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앨리스 시점****
"하아.."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훅하고 올라온 답답한 느낌에 입술을 열어 그것을 그대로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으니까.
요 며칠 내내 그 날 목격했던 광경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가슴 속이 꼬옥하고 죄어드는 느낌이라 애써 외면해보려 눈을 질끈 감아봐도 소용 없었다.
눈을 감고 세상을 까맣게 물들여봐도 그래봐야 소용없다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꺼풀 위에서 똑같은 광경이 아른거렸으니까.
하늘에 맹세컨대 태어나서 한 가지 문제를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 고민을 더 깊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걸 해결할 방법이 없어보인다는 점이었다.
맘같아서는 그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년을 당장이라도 고발하고 싶었다.
아니,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려고 그러한 문제를 주로 다루는 위원회 사무실 앞까지 찾아갔던 적도 있었다.
한뼘이나 될까 싶은 그곳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것은 고발을 한다고 한들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클레어였다.
지금이야 잠시 전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로 몇 년 전까지 남부 전선에서 야만족들을 짚단 썰듯 썰고 다녔던 그녀의 위명이 어디간 건 아니었다.
그런 여자를 고발한다?
자신이?
잠깐 상상해본 앨리스는 피식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과연 그걸 믿어주기나 할까?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땡땡이를 밥 먹듯이 하는 불량아의 말인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떤 눈으로 보는 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딜가던 열심히 쑥덕대는데 듣기 싫어도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자신이 그 날 봤던 것을 토대로 클레어를 고발하더라도 아마 사람들은 그걸 믿어주기 보다는 자신이 클레어에게 열등감 같은 것을 갖고 그녀를 음해하려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기에 처음으로 후회하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그 금발 꼰대년처럼 부장 자리를 달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런 걱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으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차마 먼저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기다려 보려고 했다.
만약 이안이 그 년을 고발한다면 그 때 나서서 증언할 생각을 하면서.
그랬었는데..
암만 기다려도 듣고자 했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지명권이니 뭐니하는 쓸데없는 것으로 인한 소란만이 귀에 들어올 뿐.
'하여간에..'
발정난 년들.
그렇게 남잘 따먹고 싶으면 나가서 창남이라도 찾던가.
이쪽은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팔자 좋게 떠들어대는 년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지긋지긋해졌다.
그래서 머리나 식힐겸 평소 조용한 분위기를 원할 때마다 찾는 도서관을 찾았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평소 즐겨 앉는 자리에 앉고 나서야 깨달아버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이안과의 추억이 불현듯 눈앞으로 떠올랐으니까.
그 위로 덧씌워진 건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꼴 보기도 싫은 표정을 얼굴 한 가득 베어문 채 이안의 다리 사이를 제멋대로 훑어대던 년과 그런 년에 의해 벽으로 몰려 수치심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이안.
사실 그 구도 자체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나고 자란 곳이 뒷골목이었기에 그녀는 그것과 비슷한 광경을 몇 번이고 봐왔으니까.
아니, 그녀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그 정도는 사건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이 학원에 소속된 년들은 상상도 못하는 끔찍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뒷골목의 일원으로서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자라왔다.
그렇기에 고작 이 정도로 끔찍함을 느낄 리가 없었다.
없어야 하는데..
왜 벽에 몰려있던 이안의 모습이, 당황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이 눈앞을 떠나질 않는 걸까.
뒷골목에서 본 인간들과는 다르게 아는 사람이라서?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자조였다.
그것은.
사실상 데이트라 부르기도 민망한 데이트 비슷한 것 한 번 했다고, 좀 친밀하게 대해줬다고 뭐라도 된 것마냥 착각하는 꼴이라니.
아까 지명권이니 뭐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대던 년들과 자신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탓에 진짜 미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더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건..
'왜..'
아무 것도 하질 않는 거야.
그런 일을 당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이안의 행동이었다.
그 날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 그녀는 짬이 날 때마다 이안의 모습을 확인하곤 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처럼 개입해서 최악의 경우만큼은 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확인한 이안의 모습은 평소와 딱히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평소같을 수가 없는데 평소같다면?
억지로 그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는 뜻일테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속으로만 끙끙대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망가져가는지를.
그렇기에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참지 말라고.
그러질 못했던 건 그런 욕망을 느낄 때마다 자신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고.
'그 금발 꼰대년은 대체 뭐하는 거야..'
이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디아나를 씹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년이 조금만 더 눈치가 있었다면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하아..'
여러모로 막막한 상황.
거기에 한술 더 얹는 것은 이안이 클레어 년한테 약점을 잡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안이 그런 일을 당하고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도, 그날 그 년을 떨쳐낼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도 다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설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클레어에게 무슨 약점을 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이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것이라면?
이안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오히려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될 수도 있었다.
'대체 뭐길래..'
