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9)화 (39/366)



〈 3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훈련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이 찾아왔다.

그래서 따라가봤다.


따라가봤더니..

"어서와. 네가 이안 데일 맞지?"

꼬추 새끼들이 날 반겨주었다.


그래서 디아나하고 놀아주느라 피곤해 죽을  같은 나를 대체 왜 보자고 한 걸까.

일단 그들이 권하는대로 자리에 앉으니 날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와꽂히는 게 느껴졌다.


 와중에 입을 열어 침묵을  건 내가 들어설 때 날 반겨주었던 가운데 놈이었다.

"우선  이름부터 밝혀야겠네. 나는 러스 포우라고 해. 소속은.. 이번에 경영학부가 되었고. 아, 말 편히 해도 되지?"

이미 충분히 편하게 하고 있는데 굳이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이런 새끼들이 꼭 운전대 잡으면 끼어들기 하고 나서 세레머니 하는 것마냥 깜삑이 켜대곤 하던데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칙하기 그지없어서 꿀밤이 매우 마려워졌지만 겉으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척봐도 이 몸보다 연상인데다가 행동거지로 보아 귀족 나으린 것 같았으니까.

"이안 데일입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들진 않았다.

그래서 아무튼 왜 보자고 한 걸까?

이렇게 제 패거리로 보이는 놈들까지 싹 모아다 놓고서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물끄러미  얼굴을 들여다보던 러스라는 놈이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우서?

아니, 그래서  보자고 한건데!!


놈이 웃건 말건 말없이 놈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니 큼하고 헛기침을  놈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들었다.

"앨런 영애와 좋은 관계라던데 맞아?"

아, 이거 설마 그건가?

넌 '디아나와 어울리지 않으니 헤어져!' 뭐 그런 전개?

"음.. 글쎄요. 제가 그 분께 신세를   사실이지만.."


그럼 이 다음에는 과연 물컵이 등장할지 돈봉투가 등장할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그게 아니었다.


"서로 알아가는 관계라 이거구나. 다행이다. 그 정도면 충분해."

아니, 그래서 뭐가 충분한 건데요.


설명을 해주셔야 알  아닙니까.

대충 그런 느낌으로 놈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러스가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도 잠시 다시금 자세를 바로한 놈이 나름 진지해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혹시 이번에 학생회에서 시행할 거라고 발표한 조치에 대해 알고 있어?"

"지명권 말입니까?"


"응, 그거 말이야. 혹시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게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그럼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뜻으로 퉁명스러운 시선을 지어보이니 러스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나갔다.


"다행이네. 우리와 의견이 같은 것 같아서."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와 날 이곳까지 불러들인 이유를.

그들은 학생회가 취하려는 조치에 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먹힐 지는 모르겠지만..."


"저항이라도 해보려면 기회는 지금 뿐이겠죠."

적당히 놈의 말을 이어붙이니 날 바라보던 놈의 눈빛이 살짝이지만 달라졌다.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애새끼를 보는 느낌에서 나름 쓸만한 협력자를 바라보는 느낌?

그 눈빛을  순간 직감했다.

왠지 귀찮아질 것 같다고.

'그래도..'


일단 들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놈이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저항'을 할 것인지를.

"내일부터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수업을 거부할거야."

수업거부라니.

괜찮으려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한테 이 학원은 살짝 군대같이 느껴지는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있으니까.

그런데 징집된 병사가 명령을 거부한다?

나같았으면 싹다 잡아다가 그대로 영창에 처박았을 거다.

그래도 상대가 남성인만큼 학원 측에서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뭐..


자기들이 해도 괜찮을  같다고 판단헀으니까 하려는 거겠지.

아무튼 그래서?


"저도 거기에 동참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런 거였다면 굳이 이곳까지 부를 필요없이 사람을 보내 의사를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살짝 헛걸음한 것 같은 느낌에 속으로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니..

"그래주면 좋겠지만 부탁하고 싶은  따로 있거든."

아니, 그래서 그게 뭐냐고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꿀밤이 마려워지는 화법이었다.


