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곳이 그 유명한 한겨울의 철원이라는 곳일까.
추워서 돌아가시겠네 정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연무장 안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 싸늘함을 견디지 못한 등골을 따라서 소름이 제멋대로 돋아날 정도였다.
"응? 왜 대답이 없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디아나의 스승만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에 목도 관리를 아주 잘했나봐? 대체 얼마나 관리했길래 저게 손에서 미끄러질 정도일까? 응?"
그녀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하긴, 방금 디아나가 한 실수는 디아나 정도 되는 경지에 있는 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실수였으니까.
하물며 그녀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이는 딱봐도 실전중시파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무기를 놓쳤다?
무기를 놓친 이유가 그것을 쥔 손을 가격당했다거나 그래서였다면 저 정도로까지 빡치지도 않았겠지.
그건 실수가 아니라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방금 디아나는 누가봐도 손에 힘이 빠져서 놓친 것이었다.
그러니 더욱 빡치겠지.
기껏 가르친 제자가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선 안 되는 기초적인 실수를 범해버린 셈이니까.
그래서일까?
디아나는 쏟아지는 스승의 폭언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자기가 해선 안 되는 실수를 해버렸다는 걸.
'그나저나..'
독설 참 찰지게 잘하네.
전장에서 검술 뿐만이 아니라 주둥아리술도 같이 단련한 것일까.
다다다다 쏟아지는 말 중에서 어느 하나 중복되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살짝이지만 라임도 있어서..
'랩 잘할 것 같네.'
나름 듣는 맛도 있었다.
딕션도 괜찮아서 귀에 팍팍 꽂힌달까.
뭐, 이것도 내가 욕먹는 입장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일테지만 말이다.
대체 언제까지 독설을 퍼부을 생각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디아나의 스승,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디아나 앨런."
"..."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도록."
쏟아지는 클레어의 독설에 너덜너덜해진 디아나는 차마 그 지시를 거역하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걸 나 혼자 여기 내버려두고 간다고?
어..?
이 분위기 어쩔 건데.
응? 어쩔 거냐고.
졸지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클레어와 연무장에 단둘이 남겨지게 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후우.."
클레어가 내게 딱히 관심이 없어보인다는 것 정도?
내게 관심을 보였다면 분위기도 그렇고 참 부담스러웠을텐데 말이다.
내심 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말이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던 클레어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귓속으로 파고들어온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린 순간.
"승부에서 비겁하니 어쩌니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직감했다.
내가 디아나의 멘탈을 흔들어놓기 위해 내뱉었던 마지막 발언이 그녀의 귀에도 들어갔다는 것을.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그걸 가지고 뭐라할 생각은 없다는 뜻일 거다.
그런 거라면 굳이 저런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가 뭘까.
뭐라 반응하기도 애매한 분위기라 어색하게 침묵을 고수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이야."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벽까지 물러나 그곳에 기대 서 있던 클레어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뭐?
왜 다가오는데?
그녀의 보폭이 생각보다 크고, 속도도 생각보다 빨라서 내심 당황하고 있던 그 순간.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클레어가 날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그 인상만큼이나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입술 사이로 살며시 드러난 송곳니, 그것을 목격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 온몸의 감이 소리를 질러왔다.
위험하다고, 뒤지기 싫으면 얼른 피하라고.
아직까지는 일상보다는 목숨이 오고가는 전장 쪽이 더 익숙한 내 감각이 제멋대로 몸을 조작해 움직이게 만들었다.
슷-!
그야말로 한끗 차이였다.
대체 어느 순간 뽑아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클레어의 허리춤에 꽂혀있던 검이 내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미친 년이?
설마 내가 자기 제자 이겼다고 이러는 거야?
조금만 늦었다면?
입이 두 개가 됐을 거다.
그 사실을 두고 새삼 경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잘 피하네?"
클레어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내가 피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아, 시발..'
들켰네.
하지만 언제?
대체 언제 눈치깐 거지?
분명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런 내 의문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묻어나오기라도 했던 걸까.
"그럼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냐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클레어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어디서 들킨 건지가.
문제는 내 연기를 눈치챈 장본인이 그런 내 의문에 답을 해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건데..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일단 그 의문을 해결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그녀의 목적부터 물었다.
없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내게 볼일이 없었다면 내 코스프레를 눈치깐 즉시 즉결심판을 외치며 칼부터 휘둘렀을 위인이니까.
눈앞의 여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얌전히 나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건?
뭔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리다.
그게 뭘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진짜 최악은..'
아니지.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굳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지는 말자.
그건 말 그대로 사서 걱정하는 꼴이니까.
해서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쓰면서 클레어가 무언가 요구를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글쎄?"
그녀가 예의 그 미소를 얼굴 위에 매단 채로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처음에는 날 놀리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진심으로 생각해놓은 게 없는 느낌?
그렇기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대화를 요구한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당황하지 말자.'
지금 동요한 티를 내서 내게 좋을 건 없었다.
해서 살짝 흔들린 정신부터 바로잡았다.
"아."
그러고 있으니 클레어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꼭 마치 괜찮은 뭔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해서 다시금 그녀와 눈을 마주치니..
"잘 됐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내 제자나 해라."
귀를 의심케 만드는 발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요?
아니, 이 타이밍에 제자로 들어오라고 제안을 한다고?