알아보는 게 좋을까.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할 정도라면 꽤 치명적인 것이라는 소리고, 만약 자신이 그것을 손에 쥐게 되면 클레어 년처럼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그래, 이쯤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탐난다는 걸.
이 감정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모처럼 관심가진 대상을 아무 것도 못하고 다른 년한테 빼앗기기 싫다는 투정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르지.
자신은 늘 빼앗기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한 번 정도는 고집을 부려봐도, 억지를 부려봐도 괜찮을지도 몰라.
그러한 목소리가 가슴 속으로 울려퍼지는 걸 느끼며 고민이라는 이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툭-
누군가 어깨 위에 손을 올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사서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자고 있으면 다른 이들한테 방해가 된다며 찾아와서 쫓아내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안 자고 있는데?
왜 찾아온 거지?
설마 이유도 없이 쫓아내려고?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거기에 귀찮음까지 얹어주는 사서를 향해 한 마디 쏘아붙이기 위해 그녀는 그대로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소세지보다 살짝 얇은 것이 입 안으로 훅 파고들어왔다.
맛은 소세지처럼 살짝 짭쪼름했지만.
'이게 뭔..'
워낙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으로 눈을 크게 뜬 순간.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장본인의 얼굴을.
요 며칠동안 줄곧 그녀를 괴롭혔던 상상 속 인물이 그곳에 서있었다.
자신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채로.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해온 상대가 다름아닌 이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앨리스는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당황에 휩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쭉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었으니까.
'훈련 끝내고 온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와있는 손가락에서 땀 특유의 짠맛이 날 이유가 없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그녀는 빠르게 눈을 굴려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참으로 다행히도 살짝 피곤해보이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안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에 내심 안심이 되는 건 사람심리상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가슴 속을 차지한 안도감 뒤로 따라붙은 건..
츠윽-
당황이었다.
이안의 안색을 살피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게 패착이었다.
그 탓에 현재 상황이 어떤 지를 아주 잠깐동안 망각해버렸으니까.
굵직하고 꺼슬꺼슬한 것이 혀를 스치는 느낌이 찾아든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철렁했다.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민망함으로 얼굴이 홧홧거렸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엉망일 거라는 걸.
그래서 어떻게든 그것부터 수습해보려 했다.
이성은 여전히 입 안에 들어와있는 손가락부터 어떻게 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왠지 본능이 시키는대로 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당황을 수습하고 있으니..
"오, 오랜만이네요. 선배. 오늘도 설마 땡땡이 중이신가요?"
한 발 먼저 당황을 털어낸 이안이 어색해져버린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안도와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걸 애써 억누르며 여길 방문한 목적에 대해 물었다.
그 질문 한쪽 구석에는 기대감이라 할만한 것이 살짝이지만 섞여있었다.
이안의 입에서 책을 빌리러 왔다는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 기대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파사삭 사그라 들었지만.
그나저나 책은 또 왜 빌리러 온 것일까.
척봐도 책상에 앉아있는 걸 좋아할 얼굴은 아닌데 말이다.
그게 궁금해서 물었더니..
"..지명권 때문이죠. 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짙게 배인 쓴웃음은 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지.
그 순간 생각했다.
괜히 물어봤다고.
안 그래도 클레어 고 년때문에 많이 힘들텐데..
방금 자신이 한 질문 때문에 더 힘들어진 건 아닐까.
쓰게 웃고 있는 이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명권을 얻으면 혹시라도 지명당했을 때 거부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노력해봐야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성적만큼은 괜찮은 금발 꼰대년이 다른 년들로부터 널 지켜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그러기 싫었다.
"할만해?"
"음.. 혼자서 하려니까 솔직히 좀 힘들긴 하네요."
조금 지친 듯한 미소.
그래,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도와줄까?"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던 건.
설마 자신이 그런 제안을 할 거라곤 생각치 못했던 걸까.
이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눈치없는 금발 꼰대년이 같은 제안을 했어도 저랬을까?
지금처럼 놀라긴 했어도 의외라는 반응까진 분명 아니었겠지.
괜히 섭섭해져서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던 것도 잠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충동적으로 던진 제안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일단 이안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 금발 꼰대년이 커버해주지 못하는 저녁 시간대에 이안을 교수 주제에 즈그 제자를 성추행이나 하고 다니는 년의 마수로부터 지켜줄 수 있지 않겠는가?
'겸사겸사..'
아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언제 뻗쳐올지 모르는 클레어의 마수로부터 이안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중요했다.
그래서..
"..내가 이래뵈도 수석으로 입학했거든?"
벌써 몇 년전 일이라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 일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걸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쪽팔리는 것까지 무릅 써가면서.
"네..?"
그에 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억눌렀다.
동시에 확신했다.
이건 통한다는 걸.
그렇다면?
'어떻게든 설득한다.'
이안을 바라보는 앨리스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