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 맞다."
앞에서 잘 걸어가던 클레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건 어제 들렸던 예의 그 실내연무장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이제 한 스무 걸음 정도만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꼭 마치 까먹고 있었다가 막 떠오른 것처럼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은 그녀가 그대로 우리 둘을 향해 돌아섰다.
정확히는 디아나를 향해서였지만.
"내가 어제 얘 운동복 신청해놨었거든?"
이게 바로 연륜이라는 걸까.
디아나는 오늘이 되서야 떠올린 문제를 미리 인지하고 해결책까지 마련해놓았을 줄이야.
그러면 이제 디아나의 안내를 받으며 그것들을 챙기러 가면 되는 건가?
그런 식으로 바로 따라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좀 찾아와라."
클레어가 디아나를 보며 지시했다.
그래 디아나 쪽만 보면서 말이다.
"네? 아, 그럼 같이.."
"뭘, 옷 하나 가지러 가는 데 두 명씩이나 가."
됐으니까 얼른 갔다 오라는 뜻으로 손까지 휘휘 저어보이는데 어쩌겠는가?
하늘같은 스승님이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상대가 스승인 클레어라서 불안한 마음같은 건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쪼르르 달려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절규했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저저 NTR동인지에 꼭 하나씩 등장하는 눈치없는 남자친구 같은 년 같으니라고..!
다 좋은데 디아나는 저게 문제였다.
사람이 너무 좋달까.
앨리스처럼 처음부터 경계하던 대상이라면 몰라도 레이시아나 클레어같이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은 털끝만큼도 의심을 안 하는 저 호구 여기사를 대체 어떻게하면 좋을까.
는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할 것 같은 클레어가 손수 발품까지 팔아가면서 내 운동복을 신청한 이유가 뭘까.
중간 과정이 살짝 좀 그렇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제자가 된 내 편의를 위해서?
아니면 한시라도 빠르게 날 디아나의 대련 인형으로 쓰기 위해?
'아니, 그보다는..'
핑계였을 것이다.
디아나를 떨어뜨리고 나와 단둘이서 있을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핑계 말이다.
그 증거로..
"그럼, 우린 안에 가서 기다릴까? 할 얘기도 있고 말이지."
디아나가 자취를 감춘 순간부터 클레어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번역하자면 대충 '너 이 새끼 잘 걸렸다.'라는 느낌?
그 상태로 어제처럼 내빼는 건 용납치 않겠다는 것처럼 아예 내 뒤로 돌아와서 날 앞장세우는데..
'오우야..'
"자자, 얼른 들어가자고."
그 와중에 어깨를 주물거리는 손길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클레어의 손에 떠밀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니..
쿵-!
그런 소리가 총 두 번 울려퍼졌다.
한 번은 문이 닫히면서 였고 다른 한 번은..
"그래서 어디 한 번 변명을 들어볼까?"
클레어가 날 벽으로 몰아세우면서 난 소리였다.
아니, 시발 뭔 놈의 벽치기를 이렇게 롸끈하게 해?
저거 시발 벽에 금간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원래부터 가 있었던 거겠지.
응, 그렇고 말고.
사람이 어떻게 응? 특히나 저렇게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여자가 어떻게 맨손으로 벽을 박살내겠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말이다.
현실파악의 요정:소설은 아닌데 판타지는 맞는 데수웅.
그러네 시발.
"응? 할 말이 있으면 좀 지껄여보지? 그러라고 있는 입일 거 아니야."
뭐요?
보지요?
너무 야한데..
그렇게 절찬리에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사이에도 '빡친 클레어'라는 현실은 시시각각 날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 씨부려야 지금 날 바라보며 눈을 부라리고 있는 인간도살자(여자 겸직중)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이 안 나잖아?'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댕댕하고 위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게 목숨의 위험을 알리는 것인지 정조의 위험을 알리는 것인지 구분은 안 갔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거 이러다가..'
진짜로 너같이 나쁜 아이는 따먹어서 혼내줄거야라는 식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지금도 봐라.
금방이라도 날 덮칠 것처럼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로서는 '최선'을 생각해내기 위해 잠시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내 모습이 클레어의 눈에 어떤 식으로 비춰졌을지는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헌데 내 약점을 움켜쥐신 노처녀 여검사님의 눈에는 그런 내 모습이 일종의 '반항'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아니, 뭐가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지 혼자 착각하고 지 혼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씩 말아올리길래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일단 참았다.
지금 내뱉어봐야 이미 이상한 쪽으로 불이 붙어버린 듯한 클레어에게 기름을 끼얹는 꼴밖에 되지 않을테니까.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면?
그냥 닥치고 있는 게 최고시다.
최선까진 되지 못해도 차선까지는 날로먹을 수 있게 해주니까.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번에도 손수 몸으로 실천하고 있자니..
"푸흐흐.."
클레어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예의 그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왜 송곳니까지 전부 드러내고 씩 웃는 미소를 말이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웃어보인 그녀가..
스윽-
이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을 짚고 있던 손 말고 그 반대쪽 손, 그러니까 오른손을 움직인 그녀가 그것을 내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 허벅지를 훑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만 세워서.
아마 당해본 적 없으면 모를 거다.
그게 얼마나 근질근질한 느낌을 주는지.
하물며 클레어는 디아나나 앨리스 뺨치는 매력을 가진 미녀 아닌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싹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미치겠다 정말.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참기가 꽤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 많이 쌓여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나름 많이가 아니지.'
이번 회차에서는 고작 며칠이지만 전회차 분까지 합치면..
'어, 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건 불가항력이었다는 소리다.
