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럼 얼른 갈아입고 나오도록. 바로 몸 풀고 시작해야하니까."
어쩌면 운동복에도 무언가 수작질을 부려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나간 거였나 보다.
클레어가 신청하고 디아나가 가져온 운동복은 평범했다.
그 와중에 소름돋는 건 대체 어떻게 측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에 아주 잘 맞을 것 같다는 점이었고.
'역씌..'
프로 인간도살자쯤 되면 상대방의 쓰리사이즈 같은 건 곁눈질로도 알아낼 수 있게 되는 걸까.
감탄을 해야할지 소름 돋는 걸 느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상황에서 일단 탈의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여기 탈의실이 하나 뿐이잖아?
그렇다는 건..
'둘다 여길 쓴다는..'
그래서일까?
묘하게 디아나의 체향이 나는 듯 했다.
왜 그 복숭아인지 딸기향인지 헷갈리는 냄새 말이다.
거기에 클레어의 체향으로 추정되는 냄새가 그 사이에 절묘하게 섞여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 두 냄새는 탈의실 중앙에 자리잡은 캐비닛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이건 열어볼 수밖에 없지.'
솔직히 이걸 어떻게 참겠냐고.
다행히 문은 이미 들어오면서 잠궈놓은 상황.
고로 지금 이 상황에서 날 막을 수 있는 건 캐비닛의 잠금잠치 뿐이었다.
그런데..
'안 잠겨있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열어봐야지.
그래서 기대감을 품고 일단 왼쪽에 있는 것부터 열어봤는데..
안타깝게도 별거 없었다.
왼쪽은 디아나가 사용하는 것일까.
예의 그 과일향을 짙게 풍기는 그 캐비닛 안에는 저번에 봤던 검은색 쫄티와 반바지형 타이즈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테이핑용으로 보이는 압박 테이프정도?
'이거 참..'
디아나답다고 해야할까.
단촐하기 그지없는 구성이었다.
하긴, 뭔가를 바리바리 챙겨다니는 스타일은 아니긴 하지.
그렇다면 클레어는 어떨까.
궁금한 마음에 곧바로 옆의 캐비닛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오우 쉣..'
끈으로된 검은색 티팬티와 그것의 세트로 보이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브래지어였다.
마구잡이로 벗어던진 옷가지 위에 내팽개치듯 올려져있는 그것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사고가 정지했다.
디아나와는 다르게 시작부터 수위가 상당히 쎘으니까.
'아니 잠깐만..'
속옷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근데 이게 왜 여기있지?
어?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처음 클레어를 소개받았을 때 디아나와 그녀가 벌였던 실랑이였다.
옷을 입니 마니 하는 걸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두고 참 자유로운 영혼이구나하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럼 아까 나하고 딱 붙어있었을 때도..'
그런(?) 상태였단 소리 아닌가?
맙소사.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아찔함이 머리를 덮쳐서 순간적으로 정신마저 혼미해질 정도였다.
동시에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클레어는 안 입고 다니는 걸 선호한다라고.
'그나저나..'
안 입고 다니는 걸 선호하셔서 그런지 몰라도 속옷 취향이 참.. 바람직하시네.
균열이나 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얇은 티팬티라니.
심지어 검정이다.
이건 뭐..
덕분에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클레어가 남자에 많이 굶주린 상태라는 걸.
그나저나 빨리 나가야겠다.
캐비닛 구경한다고 시간을 꽤 잡아먹었으니까.
내가 아는 성격 급한 클레어라면 옷 만들어서 갈아입냐면서 진작에 뛰쳐들어오고도 남았을텐데 그러지 않은 건 아마 디아나 때문일 것이고.
운동복의 촉감은 상당히 괜찮았다.
바지 밑단이 살짝 짧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서 탈의실을 빠져나가니 나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디아나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그 다음으로 따라붙은 건 클레어의 것이었고.
그렇지만 그녀의 시선은 잠깐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아까 있었던 일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걸까.
나야 뭐 나쁠 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둘쪽으로 가서 합류하니..
"그럼 적당히 몸좀 풀고 시작해봐."
자긴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벽쪽으로 향한 클레어가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게.. 자긴 구경이나 할테니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럼, 일단 몸부터 풀까요?"
디아나를 향해 다가가서 그렇게 제안해봤다.
그런 내 물음에 디아나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몸풀기가 시작되었다.
다만 우리 둘의 방식은 많이 달랐다.
디아나의 몸풀기가 정적이라면 나는 몸을 쭉쭉 늘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식으로 몸을 풀었으니까.
사실 이미 구보 뛰면서 얼추 다 풀린 상태였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종의 어필이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스트레칭을 하는 내내 디아나는 날 힐긋거리기 바빴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내 동작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한 척을 했다.
"관심있으시면 가르쳐드릴까요?"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흘깃흘깃 날 훔쳐보던 디아나를 당황 속으로 퐁당 빠뜨리기에는 말이다.
"뭐, 뭣?"
설마 훔쳐보는 걸 그 대상인 나한테 들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걸까.
헛숨을 들이키며 말을 더듬는 디아나를 보며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번에 그녀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손수 자세를 잡아주려고 했는데..
"거 쓸데없는 짓은 그쯤하고, 이쯤에서 한 번 붙어봐."
그 말과 함께 내 앞으로 날아든 건 저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목봉이었다.
그래봐야 목봉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끝 부분을 솜주머니같은 것이 동그랗게 감싸놓은 것이 이거라면 혹시라도 디아나의 몸에 멍이 생길까봐 자제했던 찌르기의 봉인을 해제해도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멀리서 던졌는데 정확히 내 앞에 세우는 기예는 대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잡스럽다고 해야할지 모를 기예에 속으로 애매하게 미소를 짓고 있자니 디아나의 얼굴 위로 '또요?'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봐라?'
