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학원 부지를 따라서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디아나의 위치는 대열 중에서도 맨 마지막이었다.
그런 그녀가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워밍업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그 와중에 악랄한 건 속도를 올려도 무작정 올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양옆에서 달리는 우리에게 적응할 시간이라도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철저히 한 가지 목적에 충실한 움직임이었다.
그 목적이 뭐냐고?
당연히 기강잡기지.
우리 기사부 부장님께서는 남자들을 보고 흐트러진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못마땅하게 느껴지셨던 모양이다.
디아나가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며 앞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친히 압박감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추격당한다는 느낌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지 말이다.
그랬다.
디아나는 앞서 가는 이들을 추월하려고 하지 않고 '추격'했다.
속도는 높이되 앞지르지는 않고 그저 앞사람이 압박감을 느낄 수준으로만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뛰는 이들또한 그에 맞춰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페이스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차라리 추월이라도 당했다면?
에라 모르겠다하고 배째라는 식으로 포기해버릴 수라도 있었겠지.
나중에 좀 많이 고달프겠지만 계속 힘든 것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바퀴 수가 대충 네 바퀴를 넘어가니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이들이 슬슬 대열을 이탈하려는 듯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네 바퀴쯤은 눈 감고도 뛰었을 거다.
다들 그럴만한 몸인데다가 고작 그 정도도 못 뛰는 이들이 이곳에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한 번 페이스가 흐트러지니 이대로는 더 뛰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걸까.
조금씩 속도를 늦추는 그들을 보며..
'어우..'
디아나또한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어..? 할만한 것 같은데..?'라고 착각한 이들이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구보는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끝까지 진행되었다.
그래 끝까지 말이다.
"헤윽.."
"헤으응.."
"허으으윽.."
몸에 흙이 묻던 말던 아랑곳 하지 않고 잘 익은 파김치마냥 연무장에 추욱하고 늘어진 여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디아나를 진심으로 빡치게 하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겠다고.
"자, 그럼 다들 정리하고 각자 훈련하러 가도록."
그렇게 다들 늘어져있는 가운데 유독 디아나만이 상쾌해보였다.
이런 말 하긴 좀 뭣하지만 시원하게 한 발 뺀 듯한 얼굴이랄까.
그 와중에 의외였던 건..
'생각했던 것보다 체력이 좋은 것 같단 말이지..'
척봐도 비리비리 해보이는 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라는 걸까.
끝에 가서 부쩍 힘에 부쳐하긴 했지만 진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래..'
괜히 기사부 전과를 입에 담은 게 아니라 이거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끝끝내 기존의 복장을 고수하는 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디아나가 건네주었던 수통을 내밀었다.
"아, 고맙.."
목이 많이 타긴 했나 보다.
저렇게 덥썩 받아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내가 내민 것을 건네받아 그대로 입쪽으로 가져가던 놈이 별안간 멈칫했다.
왜? 그 안에 뭐라도 탔을까봐?
그렇지만 멈칫한 건 말그대로 잠시 뿐이었고, 이내 그것을 제 입쪽으로 가져간 놈이 반쯤 차 있던 물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찌나 급하게 들이키는 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게 턱을 타고 흐르는데..
꼴깍-
그 광경을 목도한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귓가로 울려퍼졌다.
아니, 정정하자.
내 귀에만 들렸던 건 아니었나 보다.
"콜록-!"
그 소리가 귓가를 울린 순간 정신없이 물을 들이키던 주인공 놈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으니까.
사레라도 들린 건지 연신 거친 기침을 터뜨리는 놈의 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으이구, 그러니까 천천히 좀 마시지. 누가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놈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었다.
왜 이렇게 친절하냐고?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 운동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기사부에 속한 이들의 관심은 주인공 놈보다는 내쪽에 더 쏠려있었다.
내가 클레어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점과 겉으로 보기에는 비리비리해 보이는 주인공의 외양이 맞물린 결과였다.
다들 기사부 소속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왕이면 몸이 좋은 남자를 선호하는 듯 했으니까.
그런 그녀들의 눈에 주인공의 모습은 아기자기하니 귀엽게 느껴지긴 해도 성에 차진 않았겠지.
그래도 주인공이 유혹이라도 한다면 좋다고 덤벼들 년은 많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랬던 놈을 향한 시선들이 이번 구보 한 번으로 살짝 바뀌었다.
외양만 그럴듯한 머저리를 보는 느낌에서 '아, 그래도 애가 깡은 있네.'라는 느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 주인공 놈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듯 했다.
그렇다는 건?
원래라면 내쪽으로 몰렸어야할 관심을 놈이 나눠받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래서였다.
이렇게 놈을 손수 다독여주는 것은 말이다.
앞으로 내 몫의 어그로를 나눠받게 됐는데 이렇게라도 응?
잘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얘는 이제 뭐하려나..'
나야 이미 잡혀있는 예정이 있었다.
클레어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만큼 이제 디아나를 따라 클레어가 있는 곳으로 향할 예정이니까.
원래라면 주인공 놈이 차지했어야할 자리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여전히 콜록대기 바쁜 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관심 끄기로 했다.
'다 의미없다~ 의미없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걱정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주인공이다.
이 세상의 사랑을 그 한몸에 몰아서 받으시는 존재 말이다.
그러니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그보다 지금 걱정해야할 대상은 가만히 있어도 모든 일이 술술 풀릴 주인공 놈이 아니라..
'나지.'
어제 클레어와 그러고 나서 냅다 튀지 않았던가?