내가 뒤이어 전해진 '자극'에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끈을 그만 놓아버렸던 건 말이다.
"도망을 치던 반항을 하던 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고 하는 게 좋을 거야."
"..."
"어줍잖게 하면 날 자극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을테니까."
허스키하고 따뜻하면서 살짝 촉촉한 숨결이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그 안을 마구 헤집어대는 느낌이었다.
어떤 느낌이냐고?
꼴린다는 소리다.
"이번은 처음이니까 봐줄게.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끝부분이 생략된 속삭임.
그렇기에 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뭔가가 있었다.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클레어에게 '벌'을 받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
현존하는 최고의 그래픽카드는 인간의 뇌라고 누가 그랬던가?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머릿속으로 펼쳐진 적나라한 풍경에 다리 사이에 있던 또다른 다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몸을 일으키는 경로에는..
"흐음?"
내 허벅지를 훑고 있는 클레어의 손이 있었다.
제멋대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그것이 클레어의 손을 툭하고 건드리고 지나간 순간.
그리하여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클레어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한 순간.
나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어떻게하면 이 접촉사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하고.
문제는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닥치고 있었는데..
클레어의 반응이 예상 외였다.
아니, 예상대로긴 했는데 살짝 딜레이가 있었다고나 할까.
바지 위로 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내 물건을 보며 클레어는 '이것 봐라?'하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그러니까 내 물건을 발견하고 한 2.5초 정도 정지해있다가 말이다.
꼭 마치 특정한 컨셉에 맞춰서 연기를 하고 있다가 머릿속에 있는 대본에는 적혀있지 않는 상황이 눈앞으로 툭 던져지는 바람에 당황해서 연기가 잠시 끊겨버린 느낌?
그렇지만 그럴 리 없지.
남자를 잘 모르는 여자가 이런 은근한 터치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냥..
당황했던 걸거다.
명백히 느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내가 느껴버렸으니까.
지금도 봐라.
아주 건수라도 잡았다는 것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저 모습을 말이다.
"이건 뭘까아~? 응?"
알면서 굳이 묻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그야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그래서 해줬다.
솔직히 어렵지도 않았다.
수치스러운 모습을 연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올 정도로 수치심이 미친 듯이 올라왔으니까.
그런 내 반응을 보고 머릿속에서 '가능!'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일까.
"응? 대답 좀 해보지?"
내 왼쪽 허벅지를 훑고 있던 클레어의 손이 스리슬쩍 가운데 다리 쪽으로 옮겨갔다.
"이런 상황인데 이렇게 빨딱 세우기나 하고 말이지.."
스슥-
스슥-
펴서 확인해보면 흉터가 잔뜩 나 있을 것 같은 손이 얇은 천 위를 스치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윽.."
그와 함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응? 기분 좋아? 기분 좋냐고."
그런 내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나보다.
처음에는 살짝 간을 보는 느낌이 강하던 클레어의 손놀림이 차츰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디아나한테 접근한 것도 이런 걸 당하고 싶어서 접근한 거지? 변태같은 새끼.."
클레어에게 농락당하다보니 알게 된 건 그녀는 흥분하면 입이 거칠어지는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변태같은 새끼라니.
'칭찬인데?'
아마 그녀는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수치스러워 하길 바랬던 것 같은데 내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변태같다는 건?
이 세계 기준으로 '남자'답지 않게 야한 걸 밝힌다는 소리고 그건 내 기준으로 따지면 남자답다는 소리니까.
스스슥-
손가락을 세운 클레어가 그것을 이용해 바지 위로 드러난 내 물건의 윤곽을 훑었다.
"응? 더 해줬으면 좋겠지? 이 발정난 새끼.."
그러면서 자꾸만 저런 말을 중얼거리는데..
왠지 모르게 새로운 취향에 눈뜨게 될 것만 같았다.
그냥 대놓고 욕을 했다면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
오히려 기분이 나빴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클레어는 아까 전부터 내 귀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속삭이듯 말하니?
기분 나쁘기 보다는 자극적이었다.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있는데다가 새어나오는 숨결은 잔뜩 달아올라 있기까지 해서 더 그랬고.
'우와..'
솔직히 나도 이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이대로 그냥 클레어랑 사고 쳐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디아나 눈나..'
그러자니 오늘 아침 구보때 봤던 디아나의 늠름하기 그지없었던 모습이 머릿속으로 아른 거렸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은근한 쾌감에 그 마저도 조금씩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버전 '잘못된 만남'이 탄생하기 바로 직전에..
쿵-!
거대하고 둔탁한 타격음이 열기 속으로 잠식되어 가던 나와 클레어의 이성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정신을 차린 내가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느낌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나보다 한 발 앞서 정신을 차린 클레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무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라도 방금 그 광경을 누가 목격하진 않았을지 확인해보려는 것일까.
나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주변에 인적같은 건 딱히 없었던 모양이다.
제가 좀 과할 정도로 폭주했다는 건 인정하는 걸까.
연무장으로 돌아온 클레어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며 괜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을 하고 있으니..
"미안, 오래 기다렸나? 행정실에 갔더니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말이야."
우리의 NTR 동인지 속 호구 남자친.. 아니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넀다.
손에 내 것으로 보이는 운동복 두 벌을 지참한채로.
만면에 가득한 미소와 함께 그것을 팔랑팔랑 흔들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디아나 눈나..'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헤집어댔다.
커피에다가 샷 추가 하듯 죄책감에다가 미안함 샷 추가에 배덕감이라는 시럽을 섞은 느낌?
그 오묘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시발 이게..'
NTR당하는 여자의 심정인가?
대체 내가 어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