머리통도 동글동글한 것이 타격감이 참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한  씨부려 보라는 뜻으로 경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니 살짝 주저하던 놈이 조심스레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과 앨런 영애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혹시 알고 있어?"

그거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 디아나로부터 그와 관련해서 들은 적도 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놈의 표정이 확 밝아지더라.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이놈들이 나한테 부탁하려는 게 뭔지.

그러니까 이놈들은..

나를 소통의 창구로 쓰고 싶은 거다.

레이시아에게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는 그런 창구로 말이다.

그 빌미는 디아나와 레이시아 간의 친분이고.

'흐음..'


주인공도 아닌 주제에 이쪽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참으로 괘씸했지만 그와 별개로 생각해봤다.


이걸 받아들였을 때 내가 얻게될 득과 실을.

그리고는..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저도 당연히 도와야죠."

흔쾌히 받아들였다.

놈들의 부탁을.

일단 레이시아와 단독으로 페이스 투 페이스를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안 그래도..'

요즘 얼굴 볼 기회가 없어서 그게 불만이었는데 말이다.


"대신 회장님과 자리를 마련하는 건.."


"그건 당연히 우리가 해줘야지."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그러라고 내가 그렇게 흔쾌히 수락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피차 서로의 입장도 확인했으니..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자리는 최대한 빠르게 마련해보도록 할게."

글쎄?

말은 저렇게 하는데 솔직히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토록 좋아하는 디아나의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걸 보면 최근 많이 바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바쁜 스케쥴에 새로운 뭔가를 끼워넣는다?


그게 쉬울 리 없었다.

레이시아가 소화해야 하는  학생회장으로서의 스케쥴만이 아닐테니까.

"진척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날 보자고 했다고?"


의외로 능력이 괜찮은 놈들이었나 보다.

이렇게 금방 레이시아와 마주 앉게 된  보면 말이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잠깐 휴식이라도 취하고 있었던 걸까.


디아나가 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날 가만히 응시했다.


이전에 봤을 때하고는 사뭇 다른 모습.


그러한 차이가 생긴 건 역시 디아나 때문이겠지.

내 옆에 디아나가 없으니 굳이  본성을 숨기지 않겠다는 걸까.


분명 따뜻하게 느껴져야할 색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품은 채 내 몸을 꿰뚫었다.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삐죽하고 비뚜름하게 말아올린 입꼬리.


그렇지만 본판이 워낙 압도적이다보니 그 마저도 아름다웠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니, 그거야 그렇다 쳐도..'


앉으라고  한마디 정도는 할만한데 말이다.


내가 그렇게 싫은 걸까.


아니, 그보다는 그만큼 디아나를 좋아한다는 거겠지.


감히 그 옆을 차지하려 드는 내가 미워서 견딜  없을 정도로.

그래서 일단 그냥 앉아봤다.


일단 서로 마주보고 앉아야 대화든 뭐든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앉아봤는데..

"이상하네. 앉으라는 말을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바로 지적하더라.


"그렇습니까? 전 또 맞은 편 자리가 비어있길래 여기 앉으면 된다는 뜻인줄 알았습니다만."

그래서 뻔뻔하게 받아쳐봤다.

받아쳐봤더니..


"흐음?"


레이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디아나가 옆에 있을 때처럼 순순하지가 않으니 인지부조화라도 오나 보지?


어쩌면 디아나 앞에서 보여줬던 모습은 연기였냐고 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는 않더라.

그런 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넘긴 그녀가  향해 물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더 긁어보고 싶어져서..


"그래서 용건은?"

"뭐겠습니까?"

긁어봤다.


효과는 확실했다.

설마 몰라서 묻는 거냐는 투로 반문하니 고운 선을 그리던 레이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니까.

아, 참고로 레이시아는 눈썹도 금빛이었다.

백금발인 머리카락에 비해 그 색이 조금 더 짙긴 했지만.


'그러면..'

다른 쪽도 저 색이려나?

레이시아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면 왠지 그녀의 미모에 홀려버릴 것만 같아서 일부러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레이시아의 입에서 '하-!'하고 기막혀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 뭐, 그렇다니 말해주지. 학생회에서는 예고했던대로 강행할 생각이야."