애초에 내 목표가 그것이긴 했지만, 다 틀렸다고 생각했던 게 이런 식으로 눈앞으로 뚝 떨어지니 솔직히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쁨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너무 예상밖의 제안이라서 그 제안이 어떠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도출된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살인마들의 뇌는 일반인들의 것과 그 구조가 다르다고 하더니만 얘도 그런 케이스인걸까.
그 와중에 또 눈치는 좋으셔서 내가 그런 부분에 의문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눈치까신 모양이다.
"너도 대충 느꼈겠지만.."
그때부터 클레어의 장광설이 시작되었다.
"디아나 걔는 진짜야. 나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긴 그렇겠지.
디아나는 히로인이니까.
"문제는 제 나이대에 마땅한 경쟁상대가 없다는 점이지."
재능이 뛰어나도 너무 문제라며 클레어가 툴툴거렸다.
그 말은?
"그래, 네가 그 경쟁상대 역할을 좀 맡아줬으면 해서."
그래서 날 제자로 들이시겠다?
그렇다는 건 디아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날 대련용 인형마냥 뺑뺑이를 돌리겠다는 소리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개꿀인데?'
그도 그럴 것이 그건 내가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그 역할만 잘 해주면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에 대해서는 입 다물어줄게."
그리고 이어진 클레어의 발언이 그런 내 심정에 쐐기를 박았다.
내심 원하던 것까지 하게 해주고 거기에 정체에 대해서도 입 다물어주겠다?
이걸 사양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고 덥썩 고개를 끄덕이자니..
'뭔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그래서 아주 잠깐동안 고민했다.
과연 이걸 받아도 아무런 탈이 없을까하고.
그러고 있으니..
"말하자면 서로간의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같은 거지."
무요?
"그래, 비밀 친구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내뱉는 클레어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내가 아는 '비밀 친구'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제자가 호감을 품은 상대한테 저런 단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할 리가..
"그러다가 응? 서로 마음이 맞으면 잠깐 즐기는 것도 괜찮고."
있구나.
잠시 까먹고 있었다.
이 세계의 여자들은 때로는 자궁이 이끄는대로 행동하기도 한다는 걸.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클레어의 모습은 누가봐도 자신이 밝혀낸 내 '비밀'을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아마 당장은 디아나를 봐서라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진 않을 것 같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골 때리네 이거..'
이러다가 디아나보다 이 년하고 먼저 침대에 올라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되겠냐만은..
그 가능성을 쉬이 부정할 수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클레어 정도면 충분히 미인이기도 했고.
혹자는 그녀의 얼굴에 작게 나 있는 흉터가 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그 흉터까지도 그녀의 미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까.
만약 그게 없었다면?
살짝 심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무튼 거절할 수도, 거절할 이유도 없는 제안이었기에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어느새 내 옆으로 돌아온 클레어가 내 등을 두들겼다.
팡-!
아니 무슨 등 두들기는데 풍선 터지는 소리가 나냐고.
역시 인간도살자라고 해야할까.
손맛이 장난 아니었다.
한대 얻어맞앗을 뿐인데 등짝이 화끈화끈 거리는게..
"응? 너무 그렇게 얼굴 구기지 말고."
표정이 절로 일그러지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디아나가 잠시 밖에 나가있는 이때가 기회라 여겼는지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두른 클레어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게 애들 삥뜯고 다니는 깡패인지 교수인지..
어깨를 팡팡 두들기는 소리에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으니 클레어가 내 어깨를 조물딱대기 시작했다.
그래, 만질테면 만지라지.
내가 기억해놨다가 나중에 다 갚아준다 진짜.
클레어가 그나마 주인공을 파워업 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조력자면서 동시에 희박하나마 히로인일 가능성이 있는 여자에다가 미인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사장같은 년이 이랬다면 교수고 뭐고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었을 거다.
"몸은 평소에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제 몸에 근육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 왜 이렇게 남의 팔뚝을 조물딱거리는 걸까.
살짝 신기해하는 것 같은 그 반응을 바라보고 있으니 머릿속으로 설마하는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년 혹시..'
에이, 아니겠지?
디아나의 스승 역까지 맡을 정도로 나름 능력있는 여자다.
그 능력이 사람 죽이는 데 몰려있어서 그렇지.
그런데 아직까지 홀몸일리 있겠는가?
분명 연인이든 뭐든 있을 거다.
그래 노처녀일리가 없..
"굵네.."
..없겠지?
"흐으응.."
아까 날 압박하던 때하고는 다르게 눈빛이 몽롱하게 변한 것이 이대로 터치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과연 어디까지 도달할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지만..
"..스승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걸 확인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클레어에 의해 밖으로 쫓겨났던 디아나가 다시 연무장 안으로 복귀한 탓이었다.
잠깐 사이에 나름 깊게 반성한 것일까.
디아나의 표정은 진지하게 그지없었다.
그런 얼굴을 한채 그녀는 우선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못 미더운 모습을 보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미안하다. 내가 집중했어야 했는데."
디아나는 내게도 사과를 건네왔다.
비록 의도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곤 하지만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대련에 임했을 내 각오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
진실을 알고 있는 클레어의 앞에서 디아나의 사과를 받자니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괜찮아요. 선배."
일단 받았다.
민망하다고 해서 받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내게까지 깔끔하게 사과를 건넨 디아나가..
"그런데.. 방금 둘이 나란히 서 있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렇게 봤던 것 같던데.."
제 스승인 클레어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런 의문을 꺼내들었다.
'..어어?'
그걸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