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5)화 (35/366)



〈 3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앨리스 시점****


저것들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렇게 아침부터 바쁘게 뛰어다니는 걸까.

역시 아침 일찍부터 짱박히길 잘한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누군가의 손에 잡혀서  대열에 끼게 되었을테니까.


'쯧쯔..'

그렇게 헉헉거릴 정도로 힘들면 그냥 포기해버리면 될텐데

아, 하긴 그건  여자로서 자존심이 허락치 않으려나?


둘뿐이라고는 하지만 남자들도 여전히 멀쩡히 뛰고 있는 판국인데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년들이 멈추지 않는 이유야 뻔했다.

분명 맨 뒤에서 달리는 금발 꼰대년 때문이겠지.

떠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평소보다 더 눈부시게 느껴지는 햇빛을 한몸에 받으며 달려가는 디아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뭐랄까 입매가 제멋대로 비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썩 마음에 안 드는 광경이었으니까.


저렇게 서로 사귀기라도 하는 것마냥 나란히 달리는 꼴이라니.

옆에 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붙어있긴 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체구도 작아서 크게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그 옆쪽에 있는 둘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었으니까.

그래서 더 배알이 꼴리는 것이기도 했다.


둘다 금발머리를 한채 나란히 달리고 있는 모습이 꼭 너는 여기 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나도..'

그리 나쁜 건 아닌데.

웨이브가 들어가있는 빨간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맨 뒤에서 달리는 셋의 모습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대로 앉아있던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쏟아지는 햇빛이 기분 좋긴 했지만, 저런 모습을 벌써 일곱 번이나 봤더니 더는 속이 쓰려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있으면 이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칠 시간이기도 했고.

'다음은..'

어디 숨어서 노닥거릴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후보들이 떠올랐지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장 자주 들리는 도서관의 구석자리였다.


그곳만큼 잠을 청하기 좋은 장소가 또 없으니까.


게다가 마침  피크시간대기도 했다.

10시 쯔음에서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까지.

창문을 통해 쏟아져내리는 햇빛이 딱 기분 좋을 시간대니까.

베개는 따로 챙기지 않았지만, 그거야 뭐 책이라도 쌓아서 대신하면 그만이고.

그렇게 도서관으로 결정을 내리고선 곧장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도서관이 아닌 기사부가 위치해있는 서관쪽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스스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어쩌면 지루했던 걸지도 모르지.

잠이라면 아까까지 충분히 잤으니까.


시간을 때울만한 뭔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딛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마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보통 느긋하게 걷는 걸 선호하는 편이니까.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늘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왜 자신은 지금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대체 뭐가 급하다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조금씩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목적지라니.


거기가 왜 목적지란 말인가?

내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리 생각한 순간 배시시 웃는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지만 앨리스는 고개를 휘휘 젓는 것으로 그것을 털어냈다.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녀석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형성된 관계일 뿐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그 녀석에게 전과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같은 것들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녀석은 자신한테 '흥밋거리' 혹은 '재미'를 제공해주는 그런 관계랄까.


그런 고로 학원에서 남학생들을 상대로 원하는 부로 아무 조건없는 전과를 허용해준 이상 그 관계는 더이상 성립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전과를 해버렸는데 그에 대한 정보를 얻어봐야 뭐하겠는가?


그저 '그런 게 있는 갑다..'하고 넘어가는  전부겠지.


그렇기에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제공할  있는 것의 가치는 바닥을 친 반면에 녀석이 대가랍시고 내놓는 것의 가치는 여전했으니까.


그렇다고 받아야할 잔금같은 거나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학원 밖으로 외출했을  지나가듯 던져주었던 정보는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준 것치고는 나름 그 가치가 상당한 것이긴 했지만, 자신도 그에 버금가는 재미를 느꼈으니까.


그걸 가지고 이제와서 뭐라뭐라 하는 것도 웃기지.


그렇다면 왜?


왜 자신은 지금 그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는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볼일이라도 있어서?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애초에 그곳은 자신에게는 피해야할 인간들 투성이인 곳이다.

귀족이라는 자부심에 찌들어서 쓸데없는 열등감을 불태우는 년들이나 대가리 속에 들은 게 칼질밖에 없는 건지 볼 때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깔로 대련을 청해오는 년들, 그리고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금발머리의 꼰대년까지.


그런 년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볼 일이 있어봐야 뭐가 있겠는가?

가봐야 귀찮아지기만 할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뭐라 부르는 지, 어떤 단어를 사용해 부르는 지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이토록 노골적인데 눈치채지 못하는 건 태어났을 때부터 차렷자세를 하고 있었을 것 같은 그 금발머리의 꼰대년 정도겠지.


'하.'


뭐라고 부르는 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랬다.

앨리스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자신 따위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무언가였으니까.


유일하게 친구라 생각했던 년의 목숨까지 즈려밟고 구차하게 살아남는 걸 택한 자신이다.

그딴 잘 말린 솜이불같이 포근포근하고 뭉실뭉실한 것은 디아나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올바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빡대가리같은 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온 몸에 길바닥의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자신같은 년이 아니라 말이다.


분명 그럴텐데..


틀림없이 그러할진데..

'어째서..'

이 놈의 두 다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꼭 마치 별개의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는 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것도 잠시, 앨리스의 입술이 열리며 그 사이로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녀석의 얼굴을 보면 이 희끄무레한 뭔가가 보다 확실해질지도 모르지.


