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요즘 들어 이안이 이상하다.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도 먼저 가시겠어요? 할 일이 있어서.."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다.
평소라면 같이 기숙사 앞까지 짧은 산책을 즐겼을텐데 최근 들어 자꾸만 자신을 먼저 보내려고 한다.
처음에는 딱히 별 생각 없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헌데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삼일을 넘어가니 그 별거 아닌 일이 무지하게 거슬렸다.
그래서..
확인만 해보기로 했다.
확인만.
이안을 의심한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르겠어.'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가는 척 건물 입구 쪽에 몸을 숨겼다.
두근두근-
이런 짓을 하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순간, 가슴이 제멋대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며 손끝에서 저릿저릿한 느낌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분명 별거 아닐텐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 있으니..
"으아.."
이안이 건물 안에서 걸어나왔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렇게 금방 나올 거라면 굳이 날 먼저 보낼 필요 없이 그냥 조금 기다려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기다려줬을텐데.
그 잠깐 사이에 몸을 씻고 나온 것일까.
머리카락 끝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이안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동시에 심장이 쿵쾅쿵쾅하고 불안한 박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안했다.
그것도 엄청.
'어딜..'
가는 걸까.
다시 한 번 엄습해온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자니..
'..어?'
이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되는 년이 저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빨간머리.
그걸 보며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힌 순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앨리스의 시선이 이안 쪽에 가서 닿았다.
그와 함께 몸의 방향을 이안 쪽으로 슬며시 틀며 얼굴 위로 미소를 띄워올리는 앨리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초조함과 의문, 그리고 불안함이 뒤섞인 것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대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런 앨리스의 미소에 화답하듯 상큼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꼭 마치 미리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뭔가가 가슴 사이에서 튀어나와 발치로 툭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 펄떡이며 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조금씩 커졌다.
대체 왜?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무엇에 대해 묻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은 물음이 입 안을 맴돌았다.
당연히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왜..?'
날 먼저 보내기까지 하면서 저 년하고 만난 이유가 뭘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내달렸다.
그걸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까?
그래, 이안이 그럴 리가 없지.
얼마나 순진하고 착한 아이인데..
당연히 꿈일 수밖에 없지.
그렇게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던 정신을 다시금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어딘가를 향해 떠나가는 둘로부터 전해져온 소리였다.
둘 사이에서는 분명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온도를 하고 있었을 그것이 자신에게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너무 차가워서 흡사 찬물이라도 흠뻑 뒤집어 쓴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반사적으로 기둥 뒤에 숨기고 있던 몸을 움직이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따라가려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답은 하지 않았다.
그게 못마땅했던 걸까.
따라가서 어쩌게?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어쩌면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저 둘을 따라간다 치자.
그래서?
따라가서 뭘 할 건데?
이번에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향해 던진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 순간 말문이 제멋대로 턱하고 막혀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못 박힌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내어 앞을 향해 내딛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대체 언제 이렇게 멀어진 것일까.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둘과의 거리는 훌쩍 벌어져있었다.
그 사실이 불안감을 한층 더 부추겼다.
머릿속에서 이성인지 뭔지 하는 놈이 이러면 안 된다고 부르짖는 게 느껴졌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거기에 발목잡혀버리면 영영 저 둘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삐걱거리는 발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렇지만 둘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기척을 죽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두르다가 들켜버리면 말짱 꽝이니까.
쿵쾅쿵쾅-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전력질주를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었다.
그런 식으로 둘의 뒤를 따르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구관.
둘은 분명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구관이라면 재단장을 앞두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고.
그런 곳은 왜 가려는 것일까.
심장이 조금 더 불안한 느낌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하고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은 시시각각 구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체..'
그곳에 가서 뭘 하려고 저리도 서두르는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고 있던 순간 둘이 구관 입구 앞에 섰다.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이라는 걸 알려주듯 그곳에는 '출입금지'라 적힌 팻말이 걸려있었다.
앨리스 년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내며 통제를 위해 쳐놓은 줄을 넘어갔다.
그리고는 이안 쪽을 돌아보며 손짓을 하는데..
쿵-쿵-쿵-쿵-
심장이 불안함이라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안의 뒷모습을 향해 기도했다.
