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체..'
뭔 말을 했길래 디아나의 기세가 저토록 사나워진 걸까.
금방이라도 앨리스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날카롭게 곧추세우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그럼, 시작하도록."
교수의 나지막한 선언과 함께 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기세만 보면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달려들 것 같았는데 디아나는 생각외로 차분하게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먼저 달려들 생각은 없다는 걸까.
검을 비스듬하게 세우며 방어를 굳히는 디아나의 주변을 앨리스가 빙글빙글 맴돌았다.
'저러니까 꼭..'
늑대와 곰의 싸움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곰의 주변을 맴돌며 약점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늑대와 그런 늑대가 달려들기만을 기다리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곰의 싸움을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 두 번째 히로인 후보께서는 참 특이한 무기를 쓰시는 구만.
이도류라니.
그것도 장검과 단검의 이도류였다.
심지어 단검 쪽은 역수로 쥐고 있는데..
'어떻게 쓸 생각인거지?'
호기심을 느끼고 있자니 통통하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던 앨리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쐐액-!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져있던 것이 섬전같은 궤적을 그리며 디아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앨리스가 땅을 박찬 것도 바로 그때였다.
탓-
가볍게 땅을 차는 소리와 함께 앨리스가 거의 바닥에 붙을 기세로 자세를 바짝 낮춘 채 디아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쐑-!
그녀의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팍에 꽂혀있던 비도들이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팅-
티딩-!
폼만 보면 대충 던진 것 같은데 노리는 부위 하나하나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정확도도 완벽했고.
목, 가슴, 허벅지, 허리.
몸 곳곳을 노리고 날아드는 단검들을 디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볍게 쳐냈다.
그 사이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앨리스가 가볍게 뛰어올라 디아나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캉-!
둘의 검이 맞부딪히며 주황색의 불꽃이 둘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그런 식으로 시작된 둘의 공방은 뭐랄까..
창과 방패의 싸움을 보는 듯 했다.
'그냥 방패는 아니지만.'
방패를 뚫어내려는 창과 뾰족한 가시가 붙어있는 방패의 싸움이랄까.
앨리스가 날래기 그지없는 발놀림으로 히트 앤 어웨이를 반복했지만..
'힘들겠는데 이거.'
디아나는 흔들리는 일 한 번 없이 굳건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디아나의 승리를 확신한 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전부터 히트 앤 런 작전을 반복하느라 신나게 뛰어다니며 체력을 소진하고 있는 앨리스와는 다르게 디아나는 제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체력을 온존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앨리스의 공격이 조금 더 날카로웠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쉬지않고 난전을 유도해서 소모전 양상으로 몰아갈 수 있었겠지.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뚫는 데 성공하면?
그걸 물고 늘어지는 식으로 승부를 제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결국..'
다 성실함의 차이였다.
앨리스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다만 그 재능이 작정하고 방어를 굳힌 디아나를 뚫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갈고 닦이지 않았을 뿐.
앨리스가 조금이라도 더 성실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슬슬 앨리스 본인도 제 패배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일까.
숨 고르기를 위해 뒤로 훌쩍 물러난 그녀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동안 드러난 틈.
그것을 디아나는 놓치지 않았다.
쿵-!
아까 앨리스가 땅을 박찼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대련장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앨리스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리며 회피를 시도했지만, 다 예상했다는 듯 디아나의 무릎이 그녀의 배쪽으로 따라붙었으니까.
"커헉..!"
제대로 들어간 니킥에 몸이 반으로 접혀버린 앨리스를 향해 디아나가 들고 있던 검손잡이 부분을 내리찍었고..
퍼억-!
어깨를 얻어맞은 앨리스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으윽.."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앨리스를 내려다보며 디아나가 눈을 번뜩인 순간.
"거기까지."
한 발 늦게 들려온 교수의 목소리가 천천히 위를 향해 올라가던 디아나의 검을 멈춰세웠다.
팽팽할 거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디아나의 일방적인 승리라는 결과가 나와버린 탓일까.
대련장은 어느새 싸늘한 침묵에 잠겨있었다.
'하긴..'
월말평가에서 자기가 앨리스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앨리스를 압도적으로 발라버린 디아나를 향해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검을 거둔 디아나가 그것을 다시 허리 춤으로 되돌리는 사이,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앨리스가 어깨를 부여잡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된 유효타도 먹이지 못하고 져버린 게 그리도 분했던 걸까.
앨리스는 입술을 터뜨릴 기세로 꽉 깨물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것이..
'쪽팔리긴 한가 보네.'
하긴, 자신만만하게 도발까지 날렸는데 완전히 발려버린 거니까.
심지어 내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기까지 했으니..
쪽팔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뭐..'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일을 기점으로 앨리스가 바뀌리라는 걸.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바로 다음날부터 앨리스가 훈련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심지어 나도 귀찮아하는 아침구보 시간에도 말이다.
웃긴 건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교수들의 반응이었다.
생각해보면 수업에 참석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녀들은 앨리스를 보고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 목격한 사람마냥 하나같이 눈을 부릅 떴다.
더 웃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쫓아내려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연신 앨리스 쪽을 힐끔힐끔대는 것이..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다들 앨리스를 자기 제자로 들이고 싶어서 그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고 하더니만..
아무튼 그렇게 앨리스가 수업에 굉장히 성실하게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게 내 일상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아, 참고로 앨리스는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디아나를 상대로 깝죽대더라.
'진짜 대단하긴해.'