아무리 내가 두 번이나 봐줬기로서니 붙어보기도 전에 다 이긴 듯한 이 건방짐은 뭘까.
아무래도 이건 교정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저걸 내버려두면 안 좋은 기벽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
자만이라는 기벽이 말이다.
동시에 알 것 같았다.
클레어가 내게 원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내가 디아나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단순히 그것만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왜 그런 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썩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잔말말고 하라면 해."
이렇게 권위로 찍어누르는 걸 보면 진짜 좋은 스승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닌가?
깨달음을 잊지 않도록 몸속 깊숙하게 때려박아주려는 걸 보면 참 스승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위에서 까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까야지.
자꾸만 날 이겨먹는 것도 내게 원망을 살 것 같아 꺼려졌던 걸까.
디아나는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면서도 나름 순순히 나와 마주보고 섰다.
그렇게 얼굴을 맞대게 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
"응?"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거에요."
그런 내 발언에 디아나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경고가 제 딴에는 새끼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나 보다.
귀여운 반 가소로움 반의 시선을 한채 날 바라보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보란듯이 목봉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겨보였다.
"오늘의 저는 어제하고는 또 다르거든요. 이게 있으니까."
디아나 입장에서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제라고 달라진 거라고 해봐야 끝에 찔리는 사람이 다치치 않도록 처리를 해둔 게 전부니까.
고작 그 정도 차이로 뭐가 그리 달라지겠나 싶겠지.
확실히 크게 달라지는 건 없긴 하다.
어디까지나 보통의 실력이라면 말이다.
"제가 사실 찌르기가 특기거든요."
방심하고 있다가 얻어맞고 후회하지 말라는 뜻으로 경고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
왜 얼굴을 붉히며 침묵하는 걸까.
심지어 클레어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무려 그 클레어가 말이다.
아니, 뭔데.
왜 나만 이해 못하는 건데.
어? 나만 왕따야? 나만 왕따냐고.
찌르기가 특기라는 게 대체 왜..
'아.'
그녀들보다 두 발 정도는 늦게 깨달았다.
내 말에 그녀들이 멋쩍어하는 반응을 보인 이유를.
남자에게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달고 있는 봉이 하나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걸 떠올려버린 모양.
그렇게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나와 디아나는 물론 클레어의 주변으로도 흐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시, 시작할까?"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디아나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황급하게 나선 탓인지 목소리가 살짝 삑사리가 나긴 했지만.
"풋.."
디아나의 본의아닌 희생 덕분에 어색하게 굳어졌던 분위기가 그나마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제 제자가 보인 추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클레어가 헛기침과 함께 대련의 시작을 선언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온다.'
그 순간 디아나의 기세가 일변했다.
민망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자세를 낮추며 검을 아래쪽을 향해 늘어뜨린 그녀가..
천천히 날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확실하게 다른 그녀의 자세에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어지간히도 얕보였다 싶었으니까.
말하지 않았던가?
디아나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지키는 검술이라고.
방어를 단단히 굳히고 역습을 통해 기회를 노리는 검술을 구사하는 이가 먼저 공세를 취해온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나 정도는 굳이 그렇게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 확신의 근거는 아마 전에 행해진 두 번의 대련일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부터 깨부숴줘야겠지.
그게 클레어가 내게 원했던 모습일테니까.
천천히 팔을 뒤로 잡아빼면서 옆으로 슬며시 비틀었다.
끄드드득하고 아직 창술이 익숙치 않은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응축시킨 것을..
후욱-!
사정권 내로 진입한 디아나를 향해 그대로 쏟아냈다.
비틀려있던 팔이 원래대로 돌아가며 앞으로 쭈욱하고 뻗어나갔다.
그 힘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그대로 디아나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걸까.
디아나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위를 향해 휘둘러진 목검이 그녀를 향해 내지른 창의 궤적 사이로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이대로라면?
닿기도 전에 쳐내질 거다.
그 여세를 몰아 디아나의 목검은 내 목을 겨눌 것이고 말이다.
'그래, 이대로라면 말이지.'
솜으로 감싸여있던 끝부분이 목검과 충돌하기 직전 기묘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일직선으로 정직하게 뻗어나가던 창의 궤적이 기묘하게 휘어졌다.
제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품고 있던 디아나의 눈이 흔들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보통이라면?
그 시점에서 끝났을 거다.
당황은 몸을 굳게 만드니까.
심지어 디아나는 내 찌르기를 받아치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중심이 앞으로 쏠려있었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뒤로 물러나 피한다거나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는 선택지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디아나는..
'이야.. 이걸 반응한다고?'
제가 왜 클레어쯤 되는 검사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냈다.
시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디아나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땅으로 꺼지듯 아래쪽으로 훅하고.
핏-!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찌르기가 허공에서 그 힘을 폭발시켰다.
그렇게 극단적인 반사신경으로 내 찌르기를 회피하는 건 물론 이대로 끝을 보겠다는 듯 간격을 좁혀오는 디아나를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수준맞춰서 적당히 놀아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재밌네.'
보모 노릇하는 건 질릴대로 질린지 오래지만..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상대가 이전처럼 시커먼 고추 새끼였다면 내 쪽에서 사양했겠지만 디아나니까.
어디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키워놓으면 내 노후 계획에도 분명 도움이 될 터.
'좋아.'
디아나 코인 풀매수 간드아ㅏㅏㅏㅏ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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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던 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네, 그 빌어먹을 신탁인지 뭔지에 대한 소문이 학원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놓기 전까진 말이죠.
'시발..'
어떻게 평안할 틈이 없냐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