제발 고개를 가로저으라고.
이건 아니라는 듯 뒤로 물러나라고.
그러한 자신의 소망이 부디 전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해봤지만..
먹히지는 않았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이안이 이내 앨리스를 따라 줄을 넘었고..
그렇게 둘은 인적 하나 없어 적막에 잠긴 구관 안으로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복판이 뻥 뚫린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구관 안의 풍경이 꼭 제 마음같았다.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게 꼭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 무엇하나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으니..
뭔가가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뭔가에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둘이 들어간 입구를 향해서.
만약 둘과 마주치게 된다면 뭐라고 말해야할까.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여기서 한 번 더 멈춰버리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들어가게된 구관 내부는..
어두웠다.
창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만이 그곳을 비추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그것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미약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서.
삐이걱-
삐걱-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것들이 밟힐 때마다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식으로 걷고 또 걸은 끝에 마침내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강의실에 미약하게나마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혹시라도 바깥에서 누가 볼 걸 우려한 것일까.
주변을 분간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약한 조명이 안 그래도 초조한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에 시선을 못 박아둔 채 천천히 그것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자 조금씩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귓속으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긴.. 안.."
"아.. 선배.."
거리 때문일까.
목소리가 끊겨서 들렸다.
그리고 군데군데가 끊어진 그 목소리는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순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으로 떠오르는 일련의 풍경에 눈을 질끈 감으며 그대로 멈칫했다.
그렇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어느새 둘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 강의실의 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후우.."
"하.."
안에서 둘이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저런 식으로 숨을 쉬는 걸까.
머릿속에서 이성이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그러면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할 수 있을 거라고.
머릿속을 맴도는 그 속삭임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턱에 제멋대로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입술 쪽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고통을 느끼면서..
드르륵-!
문을 열었다.
그렇게 확인하게된 풍경은..
"..서, 선배?"
충격적이었다.
생각했던 것하고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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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잘 가르쳐줄 수 있다고 그러지 않았었나?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뭘까.
왜 내가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가르치고 있는 걸까.
이틀 전의 앨리스와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앨리스는 사실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아, 어쩐지.'
그랬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니까.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땡땡이를 치는데 상태가 멀쩡할 리 있겠냐고.
암만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해도 수능이 끝나면 그간 배운 것들을 싹다 잊어버리는 게 사람의 뇌다.
그동안 꾸준히 되새김질을 한 것도 아닐텐데 몇 년전에 배운 것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리 없지.
그에 비해 나는?
신학과 역사 쪽은 젬병이더라도 사실상 기사부 필기의 꽃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 부분만큼은 파릇파릇했다.
그래서였다.
나와 앨리스의 입장이 바뀌어버린 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조역전에 이어서 이제는 사제역전이라니.
진짜 이게 실화인가 싶은 현실에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는 사이 유심히 제 앞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던 앨리스가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답을 알아낸 모양.
제가 생각해낸 것이 정답일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인지 앨리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귀엽긴 하네.'
그래, 저런 모습만 보여준다면야 그까짓 선생님 역할 못할 것도 없지.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한데?
아무래도 앨리스도 지명권이라는 걸 노려보기로 결심했나 보다.
지금 상태를 보면 과연 가능하긴 할지 살짝 의문이 들긴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일단 노력하는게 귀엽잖아?
그것만으로도 앨리스의 도전을 응원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앨리스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소리에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볼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채 우두커니 서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말이다.
꼭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외도 현장을 적발하러 온 남자같은 얼굴이라고 해야할까.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엄한 걸 상상하고 우리 뒤를 쫓아왔던 모양인데..
실제로 확인해보니 엄한 짓은 커녕 학생답게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디아나의 얼굴 위로 '에?'하고 얼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선배님? 여긴 어떻게.."
"어, 아. 그.. 으.."
많이 당황스럽긴 한가 보다.
저렇게 고장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디아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씩하고 웃었다.
우리 스터디그룹의 마지막 멤버가 지금 막 등판했으니까.
좌 디아나에 우 앨리스라니.
이만큼 완벽한 밸런스가 또 있을까?
'여기에 레이시아까지 합류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