비록 클레어가 일처리를 끝내고 난 후에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클레어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별개의 문제겠지.
그리고 내가 본 클레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서 문제고.
'음..'
생각하는 와중에도 어제의 업보를 청산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건..
"이안."
정리를 끝마치고 내 앞으로 돌아온 디아나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내가 아까 벗어둔 상의가 들려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벗어놨었지.
아무래도 디아나는 내게 빨리 옷을 입히고 싶었나 보다.
아까 구보할 때는 대체 어떻게 참았대?
'거참..'
얼른 입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들고 온 것을 건네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흐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민 것을 받아 몸에 걸쳤다.
아래 받쳐입은 게 땀에 젖어서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디아나가 그걸 원하니까.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렇게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니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한 디아나의 얼굴 위로 흡족해하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흡족해졌다.
디아나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에서 뛰는 이들을 채찍질하느라 땀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내 기준으로 굉장히 흐뭇한 모습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몸에 쫙 달라붙는 편이었던 검은색 쫄티가 뛰는 동안 흘러나온 땀을 잔뜩 머금은 채 살갗하고 철썩 달라붙어 있는데..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다가가면 땀내하고 짬내가 물씬 풍겨올 것 같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쪽은 상큼한 과일향이 났다.
'이건..'
복숭아인가?
다시 맡아보니 딸기 같기도 하고..
그래, 저런 여자의 탈을 쓴 군인 놈들하고 히로인 후보인 디아나가 같을 리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네, 선배님."
콧속으로 은밀하게 파고들어오는 그 냄새를 만끽하면서 디아나의 부름에 답했다.
동시에 너도 함 맡아보라는 뜻으로 슬쩍 그녀를 향해 다가서니 디아나의 몸이 흠칫하고 떨림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 위로 붉은 기운이 화악하고 번져나갔다.
반응을 보니 그녀도 내 냄새(?)를 맡은 모양.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디아나한테서는 딸기인지 복숭아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과일향이 났는데 그렇다면 내게서는 과연 어떤 냄새가 날까?
반응이 괜찮았던 걸로 봐서는 일단 나쁜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씻을 때 워낙 꼼꼼하게 씻기에 그런 냄새가 날 리도 없지만.
'그나저나..'
귀엽네.
바로 조금 전까지 다른 이들을 쥐잡듯이 잡던 여자가 살짝 다가간 것만으로 저렇게 수줍어 하다니.
둘 사이의 갭이 어마어마하다보니 파괴력이 장난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아니 시발..'
이 놈의 침샘은 요즘 들어서 자꾸 이러네.
군침도는 광경을 하도 봤더니 고장이라도 난 걸까.
아무튼 방금 전 디아나가 보여준 반응은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
"선배님?"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며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가 왜 그러는 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의아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인 것은 덤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별거 아닌 행동이다.
딱히 스킨십같은 걸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가서기만 했을 뿐이니까.
그런데도 디아나는 영 맥을 못 췄다.
어느 정도냐면..
"으.."
아직 운동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이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앓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궁금해졌다.
보아하니 나한테서 나는 냄새에 반응해서 저러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냄새가 나길래?'
그래서 물어보기로 했다.
"아.. 저 혹시 냄새나나요..?"
뒤늦게 그녀가 왜 그러는 지 눈치챈 사람처럼 표정을 시무룩하게 물들이며 팔을 코쪽으로 가져가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딱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그런 게 아니다!"
디아나가 급발진을 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걸까.
우렁차기 그지없는 소리가 운동장을 강타했다.
덕분에 주변에 있는 이들은 물론 막 운동장을 빠져나가던 이들의 시선까지 모조리 우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안 그래도 충분히 쪽팔린데 시선까지 몰린 상황.
쪽팔림에다가 쪽팔림을 토핑으로 얹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 디아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그 상태로 고장난 로봇마냥 어버버하던 디아나를 구원한 것은..
"뭐야? 둘이 여기서 뭐하냐? 구보는 한참 전에 끝난 것 같던데."
다름아닌 그녀의 스승이었다.
꼭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낸 클레어가 나와 디아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도 안 오니까 직접 찾으러 온 것일까.
"스, 스승님.."
"됐고. 끝났으면 얼른 가자고. 할 게 많으니까."
대체 할게 뭐가 많다는 건지.
그런 식으로 디아나를 재촉하면서도 간간히 날 향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라는 눈빛을 보내오는 클레어의 뜨겁기 그지없는 관심을 만끽하면서 속으로 쓰게 웃고 있으니..
"흐으음..?"
우리 둘을 포획했으니 여기서 볼 일은 끝이라는 것처럼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클레어의 시선이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던 주인공 놈에게로 가서 닿았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묘한 감탄사에 긴장감이 훅 솟아올랐다.
'설마..?'
여기서 클레어가 주인공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놈을 제자로 받아들인다거나 그런 개같은 전개가 펼쳐지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닐 거다.
..아마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놈은 주인공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만드는, 불합리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를 대표하는 말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만고의 영약이나 그 아래 숨어있던 은거기인이라는 이름의 기연을.
막다른 골목이나 여관같은데 들어가면 불량배 놈들에게 시비가 걸리고 있던 절세미인과 만나게 되는 놈들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놈들인데 그깟게 대수일까.
그러니 불안하지 않고 배기겠냐고.
초조함에 젖은 가슴이 제멋대로 비트를 찍어내는 게 느껴졌다.
그 가운데..
피식-
주인공 놈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 차례 지어보인 클레어가 나와 디아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