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2)화 (32/366)



〈 3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큰 것과 비교적  큰 것이 나란히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보통 둘 중 어느 쪽에 먼저 시선이 갈까?

정답은 큰쪽이다.


일단 옆에 있는 것보다 크다는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허미..'

구보를 앞둔 병사들마냥 시원하게 웃통을 깐채 도열해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그 시선 하나하나가 어찌나 강렬한지 시선 하나가 날아와 박힐 때마다 '푸욱!'하는 효과음이 환청마냥 귓가로 울려퍼질 정도였다.

이런  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좀 쫄았다.


아니, 상식적으로  쫄겠냐고.


여기가 탁 트인 운동장이라서 그렇지 따로 한 일곱 명 정도만 떼다가 장소를 골목같은 곳으로 바꿔서 앉혀놓은 다음에 등이나 팔뚝에다가 호랑이 그림같은 거라도 하나 그려놓으면 어디어디 칠공주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울 법한 비쥬얼의 여자들이  십명 모여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생각해봐라.


오금이 저리나  저리나.


흡사 부정맥이라도 오는 것마냥 쿠웅- 쾅! 쿵- 콰앙!하고 심장이  마음대로 비트를 찍어냈다.


 와중에 날 더 환장하게 만드는 건..


스스슥-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은근슬쩍 내 뒤로 제 모습을 숨기는 주인공 놈의 행태였다.

아니, 앨리스를 상대로 당당하게 나서며 날 지켜주려던 것처럼 행동하던 놈은 대체 어디간 거냐고.

며칠 사이에 새로운 놈이 빙의하기라도 했나?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꽤..?

내가 당초에 예상했던 건 적대 반 호기심 반 정도의 분위기였다.

근데 실제로 확인해보니 이쪽을 향한 적대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의 향기가 훨씬  짙게 풍겼다.

아, 물론 땀내하고 짬내도.


그리고 그 사이로 은밀하게 느껴지는 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탐욕이었다.


수많은 눈동자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감정을 차마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그렇게 운동장으로 들어서다 말고 어정쩡하게 멈춰있던 나와 주인공 놈을 구원한 건..

"자자, 그만."

인파 너머에서부터 들려온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운동장 안에 서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웃통을 시원하게 까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는 건?

저게 아침구보의 일반적인 모습이란 소리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디아나도 저들처럼 웃통을 시원하게 까고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고.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설마 이렇게 빨리 디아나의 속살(상체한정)을 접하게 될 줄이야.

 와중에 내 뒤에 주인공 놈이 서 있다는  무지하게 신경쓰여서 지금 당장 돌아서서 놈의 눈에 손가락을 쑤셔넣어서 실명 마법(물리)를 시전해야할지 참아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내가 고민을 끝마치는 것보다 디아나가 여자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훨씬 빨랐다.

형형색색의 육체들 사이에서 수줍게 아른거리는 찬란하기 그지없는 금발.


그것을 목도한 순간 두 가지 감정이 치킨게임이라도 벌이는 것마냥 서로를 향해 박치기를 시전했다.

'아, 안..'

기대감과 그걸 주인공 놈한테 보여주기 싫다는 독점욕.

그 사이에서 번민하면서도 곧 눈앞으로 펼쳐질 풍경을 눈동자 속에 새기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아주 구경났지? 다들 대가리 돌린다. 실시."


마침내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넀다.


그리하여 목격하게  그녀의 속살은..

속살은..

새하얗고 어쩌면  끝에 달린 자그마한 돌기의 색은 연분홍빛이지 않을까하고 나름 추측해봤던 그녀의 속살은..


볼 수 없었다.

시원하게 훌러덩 벗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디아나는 그 때 클레어의 앞에서 대련할 때처럼 검은색 쫄티를 걸치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저게 평소 그녀의 훈련복장인 모양.


'하긴..'

디아나가 살갗을 함부로 드러낼만한 타입은 아니긴 하지.

아무리 가슴노출 정도는 자연스러운 세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때처럼 몸에 쫙 달라붙어서 탄탄하기 그지없는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기는 했지만..

'음..'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확히는 기분이  오묘했다.


살짝 아쉬우면서도  혼자 독점해도 아깝게 느껴질만한 모습을 다른 새끼한테 보이지 않게 된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랄까?

그런 것들이 가슴 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는 사이, 평소 내 앞에서 보여주던 허둥지둥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엄격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나와 주인공 놈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고개를 모조리 전방을 향하게 만든 디아나가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설마 내가 주인공 놈하고 같이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뒤에 서 있는 주인공 놈을 발견한 디아나가 순간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안 데일, 그리고  후르온 맞나?"


"네."


"..네."

전자는 나였고, 후자는 여전히 내 뒤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주인공 놈의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의 대답을 확인한 디아나가 씨익하고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평소에 짓던 것하고는 사뭇 다르게 호쾌하기 그지없어서..


'눈나.. 너무 멋있어요 눈나..'


나도 모르게 그런 감상이 절로 흘러나왔다.


똥개도 제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만 제가 관리하는 기사부 소속의 인원들을 등 뒤에 두니 자신감이라 할만한 것이 가슴 속에서부터 뭉클뭉클 피어오르기라도 하는 모양.

그렇게 새삼 날 감동시킨 그녀가 얼굴 위에 띄워놓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우선 기사부를 대표해 둘의 전과를 환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기사부를 대표해서라니.


뒤에 서 있는 이들 중에 한 35퍼센트 정도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다만 내일부터는 조금 더 일찍 나올  있도록. 구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몸을 푸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 설마 구보시간이라는 게 말그대로 철저히 구보만을 위한 시간이었어?


캬, 고건 몰랐네.


'어쩐지..'