덕분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되면 다 그 녀석의 탓일 거라고 앨리스는 속으로 툴툴 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미소를 보여줘가지고는 사람 마음을 이렇게 싱숭생숭하게 만든단 말인가?


아마 그 놈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그때 자신이 지어보였던 미소가 그걸 보는 년한테는 얼마나..

'아무튼.'

아까하고는 살짝 다른 느낌으로 피식하고 웃은 그녀는 그대로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발걸음하게 만든 장본인의 모습을 말이다.

옆에 있는 놈이 급하게 물을 들이키다가 사레라도 들린 것일까.

이안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 진이라는 비리비리한 놈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앨리스는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저렇게 비실비실한 놈이라도 나중에 가면 결국 다 자기 경쟁자가 되는 건데 말이다.


'하여간에..'


쓸데없이 착해 빠져가지고는..

기본적으로 영악한 척 하는 이안이지만 학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뒷골목을 전전하며 별의 별 인간을 다 봐온 그녀기에  수 있었다.

대놓고 착한 척을 해대는 년놈들보다 오히려 이안같은 타입이 더 선하다는 걸.

아무튼 아까처럼 멀찌감치가 아니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니..


'..그랬구나.'

비로소  수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어떤 식으로든 빚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이안의 태도였다.

그래, 그게 가장 거슬렸던  같다.


그걸 데이트라 부를 수 있을지는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이안과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을 때 밥을 샀던 건 자신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생각 없었다.

데이트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건 보통 여자의 몫이니까.

그런데 이안이 안내해달라길래 데려갔던 대장간에서 오늘 하루 고마웠다면서 자신이 냈던 밥값의 몇 배에 달하는 선물을 내밀었을 때..


가슴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랬는지 스스로조차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에는 그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지금보니 이해가 갔다.


그런 식으로  날 있었던 것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려 하는 이안의 태도가 자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게 꼭 언제든지 이 관계를 정리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


그랬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입꼬리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뚜름하게 말려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 와중에 더욱 배알이 꼴리는 건 금발 꼰대년을 대하는 이안의 태도였다.

자신을 대할 때하고는 확연히 다른 태도.

원래는 약간의 짜증 외에는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했던 그것이 오늘따라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저저 얼굴 붉히면서 어버버하는 꼬라지  보라지.

둘 사이로 흐르는 풋풋한 분위기가 그렇게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좀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스리슬쩍 둘 사이로 끼어들어 그걸 흐트러뜨려 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귀찮은 년중에서도 제일 윗등급에 위치한 년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더이상 이전처럼 귀찮게 하지 않는 걸 보면 저 년도 드디어 포기란 걸 배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피하는 게 맞았다.

또 쫓겨다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제 연무장에서 안 나오는 걸로 아는데 운동장엔 어쩐 일로..


'아.'

그러고 보니 제자로 들어갔다고 그랬지.


어제 행정실에 심어두었던 이가 엄청난 소식이라며 들고 왔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바로  순간.


그대로 훈련하러 갈 생각인 건지 셋이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오늘은 튼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대로 돌아가서 다시 적당한 곳에 짱박히려고 했더니..


'응?'

분명 같이 들어갔던 금발 꼰대년이 혼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흘깃흘깃 그 클레어라는 년의 눈치를 보는 이안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뭐라고 하지?'


그렇게 머릿속으로 왜 왔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할지까지 생각해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쿵-!


그야말로 굉음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소리가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그것에 그대로 얻어맞은 정신이 얼얼한  느끼며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랬더니 볼 수 있었다.


문을 너무 세게 닫은 여파인지 문틈이 살짝 벌어져있는 모습을.

"..서 ..명을 들어..까?"

그렇게 벌어진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다보니 마침내 확인할  있었다.


아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그 풍경 속에서 이안은..


"이건 뭘까아~? 응?"

벽에 몰린  추행을 당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은 클레어를 상대로.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갈  했다.


살짝 열려있는 문을 걷어차며 지금 뭐하는 거냐고 그렇게 외치려고 했다.


그러지 못했던 건..


'혹시..'하는 가정이 발목을 붙잡고 뛰쳐나가려던 몸을 멈춰세웠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게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거래로 인한 것이라면?


여기서 자신이 나서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클레어 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응? 더 해줬으면 좋겠지? 이 발정난 새끼.."

개같은 년이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소리를 듣고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래라니?

아무리 그래도 저딴 모욕을 자처하는 남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구해줘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대로 뛰어들어가  현장을 급습한들 과연 일이 이쪽이 원하는대로 될까?


쉬이 장담할 수 없었다.


원래 인간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곤 하니까.

만약 자신이  현장을 덮친다면?


이제 끝이라고 판단한 저 썅년이 이성을 잃고 자신을 제압한 다음에 이안을 강제로 덮칠지도 몰랐다.

엿같은 일이긴 하지만 저 년한테는 그걸 가능케해줄 힘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고민하고 있던 순간 평소보다 예리하게 날이 서있던 감각이 멀리서부터 누군가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려왔다.

이 타이밍에 여길 찾아올만한 년이라고 해봐야 금발 꼰대년 하나 뿐이니 분명 그년이겠지.

그렇다는 건?

이제 시간도 별로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더욱 초조함을 느끼고 있던 가운데..

두 명 외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고 옆에 뭔가를 잔뜩 쌓아놓아 창고처럼 만들어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대충 쌓은 건지 톡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

그것을 바라보다가..


발을 뻗어 밑을 받치고 있던 것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리고는..

쿵-!

그대로  앞에서 몸을 뺐다.

묵직한 뭔가가 떨어지며 난 소리를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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