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런 식으로 소소하게 즐기기도 하면서 월말평가 준비를 이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나름 적지 않은 변화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디아나와 앨리스의 사이가 전과는 살짝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랬다.
둘은 이전처럼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관계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서로를 보면 시도때도 없이 투닥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나는 만족했다.
적어도 상대방을 원수 바라보듯 바라보지는 않게 되었으니까.
아무래도 짬짬히 먹을 거나 놀거리를 가져다가 같이 즐기게 만든 게 크게 한몫한 것 같았다.
그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하고 밥부터 트라고.
그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변화는 역시 앨리스의 발전이었다.
괜히 제가 히로인 후보 중 한 명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력이 무슨 콩나물 자라듯 쑥쑥 느는데 그 기세가 자뭇 살벌해서 디아나까지 긴장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외에는?
월말평가가 가까워지니 남자랍시고 반쯤 강제로 열외되었던 훈련들에도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
이를테면..
"오늘은 어제와는 반대 순서로 진행해보겠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모의대련같은 게 그랬다.
그 전까지는 분명 따로 훈련하고 있으라고 대련장 밖으로 쫓겨났었는데 어쩐 일인지 들여보내 주더라.
그래도 아직 참관까지만 허용하는 것 같았지만.
'하긴..'
괜히 대련까지 허락했다가 귀한 '남자'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결국 책임자인 교수가 될 테니까.
교수 입장에서는 그만한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굳이 남자들을 참가시킬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지.
솔직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난 이미 클레어한테 실력을 인정받은 케이스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까지 한 패키지로 묶여서 훈련에서 제외됐던 건..
'이 놈 때문이겠지.'
나만 훈련에 참가시킨다면?
주인공 놈이 그걸 가지고 차별이니 뭐니 하며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놈은 요즘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걸까.
나름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어디 몰래 숨어서 따로 훈련이라도 하나?
그러고 보니 몸에 살짝 근육이 자리잡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시작된 생각은 곧 주인공에 대한 걱정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야 날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지명권을 희생할 이들이 둘이나 있지만 얘는 그런 것도 없을텐데..
어떻게 할 생각인거지?
아님 설마 순순히 따먹힐 생각인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니 엄청 옛날일인 것 같긴 하지만 그때 기차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 놈은 여자를 꽤 좋아하는 듯 했으니까.
딱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이쯤에서 신경 끄기로 했다.
주인공 놈을 걱정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으니까.
내가 걱정하지 않더라도 지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주인공이란 그런 존재니까.
'히로인들한테만 접근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얘가 싹다 보고 헤드스핀을 한다 해도 어이구 잘한다하고 박수쳐줄 의향이 있었다.
아니지.
알몸 헤드스핀이면 박수까진 못 치려나?
분명 역할테니 말이다.
'대나무 헬리콥터도 아니고 말이야.'
생각이라는 게 늘 그렇듯 점차 쓸데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걸 굳이 바로잡지 않고 있으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얼굴에 땀방울을 매달고 있는 앨리스가 막 대련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웃긴 건 지각생의 정체를 확인한 이들의 반응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흐르던 대련 전의 긴장감은 온데간데 없이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웅성거림이 연무장 벽을 타고 번져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땡땡이를 얼마나 밥먹듯이 했으면 수업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누가보면 죽은 사람이라도 살아돌아온 줄 알겠네 진짜로.
심지어 대련 수업의 진행을 맡은 교수도 앨리스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뭔가를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잠시, 제가 잠시 체통을 잃었다는 걸 자각했는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한 교수가 부러 엄한 목소리를 냈다.
"앨리스 토르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목소리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너같은 건 이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으니 얼른 썩 꺼지라고 할 기세였다.
앨리스도 같은 느낌을 받았던 걸까.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허리까지 꾸벅 숙여가면서.
이제 막 '갈!!'하고 꾸짖으려는 타이밍에 상대가 그리 나오니?
무안해질 수밖에 없지.
아니나 다를까 당장이라도 한 소리를 쏟아낼 것처럼 사납게 솟아오르던 교수의 기세가 구멍 뚫린 튜브마냥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그 말 지킬 수 있겠나?"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시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받아줄 수밖에.
앨리스더러 적당한 곳에 합류하라고 손을 휘휘 저은 교수가..
"대련 들어가기 전에 힘 좀 빼고 시작할까? 응? 다들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으름장 한 번으로 소란스럽게 변했던 분위기를 단박에 휘어잡았다.
그렇게 대련장의 분위기를 앨리스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과 최대한 비슷한 모습으로 돌려놓은 그녀가..
"그럼, 시작하지. 우선은.."
영광의 첫 타자가 될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그렇게 월말평가를 대비한 모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음..'
근데 이거 정말 모의 대련이 맞나?
왜들 이리 살벌해?
저번에 소리로만 엿들었을 때는 분명 이렇게까지 살벌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월말평가가 가까워져서 슬슬 다들 본 실력을 내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아.'
왜 저러나 하고 추측을 이어나가던 것도 잠시, 그때와 달라진 점 하나를 알아차렸다.
그건 바로 나와 주인공 놈이 관객으로 추가되었다는 것.
그걸 보고 머릿속에 남자 생각밖에 없는 저 여자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답은 쉽게 나왔다.
전 회차에서 아리따운 영애들이 주인공을 보기 위해 부대에 방문했을 때 부하라는 놈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저들은 지금 나와 주인공 놈을 상대로 어필을 하고 있는 거다.
'마! 내가 이 정도야!'