갓 나온 사람들 치고는 묘하게 땀냄새가 풍기는 것 같더라니만..

지금보니 몸도 살짝 땀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나와 주인공 놈을 번갈아 바라보던 디아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맘같아서는 이런저런 설명을 좀 해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구보 시간이라서 말이야."

뛸 준비가 되었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 나와 주인공 놈의 복장을 가볍게 눈으로 훑은 디아나가 옆쪽을 가리켰다.


"혹시 필요없는 짐이 있다면 저쪽에 내려놓고 오도록. 더 지체되면 곤란하니까."

"네."

입을 모아 대답했지만 짐이라고 해봐야 딱히 별거 없었다.


그저  때 입고 있는 상의가  거치적거릴 것 같아서 벗은 다음에 내려놓고 옆쪽을 확인해보니 날 보며 자기도 벗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주인공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벗으면 더울 것 같고, 그렇다고 벗자니 아까처럼 시선이 확 쏠릴 까봐 망설여지는 걸까.

입고 있는 상의의 가슴팍 부분을 꽈악 움켜쥔 채 그러고 있길래 녀석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대로 뛰려고?"

많이 걸리적거릴텐데?


알다시피 보통 제복이라는 게 평소에는 문제가 없어도 일단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굉장한 애로사항이 꽃피는  보통이다.

그런데 그걸 입고 구보를 뛴다?

심지어 저렇게 단추를 전부 채운 상태로?

'오우 쉣..'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처음이야 괜찮겠지 조금씩 땀이 나오기 시작하면?


제복이 땀을 머금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 재질의 특성상..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제복의 카라부분에 땀에 푹 쩔어서 목덜미에 철썩하고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걸 입고 뛰겠다고?

"으음.."

굳이 그렇게 하시시겠단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버려둬야지.

이런 건 백날 설명하는 것보다 몸으로 한 번 겪어보는 게 최고다.

아마 놈도 오늘 뛰고 나면 알게 되겠지.

지금 지가 하려는 짓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아무튼 그렇게 짐이 될만한 것을 내려놓고 다시 디아나의 앞으로 돌아가니..

"오오.."


그런  모습을 확인한 여성들 사이로 탄성이 일어났다.

그에 맞춰 디아나의 눈썹이 꿈틀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음, 운동복이 따로 없나?"


"있기는 합니다만.."


"합니다만?"

있는데 왜 안 입고 나왔는데?

응?


지금 니 몸 좋다고 광고라도 하는 거야?

응?


그런 모습은 나한테만 보여주라고!


꼭 그런 환청이 들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살짝 경련하는 디아나의 눈썹을 보면  환청인 것만은 아닌  했지만.


 정도로 디아나는 내 패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썸녀라는 년이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체육관에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복장을 한채 모습을 드러냈다면 저렇게 반응했을 것 같긴 하다만.


"어제 막 세탁한 상태라서 말입니다."

내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넘어가는 수밖에.

그렇지만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나 보다.


"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따로 학원에 이야기해서 조치해두록 하지."


그렇다는 건 뭐 운동복같은 거라도 보급해주겠다는 걸까.

어쩐지 엄청나게 펑퍼짐한 운동복을 지급받고 황당해하는 미래의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듯 했지만 그거야 미래의 내가 감당할 일이고..

"알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높여서 우렁차게 대답하니 어디선가 쳇하고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안 그래도 자꾸만 내 몸을 노골적으로 훔쳐보는 이들 때문에 한계에 달해있던 디아나의 인내심이 끊어지는데에는 말이다.


씨익하고 디아나의 얼굴 위로 그린 듯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에 맞춰 내 머릿속으로 댕댕하고 좇됐음을 알리는 경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원래 화 잘 안내는 사람이 한 번 폭발하면 더 무서운 법.

아니나 다를까..

"다들 아침이라서 체력이 남아도나 보지? 응? 잡담할 기운도 있고 말이야."

"..."

"잘 됐네. 이 참에 힘 좀 뺄  하체나 실컷 단련하고 시작하자고."

단숨에 합죽이가 되어버린 이들을 바라보며 디아나가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제 스승인 클레어가 지어보이던 것과 꼭 닮아있는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송곳니까지 훤히 드러내며 웃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클레어가 디아나를 두고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라 칭했던 이유를.


그랬다.


디아나는..

"나보다 뒤쳐지는 년은 각오하는  좋을거야. 내가 손수 '재미'있게 만들어줄 거니까."


속된 말로 빡이 돌면 앞뒤가 안보이는 타입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과는 달리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척척 걸음을 옮겨 대열의 맨 뒤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남자 둘. 네놈들도 이쪽으로 오도록."


나와 주인공 놈을 향해 손짓했다.

그렇게 우리 둘이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은 순간.


"자, 그럼 출발."


디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짤막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가 구보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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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기 그지없는 경고를 날렸던 것과는 다르게 디아나는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한 건 정해진 코스를 따라  바퀴를 돌고 나서였다.


그토록 살벌한 모습을 보이던 디아나가 했던 말과는 다르게 느긋하게 움직이니 슬슬 다들 긴장이 풀려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뛰는 것에 익숙치 않을 나와 주인공 놈을 챙겨주기 위해서라도 속도를 높이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모양.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실제로 디아나가  바퀴를 도는 동안 속도를 높이지 못했던 데에는 나와 주인공 놈의 존재가 크게 한몫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의 한 바퀴로 그녀는 얼추 확신한 듯 했으니까.

이대로 속도를 높이더라도 나와 주인공 놈이 무리없이 따라올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걸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

"잘 따라오도록."

양옆에 서 있던 우리 둘을 한 차례씩 돌아보며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보인 디아나가..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신나게 뛰는 경주마들을 바라보며 지금껏 뒤에서 미소만 짓고 있던 치타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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