그렇게 얻어맞았으면 좀 기가 죽을 만도 한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낮에는 클레어가 참관하는 가운데 디아나와 대련을 하고 저녁부터 밤까지는 앨리스와 함께 디아나의 밑에서 필기공부를 하는 나날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고, 그러는 사이에도 입학 후 첫 월말평가라는 초유의 이벤트는 날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깨달았다.
깜빡하고 두고 온 물건이 있다는 걸.
아니, 진짜 븅신인가.
어떻게 그걸 두고 오지.
어쩐다..
이제 막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탓일까?
여기서 더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대련은 평소보다 격렬했으니까.
그 상태에서 바로 스터디그룹까지 쭉 달렸으니..
'피곤해 죽겠네...'
그냥 내일 아침에 잠깐 들려서 챙겨올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건..
'아침에는 더 귀찮아.'
왠지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두고 온 건 당장 내일 수업에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음.'
그냥 갔다오자.
그리 먼 것도 아니니까.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문단속을 단단히 한 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구관으로 향했다.
시간이 꽤 늦어서 그런 걸까.
'으음..'
평소에는 생도들로 득실거렸던 곳이 오가는 이라고는 한 명도 없이 그저 조용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오늘따라 어두운 달빛이 그런 느낌을 한층 더 부추겼고.
'음..'
살짝 느낌이 쎄하긴 한데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것봐.'
아무 일도 없잖아.
누구 하나 마주치는 일 없이 무사히 목적지인 구관 앞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평소에 그곳을 드나들때 사용하던 문쪽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음..?'
뭐지?
이게 왜.. 열려있다냐..?
분명 오늘 마지막에 나올 때 닫아뒀던 것 같은데 말이다.
바람에 밀려서 열린 건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지나가다 얼핏 들었던 구관을 둘러싼 소문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령이 나온다고 그랬었나?
그래, 분명 그런 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듣기로는 옛날에 졸업 전까지 그 누구하고도 맺어지지 못했던 한 생도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이곳에서 목을 매달았느니 어쨌느니 했다는 것 같은데..
음..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다.
그냥 바람에 떠밀려서 저절로 열린 거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귀신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이게 뭐 소설도 아니고 말이다.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순간 휘이이이잉-하고 싸늘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건물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어찌되었건 귀찮음을 무릅 쓰고 여기까지 왔으니 챙길 건 챙겨야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살짝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강의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딱히 별 일은 없었다.
그래, 도착할 때까지는 말이다.
강의실 의자 위에 고이 놓여져있던 것을 챙겨 그대로 다시 복도로 나온 순간.
끼이이익-
복도를 이루는 낡은 합판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어둠에 잠긴 복도를 따라 메아리쳤다.
난 아직 강의실의 문턱을 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시발..?'
뭐지?
귀를 간지럽히는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멈춰세운 순간, 날 그렇게 만든 소리가 다시 한 번 귀를 간지럽혔다.
그 순간 나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확인해?
아니면 이대로 못 들은 척, 아무고토 모르는 척 무시할까?
그 두 개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것도 잠시, 일단 뭔지 확인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제멋대로 뻣뻣하게 변해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렸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휘익-
새하얀 뭔가가 복도 저 편에서 아른거렸다.
'저건 또 뭔..'
당황해서 멈칫했던 것도 잠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선이.. 묘하게 여성스럽다고 해야할까.
군데군데가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꼭.. 그래, 꼭 여성의 실루엣을 보는 듯 했다.
'설마..'
진짜 처녀귀신인 건 아니겠지?
그 순간 두려움대신 호기심이 미친듯이 솟아올랐고..
그래서였다.
예의 그 흰 물체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딛은 것은.
아마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여성 특유의 곡선을 그리던 그 흰 물체의 정체를 말이다.
'일단..'
아직 정체를 모르니까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어올린 채 움직였다.
그렇게 조심스레 흰 물체를 추척하다보니..
볼 수 있었다.
휙하고 사라져버린 아까와는 다르게 천천히 복도를 따라 산책하듯 거닐고 있는 그것의 모습을 말이다.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구관을 둘러싼 소문처럼 귀신이라던지 유령이라던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걸.
저것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왜 벗고 있..'
알몸이라는 특이성이 있을 뿐 분명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어두컴컴한데 안 무섭나?
갈색머리의 그녀는 흥흥하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그대로 그녀의 몸을 비추었다.
'어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훌륭한 몸매였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탄력있는 가슴도 그렇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엉덩이도 그렇고 여성의 매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듯한 그런 몸이랄까.
거기에 달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피부가 새하얀 수준을 넘어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왜 그런 소문이 퍼진 것인지를.
'이러니까..'
귀신이니 어쩌니하는 소문이 퍼지지.
가까이서 보면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건물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비치는 모습을 본다면?
빼박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대체 누구일까?
저 여자는?
누구길래 한밤중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구관 내부를 거닐고 있는 걸까.
그 와중에 살짝 신경쓰이는 점은..
'분명..'
흥흥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저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가 까먹을 리가 없..
'..아.'
생각이 딱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봤는지를.
그러한 깨달음 뒤로 따라붙은 것은 헛웃음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냐고.
저 봐.
머리색부터가 다르잖아.
저 갈색머리가 어딜봐서 백금발이냐고.
딱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후우.."
잔뜩 달아오른 한숨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히더니..
앞에서 걷고 있던 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신경질적인 손놀림을 선보이며 머리 위에 뒤집어 쓰고 있던 것을 벗어던졌다.
그와 함께..
사르륵-
달빛만큼이나 찬란한 백금발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려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