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불안한 예감을 지우지 못한 채 디아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저 멀리 운동장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웃통을 훌러덩 깐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은 덤이었다.
거기서 평소와 달라진 점을 찾아보자면..
'뭔 일 있나?'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던 평소와는 다르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소란스러워 보이는 것 정도?
설마 디아나가 자리를 비워서 군기가 뚜껑 열어놓은 콜라마냥 빠져버린 걸까.
아, 말하니까 콜라 먹고 싶네.
어떻게 못 만드려나?
아니, 기차도 있는데 왜 콜라는 없는 거냐고.
그런 식으로 사고의 흐름이 점차 이왕 먹는다면 펩시가 좋을까 코카콜라가 좋을까 쪽으로 흘러가고 있던 가운데..
뿌득-
디아나의 입에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디아나는 운동장이 저 꼴이 난 게 자기가 자리를 비워서라고 판단한 모양.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자기 할 일을 남한테 맡겨두고 날 찾아온 디아나한테도 잘못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일단 닥치고 있기로 했다.
화난 디아나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다들 저 난리가 난 걸까.
의아한 마음을 느끼며 디아나와 함께 그쪽을 향해 접근하니 대열의 맨 앞쪽에 서 있던 이가 나와 디아나를 발견하고는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에 있는 이들을 상대로 경고 신호를 남발했다.
그래봐야 이미 늦었지만.
'쯧쯧..'
오늘도 다들 널브러지시겠구만.
물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디아나와 맨 뒤에서 달릴테니까.
그렇게 치타에게 쫓기는 얼룩말마냥 신나게 아침 구보를 하게될 예정인 예비 얼룩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
순식간에 운동장이 조용해졌다.
그와 함께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일제히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 광경에 데자뷰를 느꼈다.
꼭 기사부로 전과한 첫날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왜 그러는 건데?
궁금한 마음에 그동안 나름 친해졌다 생각한 이들과 눈을 맞추며 해명을 요구해봤지만..
어쩐 일인지 다들 애매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시선을 피하더라.
'아니..'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인데..
평소였으면 '남자님께서 날 바라봐 주셨어!'라는 느낌으로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을 년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니 아까하고는 다른 느낌의 불안감이놈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전 회차에서 용사가 남긴 편지를 전해받았을 때도 이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나 짤렸나?
불안한 나머지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보아하니 이 나라 왕실에서는 교국이 신탁에 대해 발표하기 전에 해당 내용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제와서 전과와 관련된 조치를 뒤집을 리 없으니까.
사실 남성들의 무조건적인 전과를 허용해준 것도 그런 식으로 그들의 능력을 테스트해서 신탁 속 영웅일지도 모르는 이를 판별해내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니 이제와서 뒤집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대체 무엇이 저 발정기 암사자같은 년들을 미어캣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몬가..
몬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말이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건 디아나쪽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디아나의 눈치를 보다가 내쪽을 한 번, 그러다가 다시 디아나 쪽을 한 번, 그렇게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으로 훑던 디아나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흘러나온 순간 더욱 무거운 침묵이 운동장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 진짜 왜 그러는 거냐고.
이 와중에 날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직까지도 내 반대파에 서 있던 년들마저 비슷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짙은 호기심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왜 대답이 없지?"
디아나가 재차 물었지만 다들 서로 눈치만 볼뿐 누구도 선뜻 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디아나가..
"거기 너."
한 명을 콕 찝어 지목했다.
"네, 네?!"
"그래, 너."
믿을 수 없다는 말에 대고 아예 쇄기까지 박아주는데 졸지에 대표로 대답하게된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동요를 해대니 이제 듣지 않고서는 못 넘어가게 생겼다.
그래서 디아나와 합을 맞춰 그녀가 지목한 이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니..
"그, 그게.."
나와 디아나가 선사하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학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학생회에서 시행하겠다고 예고한 '조치'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그녀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역시..'라는 감정이었다.
최근 들어 학원의 모습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학원에서 손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 학원의 목적이 짝짓기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교육기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공부해서 능력을 더욱 갈고 닦으라고 입학을 허락해준 년들이 하라는 자기계발은 안 하고 남자 뒤를 쫓아다니며 한 번만 자달라고 애걸이나 하고 있으니..
지금의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쏟아붓고 있는 왕실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당연히 손을 쓸 수밖에.
'문제는..'
그 조치가 대체 뭐냐는 건데.
그게 내가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이었다.
학원 측에서 시행키로 한 조치가 대체 뭐길래 이들을 이렇게까지 얌전하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궁금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야기를 꺼낼 듯 말 듯 주저주저하던 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접하게된 진실은..
"..네? 뭐라고요?"
나는 물론 디아나까지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물론, 제일 당황한 건 다름아닌 나였다.
그만큼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봤더니 충격으로 굳어버린 디아나 쪽을 한 번 힐끔거린 여자가 전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허허..'
아마 딱 그때였던 것 같다.
내가 더 생각하는 걸 포기한 게.