"그러시죠. 그럼."

"..뭐?"

"대신 거기에 남자도 껴주시죠."


 순간 레이시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요것 봐라?'하는 느낌?

어째 최근 들어 저런 눈빛을 자주 받는 것 같은데 말이다.

 세계에서 남자의 위치는 대체 얼마나 낮은 걸까.

속으로 툴툴대면서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레이시아의 시선을 꿋꿋이 받아냈다.


내 말에 반응을 보였던 걸 보면 레이시아도 그와 관련해서 고민이 많았다는 뜻일테니까.


학생회에서 발표한 처사는 누가봐도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남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세계의 남자들이 수동적인 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처분까지 순순히 받아들일까?

그럴 리 없었다.

지명권 조치로 인해 혼란이 잦아들더라도 그건 잠깐 뿐일 거다.


 또다른 혼란이 강림할테니까.


그 사실을 레이시아라고 모르지 않을 터.


그럼에도 이런 수를 강행한다는 건..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거지.'


그럼 누구일까?


그거야 뻔했다.


이 나라에서 그녀보다 높은 이라고는  명 뿐이니까.


그 양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리수를 강행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평등하게 가자는 겁니다. 평등하게. 좋잖아요? 평등."

아무튼 레이시아의 근질근질한 곳을 시원하게 긁어줘봤다.


겸사겸사 내 실리와 내게 이런 역할을 맡긴 놈들의 이득도 챙기고.

"그리고 이렇게 하는 거죠. 지명권을 가진 남자는 혹시라도 지명당하더라도 지명권을 사용해 거부할 수 있는 걸로."

이건 내게 이 역할을 떠맡긴 놈들이 말한 마지노선 같은 것이고..

"그렇게까지 남자들의 입장을 배려해야할 가치가 그들에게 있을까?"


"글쎄요. 혹시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흐음?"


"여자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이가 남자들 사이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죠."

'그건 바로 나!'라는 느낌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스스로를 가리키니 그걸 확인한 레이시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그렇겠지.


그게  세계 여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니까.


원래라면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성장한 주인공 놈이 손수 나서서 그 편견을 뒤집어 놨겠지만..


'아직  앞가림하는 것도 벅찬 놈이니까..'

어쩔 수 없지.

여기서는 고인물인 내가 나서는 수밖에.

"장담할 수 있겠어?"

레이시아는  그렇게 묻는 듯 했다.


네가 방금한 말 책임질 수 있냐고.

책임지겠다고 하면 이쪽의 제안을 받아주겠다는 걸까.

그렇다면야..


"그럼 내기나 하실까요?"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것도 없지.

그래서 역으로 내기를 제시해봤더니 레이시아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그녀라면 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해봤다.


"제가 지면 디아나 선배의 옆에서 떨어져나가 드리죠."

아니나 다를까 내가 내건 조건에 레이시아의 눈빛이 대번 사나워졌다.

"좋아."

이로써 내기는 성립된 상황.


나는 자신이 승리할 걸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레이시아를 마주보며 그녀가 짓고 있는 것과 똑같은 느낌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아, 그런데 말입니다."

"...?"


"지명권이라는  일단 학원 소속이기만 하면 누구한테나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레이시아한테는 선전포고로밖에 들리지 않을 말을 지껄여봤다.

그랬더니 정말 사납게 노려보더라.

어찌나 사나운지 등골이 오싹오싹할 정도였다.

아마 그녀는 내가 지명권을 얻어 디아나에게 사용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


그래서일까?


"..그래."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내 물음에 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쓴읏움을 지었다.


'거참..'


사랑이라는 게 확실히 무섭긴 하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

'뭐..'

그래주면 나야 땡큐지.

지명권을 얻게 되면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좋을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쳐올 미래를 상상하며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난 셈이니까.


이제 남은 건?

'지명권.'

그래, 그걸 얻어내면 될 뿐이다.

그것도 레이시아의 앞에서 선언했던대로 압도적인 성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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