까.

요즘들어 유난히 방문이 뜸해진 게  증거였다.

그렇기에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건지를.


그러자 떠오른 것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디아나의 옆에 철썩 들러붙은  놈팽이의 얼굴이었다.

이름이 이안이라고 했던가?


괜히 디나아가  빠진 게 아님을 증명하듯 얼굴만큼은 그럴 듯하게 생겼었던 남자를 떠올린 그녀가 부득하고 이를 갈았다.

그래, 결국 그놈이 문제였다.

그 놈만 아니었어도 디아나를 놀리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이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아..'

왕족의 의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은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하는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안쪽에서 응어리진 것이 점점 더 커져가는 느낌에 레이시아는  고운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엎드려있던 것도 잠시, 그녀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맘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해야할 일을 미루게 되면 당장은 편하긴 하겠지.

하지만 나중에는?


배로 힘들 거다.

그러니 하기 싫더라도 해야만했다.

해야만 하는데..

어째 일처리가 하나같이 다 개판이란 말인가?

이곳에서 처리하는 건 학원과 관련된 서류만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왕궁에서 처리해야함이 옳지만 여건상 그럴 수는 없었기에 1왕녀로서 처리해야할 업무도 이곳에서 같이 보고 있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류들이 문제였다.


대체 이 년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서류를 올린 것일까?

수도하고 떨어진 곳에서 떠받들어지며 생활하다보니 왕족이 우습게 보이기라도 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는데.


까면 깔수록 나오는 양파마냥 들여다보면 볼수록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서류의 내용에 안 그래도 답답했던 가슴이 이제는 거의 뭐 꽈아아악하고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신문에 대서특필되겠지.

왕국 역사상 최초로 귀족들의 무능함 때문에 홰까닥 해버린 왕녀라고.


 빡치는 건 검토고 뭐고 다 반려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였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을 때처럼 쌓이고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처리했던 건.

'와..'

대체 자신은 언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어마마마처럼 남자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은 다음에 그 후계자한테 일거리를 떠넘겨야만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그렇지만 그렇게 태어난 후계자가 머저리면?

그럼 일을 떠넘기지도 못할텐데?

'아, 과연..'

그래서 어마마마도 그렇고 하나같이 능력 좋은 놈을 골라내야 한다고 부르짖으셨던 거구나.

그래야 능력이 괜찮은 후계자가 태어날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러긴 싫은데.


남자라.


생각해본 적 없다면 거짓이리라.


왕족인이상 남자와 결혼하여 후사를 보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같은 것이니까.

그렇지만  끌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왜 그래야만 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남자한테 다리를 벌려야 한단 말인가?

자신보다 잘난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한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일이라는 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더 짜증나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어련히 알아서 할텐데 짝은 대체 언제 찾을 거냐면서 은근슬쩍 압박을 보내오는 대신들이었고.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천지인데 그런 헛소리까지 들어줘야 하니..

'사람이 안 미치고 배기겠냐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걸.

지금 이 답답함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진짜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런 걸 해소해본 경험이 몇 번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이 감정을 떨쳐낼 수 있는지를.

다만 알고 있음에도 그걸 행하지 않은 것은..

'다신 안 하기로 다짐했었는데..'

그래, 바로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그 왜 불가항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볼 때는 지금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디아나라도 옆에 있었다면 그녀를 놀리면서 조금이라도 풀었을텐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디아나는 요즘 들어 뭐 그리 바쁜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가끔식 이곳에 얼굴을 비췄었는데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꼴깍하고 작게  삼키는 소리와 함께 레이시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대체 무엇을 상상한 것일까.

살포시 접힌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붉은 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상태로 몇 번이나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것도 잠시.


다시  번 꼴깍하고 침을 삼킨 그녀가 조심스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제가 앉아있는 책상의 서랍 쪽에 꽂혀있었다.

정확히는 세 개의 서랍 중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유일하게 열쇠로 잠겨있는 칸쪽에.

멍하니 그것을 응시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무엇에 홀리기라도  것처럼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드르륵-

두 번째 서랍을 연 뒤  바닥에 붙어있던 열쇠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세 번째 서랍의 열쇠구멍 안으로 밀어넣자..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있던 서랍이 저절로 밀려나왔다.


조심스레 그것을 잡아당기자..

길가다보면 흔히  수 있을 갈색의 머리칼로 이루어진 가발 하나와 그녀의 몸을 다 덮고도 남을 듯한 커다란 로브 하나가 다급하게 쑤셔넣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구겨진 채 덩그러니 쳐박혀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문 채 멍하니 그것을 응시하던 것도 잠시, 레이시아의 손이 천천히 가발을 향해 뻗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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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오려고 했는데..'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를.

만약 누군가 '그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기라도 한다면?

단순한 소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학원부터 시작해서 왕국이 발칵 뒤집어지겠지.

숨 죽인  기회만 노리고 있는 2왕녀  놈들도 이때가 기회다하고 들고 일어날 것이고 말이다.

 점을 고려하면?

이런 짓은 하면  됐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기까지 와버린 것은 이 방법 외에는 지금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오늘도 오가는 사람  명 없이 적막에 휩싸여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저번에 이곳에 '그걸'하러 들렸을 때 '그것'에 너무 심취해버린 나머지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 들킬  하지 않았던가?

그로인해 구관에 귀신이 나온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소문이 학원에 퍼졌을 때는 정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화끈거리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던 것도 잠시 꼼꼼하게 주변을 살핀 레이시아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 그녀는 평소 입고 다니는 학원의 제복이 아닌 아까 서랍 안에 들어있었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일부러 사이즈 큰 것을 골라서 구했었기에 펑퍼짐하기 그지없는 그것의 가슴팍 부분을 움켜쥐어 쭉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르륵-


그것이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게 만들기에는 말이다.


그렇게 로브를 벗어던진 순간.


그리하여  아래 꽁꽁 숨기고 있었던 태초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

레이시아는 뭐라 이루말할  없는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 감각을,  기분을 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 애초에 이러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밤이라 서늘해진 바람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어깨 위에 얹혀있던 보이지 않는 뭔가가 같이 휩쓸려 날아가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흐으.. 하아.."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심장이 미친듯이 뛰며 숨이 벅차올랐다.

압권은 역시 다리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그것이 허벅지 안쪽을 스칠 때마다 오싹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흐으읏.."


오랜만이라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더 자극이 강한 것 같았다.

아직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풀릴 것 같아서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면 대체 어느 정도일까.

달아오른 얼굴을 한채 연신 꼴깍꼴깍하고 침을 삼키던 것도 잠시, 레이시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하얀 살결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복도를 따라 거닐던 그녀는 어느 순간 정체를 감추기 위해 쓰고 있던 가발마저 벗어던졌다.

그 별것 아닌 것이 너무나도 답답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한 그녀의 앞으로 윗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아무 생각없이 그 위로 발을 올리려던 것도 잠시, 앞으로 쏠리던 그녀의 몸이 그대로 멈칫했다.


그러더니..


스윽-

천천히 허리를 굽혀 양손으로 계단을 짚었다.


꼭 개가 계단을 오를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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