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렇게 되었고 하니 해야만 했다.
뭐를?
1등을.
그래서 한 번 생각해봤다.
과연 그게 가능하긴 할런지를.
기사부를 통틀어서 1등이라면?
딱히 고민도 안했겠지.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솔직히 껌이니까.
필기 쪽이 살짝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실기 쪽에서 날 이길만한 년은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말하고, 원하는 1등이 기사부에 한정된 것이 아닌 전체, 그러니까 모든 부를 통틀어서 1등이라는 점이다.
그걸 따내야만 성적 우수자들에게 주어지는 지명권 중에서 우선권이 제일 높은 놈을 겟할 수 있을테니까.
'필기..'
그래 결국 그 놈이 문제다.
전략하고 전술같은 건 그래도 나름 군대에서 구른 짬밥이 있다보니 자신이 있지만 이 세계의 역사나 신학같은 건 젬병일 수밖에 없는 처지니까.
내게 주입된 이안의 기억이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럼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소린데..
'어휴..'
이 나이 쳐먹고 공부라니.
성질에 맞지 않게 책상에 앉아 책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걸 이용해먹을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다 디아나 덕분이다.
내가 그런 걸 떠올릴 수 있도록 계속 눈앞에서 알짱거려준 그녀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오늘도 같이 돌아가지 않겠냐고 열렬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를 향해 살짝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쩌죠? 오늘은 먼저 가셔야할 것 같은데.."
나도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만 볼 일이 있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살짝 말끝을 흐리니 서관에서부터 기숙사까지 짧은 데이트를 즐길 생각으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디아나의 표정이 대번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꼭 산책나가자고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다가 한소리 들은 강아지 같아서 문득 실소가 새어나오려 했다.
어떻게든 참아냈지만.
"오래 안 걸리는 거면.."
기다리겠다는 걸까.
아무래도 끝나고 나와 함께 돌아가는 그 짧은 산책길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저렇게까지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낑낑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아, 아님 혹시..'
혹시 내가 혼자 돌아가다가 이상한 년들한테 잡히진 않을까 걱정되는 걸까.
거참.. 살다살다 그런 식의 걱정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다.
"글쎄요. 얼마나 걸릴지 저도 잘 몰라서.."
속으로 쓰게 웃으며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니 디아나의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추욱하고 처졌다.
"그, 그럼 내일도.."
기숙사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걸까.
뭐, 나야 나쁠 건 없었다.
디아나만 있으면 날 꼬시기 위해 찾아온 여자들을 상대로 프리패스가 가능했으니까.
'아침마다 뚫고 나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래도 학생회에서 대책을 발표한만큼 조용해지려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학생회에서는 지명권에 관한 조치를 확정지으면서 겸사겸사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민폐가 될만한 이성간 접촉 시도를 엄중히 금하겠다는 내용도 같이 발표했지만 늘 그렇듯 세상 사람들이 다 법규를 준수하며 사는 건 아니니까.
디아나같이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타입이 있다면 클레어처럼 법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사는 이도 존재하는 법.
"그럼, 들어가세요."
영 아쉬운지 쉬이 연무장을 떠나지 못하는 디아나의 등을 떠밀어 떠나보낸 뒤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날아와서 푸욱하고 꽂힌 것은..
"뭐냐."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클레어의 목소리였다.
내가 자기한테 볼 일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역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니까.
바이브?
오우야..
아니, 이게 아니고.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런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지그시 감긴 눈에 맞춰서 일자를 그리고 있던 클레어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렇겠지.
약점 잡혀서 추행까지 당한 사람이 자길 추행한 사람한테 부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그시 감겨있던 클레어의 눈이 뜨인 것은.
무슨 생각이냐.
꼭 그리 묻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좀 더 실력을 내보려고요."
"그래서?"
"무작정 그러면 이상하게 생각할테니까.."
"내가 그 명분이 되어달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클레어의 입꼬리가 삐죽하고 치솟았다.
꼭 마치 '내가 왜?'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그런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살짝 체념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 거 좀 도와줘요."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하냐고."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것처럼 빙글거리면서 웃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해서 살짝 열이 받은 척을 해봤다.
보란 듯이 꾹 깨물어보인 입술, 그 상태로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못 들었어요? 학생회에서 시행하기로 한 조치에 관한 거?"
아무리 지 수련하고 디아나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기로서니 명색이 교수라는 양반이 설마 그걸 모를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랬다.
이러면 알까 싶어서 지명권이라는 단어까지 꺼내봤지만 돌아온 건 물음표 뿐이었으니까.
'허..'
아니, 이 정도면 단순히 관심없는 수준을 넘어서 직무 유기급 아닌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길래..
갑자기 그 부분이 몹시 궁금해졌지만 그걸 해결하는 건 일단 나중으로 미루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협조에 대한 클레어의 확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월말평가에서 성적을 잘 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도와달라?"
아니, 자꾸만 물음표 쳐 띄우지 말고 고개 좀 끄덕여달라고!!
전생에 지식인에 질문글 올렸다가 답변 못 받고 뒤진 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자꾸 뒤에 의문부호를 쳐 붙이는 걸까.
응?
이쪽은 나름 절박한 데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클레어가 왜 저러는 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맨입으로 도와줄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저번에 살짝 폭주했던 사건 이후로 그래도 양심에 찔리긴 했는지 더는 그런 식의 접근은 하지 않고 있었던 그녀지만 이 참에 그 어색함을 해결하고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길 원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 몸을 건드릴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말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여기서는 눈물을 머금고 내 처지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쑥쑥 늘어나는 내 실력 때문에 디아나가 느끼게될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클레어의 협조는 필수나 다름없었으니까.
암, 그렇고 말고.