라고.
그렇게 제 실력을 뽐내면 나나 주인공 놈이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쯧쯧..'
그야말로 떡줄 놈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선불로 때리는 여자들의 행태에 속으로 작게 혀를 차고 있으니 살벌하게 검을 주고받던 이들이 대련을 끝내고 뒤로 물러났다.
'뭐..'
나야 좋았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다른 이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 나온 결론은..
'무난무난하네.'
지금까지 나온 것들 중에서 내 상대가 될만한 년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남은 이들이 많았으니까.
뭣보다 아직 디아나도 등판하지 않은 상태였고.
'앨리스도 아직이고..'
저기 뒤에서 '나 좀 칩니다.'하고 폼잡고 있는 놈들도 아직 호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내 진짜 걱정거리는 그들이 아니었다.
'얘가 문제지.'
주인공.
그래 바로 이 놈이 문제다.
주인공이라는 게 이 세상의 온갖 불합리를 뭉쳐놓은 듯한 존재라서 막말로 초반이라고 방심하고 있다가 이 놈한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긴 했지만..
원래 주인공이라는 게 불가능한 걸 가능으로 바꿔놓는 미친 년놈들 아니던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면 안 되겠지.
'흐음..'
얘 실력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데..
혼자 속으로 추측하는 것보다는 역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는 게 최고 아니겠는가?
조금 있다가 교수한테 한 번 제안해봐?
한창 대련이 진행 중인 지금이라면 들은 척도 안하겠지만 대련이 다 끝나고 난 후라면?
한 판 정도는 허락해주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드디어 뒤에서 폼을 잡고 있던 년들이 등판하기 시작했다.
'음.'
확실히 괜히 폼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앞에 나온 이들의 대련이 아직 덜 갈고 닦인 재능을 자랑하기 급급한 느낌이었다면 이쪽은 조금 더 갈고닦인 느낌이었으니까.
그래도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고만고만한 것들의 차례가 이어지던 가운데..
"다음은.."
손에 든 알림판같은 것을 들여다보며 아직 제 차례를 가지지 못한 이들의 면면을 확인하던 교수가 별안간 입매를 비틀었다.
뭔가 나쁜 장난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저렇게 나이값 못하고 악동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불안감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끼고 있자니..
"디아나 앨런."
교수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제 이름이 불린 순간 디아나는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대련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상대가 누구던 쳐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상대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가 무난하게 이길 것 같다고.
그랬는데..
"앨리스 토르쟈. 너도 올라가도록."
뜻밖의 매치업이 성사되었다.
그것도 상당히 재밌을 것 같은 매치업이.
'오우..'
저 교수님 대진표 좀 짜보신 분인가?
디아나와 앨리스의 대련이라니.
이건 못 참지.
지금 내 손 안에 콜라와 팝콘이 없는 게 그저 애석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팝콘이라도 있었다면 분명 그걸 와작와작 씹으면서 둘의 대련을 구경했을텐데 말이다.
둘의 대진이 확정된 순간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대련을 복기하느라 조용하던 대련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 가운데..
척-
앨리스가 디아나의 앞에 섰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매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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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시점****
'하.'
도대체 뭐가 그리 잘났는지 당당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디아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년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걸까.
설마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는지를.
그래, 실력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오죽하면 저런 불량한 태도로도 여태껏 징계를 받지 않은 이유가 입학 초기에 보여주었던 번뜩이는 재능 떄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뭐..
재능만큼은 인정해야겠지.
스승님도 한때 저 년한테 관심을 보였던 걸로 아니까.
그렇지만 그 뿐이다.
재능이 아무리 찬란하면 뭐하겠는가?
갈고 닦질 않는데 말이다.
갈고 닦지 않는 재능은?
찬란하기만 할 뿐이다.
번뜩임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참에 뼈에 새겨줄 생각이었다.
재능만 믿고 날뛰기엔 이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아마 제가 관심있는 이안의 앞에서 대차게 깨지면 저 년도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그리되면 혹시 또 모르지.
저 얼빠진 련이 정신을 차릴 수도.
'그래.'
이건 기사부 부장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애초에 생도들을 챙기고 관리하라고 있는 자리가 부장 자리 아니던가?
그동안은 기회도, 관심도 없어서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 참에 좀 챙겨주지 뭐.
그런 식으로 제가 앨리스에게 하려는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앨리스는 속으로 상상했다.
곧 시작될 대련을 어떤 형태로 끝내야 저 년이 좀 더 쪽팔릴까 하고.
그렇게 상상을 이어나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툭-
'저건 또 뭔 개짓거리인지.'
멀쩡한 상의는 왜 또 벗는 걸까.
저렇게라도 해서 이안에게 어필하려고?
하여간에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년이었다.
가슴팍에 차고 있는 저 시커먼 건 또 뭔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지하게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니..
"아, 이거요? 선물받은 거에요."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정보가 귀를 통해 전해져왔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걸까.
속내를 알 수 없는 앨리스의 행동에 디아나가 미간을 좁히고 있던 순간, 앨리스의 시선이 멀찌감치 앉아있는 이안 쪽을 향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왜 저 시커먼 것이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를.
"글쎄에~ 저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잘 어울릴 거라면서 억지로 손에 쥐어주더라고요."
"..."
"어떻게.. 잘 어울리는 것 같나요? 선.배.님?"
잘 어울릴 것 같냐고?
앨리스의 물음에 디아나는 제멋대로 비틀어지려는 입매를 있는 힘껏 억눌렀다.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네.'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