아니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소란을 수습하려 들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걸 이렇게 수습한다고?'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학원에 시행하겠다고 예고한 조치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달마다 행해지는 월말평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10명을 골라 '지명권'을 지급하겠다는 것.
문제는 그 지명권이라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것의 정체였다.
지명권을 획득한 여자는..
"그걸 사용해 학원의 남자들 중 한 명을 지목할 수 있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이야 뻔하지 뭐.
그걸 설명녀도 모르지 않았는지 그녀는 굳이 그 뒤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날 의식한 모양.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열심히 한 열 명에게 학원에 있는 남자들 중 아무나 한 명을 골라 따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소리잖아 이거.
이게 무슨 개떡같은..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당하는 입장인 '남자'라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고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짝이 있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만한 조치겠지.
월말평가에서 상위 10명 안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우수한 씨를 가진 남자를 선택해 합법적으로 따먹.. 아니 그 씨를 받아낼 수 있는 기회니까.
'어쩐지..'
내가 하는 거라면 일단 노려보기 바쁘던 저 년들이 어쩐 일로 저렇게 적대감이 덜한 시선을 보내오나 했더니만..
그 순간 깨달았다.
일단 기사부에 속한 년들은 지명권을 얻게 될 경우 나부터 지목하고 볼 거라는 걸.
주인공 놈을 염두에 두고 있는 년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마 대부분이 그렇겠지.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디아나의 눈이 돌연 험악해졌다.
아까는 제가 없는 사이 농땡이를 피운 건방진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숫제 제 것을 탐내는 도적 놈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랄까.
허리춤에 검을 안 차고 있어서 망정이지 차고 있었다면 뽑고도 남았을 거다.
그만큼 디아나치곤 험악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그녀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나왔지만..
평소였다면 그런 눈빛이 나오기도 전에 알아서 기었을 이들이 지금은 똑바로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노려본다고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그런 그들의 대치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엿된 것 같다고.
'아니..'
떡각을 잡을 생각이었다면 솔직히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꾹꾹 눌러 참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계획한대로 여럿을 동시에 취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이거 잘못하면..'
고이 간직해온(?) 동정을 애꿏은 년한테 따이게 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는데..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구만.'
내가 여기서 '남자한테도 인권이 있다구요 빼애애애애액!!!'을 외쳐도 깔끔하게 묵살하고도 남을 나라다 이 나라는.
기습적으로 발표되었던 전과 조치와는 다르게 아직 시행될 '예정'이라는 게 그나마 좀 희망적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저항이라도 해보려면 남자들의 의견부터 한데 모을 필요가 있는데 과연 그게 가능하긴 할까 싶었으니까.
그럴 인맥도 없었고.
'하.'
결국 점찍어둔 히로인 후보들이 힘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성적으로는 기사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인 디아나가 내 편이라는 거다.
아직 경험이 적다보니 위에 있는 선배들에 비하면 검술실력만큼은 살짝 처지는 그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선배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소리고 거기에 전략, 전술론같은 필기 과목 성적까지 합치면 기사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아니까.
그녀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끼고 부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들었고.
'그래도 살짝 불안하긴 한데..'
앨리스한테도 보험을 들어놔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앨리스는 보험이 될 수가 없었으니까.
땡땡이를 밥 먹듯이 하는데 성적이 좋을 리 있겠는가?
'그래도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어떻게 잡아다가 앉혀놓고 공부라도 시켜봐?
실기야 뭐, 한가닥하는 것 같으니 굳이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테고..
그렇게 앨리스를 갱생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이안."
나와의 대련을 끝마치고 내가 알려준대로 마무리 운동에 열중하고 있던 디아나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그에 왜 불렀냐는 뜻으로 곧장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
얼굴을 살짝 빨갛게 물들인 그녀가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아니나 다를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가.."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발언이 디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결의어린 표정은 덤이었다.
아니, 그나저나 내가.. 뭐요?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들렸는데요.
"네? 선배님?"
잘못들었슴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반문하니 얼굴을 발그레한 물들인 채 입술을 열심히 오물거리던 디아나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렇게라도 빨갛게 변한 제 얼굴을 숨기려는 것처럼.
귀까지 빨갛게 변해있어서 아무 소용없긴 했지만.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분명 별 일 없을테니까."
암요, 그러시겠죠.
내게 뒤통수를 보인 채 그리 말하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던 것도 잠시, 속으로 생각했다.
뭐라도 해봐야할 것 같다고.
'그래..'
언제는 뭐 쉬운 일만 있었나?
쉬울 것 같은 일도, 어려워보이는 일도, 얼핏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있었다.
그중에서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도 있었고.
그렇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뭐든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암만봐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실제로 해보니 생각치도 못했던 방식으로 해결된 적도 있었고, 쉬울 것 같은 일이 실제로 해보니 뒤지게 어려워서 진짜로 뒤진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 고로 발버둥쳐봐도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은 이번 일도 실제로 해보면 다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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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누구시라고요?"
희망은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