절때 그때 그 아슬아슬하면서도 짜릿짜릿하기까지 했던 감각이 그리워서 이러는 게 아니란 소리다.
"..알겠어요. 그쪽이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면 될 거 아니에요."
분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리 말하니 클레어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고..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진작에 그렇게 나왔어야지라는 표정으로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슨 이상한 상상이라도 한 것일까.
아주 보란듯이 히죽하고 웃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진짜 내 손에 휴대폰만 있었어도..
녹음기마렵네 진짜.
'하나 구해봐?'
찾아보면 그런 기능을 가진 도구도 있지 않을까?
아니, 기차도 굴러다니는데 녹음기가 없을 리가 없잖아.
아무튼 클레어의 협조를 받아냈으니 이제 남은 건 내 공부시간을 해피하고 즐겁게 만들어줄 이를 끌어들이는 것 뿐이었다.
'어디보자..'
사실상 존재 자체만으로도 프리패스나 다름없는 디아나가 옆에 없는 만큼 최대한 조심조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여자들 사이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이 빨간머리 도동년은 오늘은 또 어디서 땡땡이를 치고 계시려나..
나름대로 추측해보기 위해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말년병사 시절의 세포들을 강제로 기상시켰다.
그렇게 깨어난 놈들이 말하길 오늘은 햇빛도 뜨뜻한 게 도서관에서 콕 박혀서 한숨 때리면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다길래..
'진짜 있네.'
놀랍게도 그랬다.
역시 짱빅히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까.
하긴 이 놈의 학원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 갈만한 곳이 없으니까.
건물이 많으면 뭘하나?
죄다 강의실 아니면 실험실이거나 연무장인데.
'은근 복지가 구려.'
밥이라도 맛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학생들의 불만이 대기권을 돌파했을 거다.
암, 그렇고 말고.
그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학원의 목적은 한창 때의 남녀들이 번식활동에 힘쓰게 만드는 데 있으니까.
그런데 주변에 이런저런 놀거리들이 많다면?
오롯이 이성을 향해야할 시선이 분산되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즐길만한 여가거리가 딱 '섹스'하나 뿐이라면..
주구장창 섹스만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이건 뭐 사람을 가축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씁쓰름하게 웃으며 저 멀리서 아른거리는 빨간색 뒤통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봤을 때와는 다르게 허리가 꼿꼿하게 펴져있는 것이 아무래도 엎드려서 자기엔 사서의 눈치가 보여서 꾸벅꾸벅 조는 쪽을 택한 거라 생각했는데..
'뭐야, 안 자네?'
심지어 표정도 굉장히 진지했다.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눈치랄까?
설마..
'드디어?'
하도 땡땡이를 치다보니 슬슬 자기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원래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때 그런 잡생각이 많이 드는 편이니까.
아무튼 그런 거라면 나야 환영이었다.
디아나라는 안전하기 그지없는 코인에 중점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나였지만 리스크를 고려해서라도 앨리스 쪽에도 투자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디아나한테도 자극이 될 거고.'
그나저나 오늘은 안 들키고 다가갈 수 있으려나?
저번에는 그녀가 잠들어있는 상황인데도 근처에 접근하기도 전에 걸렸지만 오늘은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앨리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펴지길 쉬지않고 반복하는 것이 딱봐도 지금 하고 있는 생각에 엄청 몰두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해서 발뒤꿈치를 들어올린채 앨리스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니..
들키지 않고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통수를 다이렉트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말이다.
'흠..'
의외로 앨리스한테서는 굉장히 차분한 냄새가 났다.
햇볕 아래에서 바싹 마른 이불 냄새 같으면서도..
'책냄새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하게 길다보니 그만 여기서 나는 냄새가 몸에 배어버리고 만 모양이다.
앨리스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냄새를 맡으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하여 내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안착한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의 검지손가락을 곧추세웠다.
갑자기 꼬꼬마 시절에 흔히 하던 장난이 문득 떠올라서 별 생각없이 저지른 일이었는데..
"누구웁-?!"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우연과 우연이 절묘하게 겹쳤다고 해야할까.
본래라면 귀엽고 장난스러운 느낌으로다가 앨리스의 볼을 쿡하고 찌르고 들어갔어야할 내 손가락은 볼이 아닌 다른 곳을 찌르고 말았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안까지 밀고 들어가버렸다.
뜨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입 안까지 말이다.
나도 앨리스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
그래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으니..
날 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워낙 경황이 없다보니 내 손가락이 제 입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그만 깜빡해버린 걸까.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앨리스의 혀가 무빙을 치기 시작했고..
츨컥-
그것이 그대로 내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말 그대로 삽시간에 벌어진, 사고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은밀하면서도 민망한 맞닿음이었고..
나는 그 즉시 앨리스의 입 안으로 들어가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 뒤로 이어진 건?
어색하고도 무거우며 민망하기까지한 침묵이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오 씨..'
딱봐도 뭔가 굉장히 심각해 보이길래 그거나 살짝 풀어줄 생각으로 장난쳐본 건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누굴 원망하랴?
이게 다 내 업보인 것을.
고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는 것도 당연히 내몫이었다.
"오, 오랜만이네요. 선배. 오늘도 설마 땡땡이 중이신가요?"
내가 아는 앨리스였다면?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게 바로 앨리스 토르쟈니까.
그런데..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너는?"
오늘은 달랐다.
내게 땡땡이나 치는 한심한 여자로 보이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무튼 넌 여기 왜 왔냐는 식으로 묻길래..
"아, 그.. 책좀 빌리려고요."
"책?"
"네, 그런데 선배 모습이 보여서.."
그래서 놀래켜줄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딱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니 앨리스가 살짝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년을 어떻게 끌어들여서 책상 앞에 앉힌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