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게 실력을 인정받으려거든 말로만 할 게 아니라 마땅히 그 실력을 보여야할 것이 아니냐.
디아나의 스승이라는 여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일리도 있고, 그녀 입장에서도 충분히 할만한 주장이기도 했다.
'대련이라.. 곤란하게 스리.'
내게는 딱 그 정도 감상밖에 되지 못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대련이라니?
난 내 실력을 확인하겠다길래 대충 창질 몇 번 하는 거 보고 '그래 잘 하네.'하고 고개나 끄덕일 줄 알았는데 말이다.
자기 제자인 디아나가 남자인 나와 잠깐이지만 동수를 이루었다는 게 내심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했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애초에 저런 이들은 칼밥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칼질과 관련된 거라면 자부심이 상당한 편이곤 하니까.
'뭐.'
솔직히 말하자면 디아나와 대련을 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내가 대련에서 쓸 창이 없다는 게 약간 흠이긴 하지만 이곳이 어딘가?
기사부가 있는 서관이다.
뒤져보면 잠깐 창 역할을 맡아줄 막대기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래,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어디 한 번 시작해보라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나의 스승이라는 년이었다.
디아나와 단둘이서 대련을 하는 거라면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어렵지 않게 그녀를 속여넘길 수 있을테지만 제 3자가, 그것도 명백히 디아나보다 윗줄에 있는 실력자가 지켜보는 와중이라면?
'백퍼 들키겠지.'
안 들킬 수가 없다.
저 년은 내 기준으로도 진짜배기니까.
그렇기에 생각해보는 중이었다.
저 년의 포지션이 뭘지.
디아나는 말할 것도 없이 히로인 후보다.
그렇다면 디아나의 스승이라는 저 년은?
저 년도 히로인 후보 중 한 명일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몰랐다.
디아나와 사제관계로 엮여있는 만큼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좀 낮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점을 싹 무시하고서 저 여자가 히로인 후보가 아니라 가정한다면?
남는 건 조력자 아니면 대적자 뿐이다.
그리고 내 감은 저 스승이라는 년이 주인공의 조력자 중 한 명일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유?
간단하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여기까지 날 이끈 건 히로인 후보인 디아나다.
그 말은?
'이 자리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거지.'
그게 누구겠는가?
당연히 위대하신 우리 주인공 놈이 바로 이 자리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상황은 살짝 달랐겠지만 분명 여기서 디아나와 대련을 벌였을 것이고, 결국 패배는 했을테지만 주인공답게 '재능'을 보여 저 스승이라는 년의 관심을 사로잡았겠지.
그 다음에는?
스승과 제자 루트 타는 거지 뭐.
고로 저 년은 원래대로였다면 높은 확률로 주인공의 스승이 됐을 거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도 가져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주인공 놈이야 어디 던져놓던 기연을 넙죽넙죽 주워먹는 사기적인 종특을 가지고 있으니 가르쳐주는 이가 없더라고 알아서 잘 클 거다.
그에 비해 나는?
솔직히 나도 딱히 스승같은 건 필요 없었다.
이미 스스로가 창질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지 오래라고 자부하는 판국인데 무슨 스승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눈을 가늘게 뜬채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저 년이 창잡이였다면 생각 정도는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 년은 딱봐도 검밖에 쓸 줄 모르는 년이었다.
그런데 그런 년이 창잡이인 날 상대로 뭘 가르칠 수 있겠는가?
안 봐도 뻔하지.
최대한 실전에 가까운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씨부리면서 대련이나 줫나게 시킬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년의 제자라는 포지션이 탐이 나는 이유는..
그 줫나게 반복될 대련의 상대가 디아나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대련만큼 실수를 빙자해서 상대방의 몸을 터치하기에 좋은 상황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 새끼라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라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효과만 좋으면 장땡이지 뭐.
아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까?
분명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호감있는 남자의 살결이 자꾸만 몸 곳곳을 스치니 반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을테니까.
'그렇게 스킨십에 익숙해지도록 만든 다음에..'
훈련을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면 보다 농밀한 스킨십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순간 사실상 결정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좋아.'
어떻게든 들어가고 말 것이다.
저 년의 밑으로 말이다.
그러러면 저 년을 속여넘겨야 한다는 소린데..
일단 디아나와 대련을 했을 때 써먹었던 수법은 쓰면 안되겠지.
그건 상대가 디아나라서 통한 거니까.
하물며 저 년은 제 3자의 포지션에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지 않은가?
완벽하게 연기를 해보인다 한들 저 년의 눈에는 이상한 점이 눈에 띌 거다.
그렇다면?
'관심을 보일만한 정도의 실력은 보여주되..'
디아나의 실수라는 형태로 대련을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저 년의 어그로도 자연스럽게 나보다는 실수를 저지른 제자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니까.
"대련이야 못할 것도 없지만.. 여긴 제가 쓸만한 게 없어보이는데요?"
어떻게하면 디아나가 실수를 저지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 전에 일단 시간부터 끌었다.
그러자 뭐 그런 걱정을 하냐는 것처럼 피식하고 웃은 디아나의 스승이 연무장에 딸려있던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이나 창고같은 곳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내가 디아나와 대련을 했을 떄 쥐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사이즈의 봉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체구를 보니까 대충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면서 봉을 내쪽을 향해 휙 던지는데 엉겁결에 그것을 낚아채 확인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딱 맞았다.
'과연..'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정도는 있다 이건가?
거참 생각할 시간을 안 주는 구만.
"이, 이걸 써라."
내가 목봉만 달랑 들고 있던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잠깐 허둥지둥하던 디아나가 품 속에서 돌돌말린 천을 꺼내 날 향해 내밀었다.
사용감이 살짝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평소 훈련할 때 사용하는 물건인 모양.
맘같아서는 거기서 나는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고는 디아나가 건네준 것을 목봉의 표면에 칭칭 감았다.
"뭐해? 너도 준비해야지."
디아나같이 어여쁜 제자가 저토록 난감해하면 철회해줄만도 한데 디아나의 스승은 가차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했네.
거참 아직 상대방의 이름도 듣지 못했는데 오자마자 대련부터 하고 있다니.
예의라는 것이 실종되어버린 듯한 현장에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으니 스승의 재촉을 배겨내지 못한 디아나가 입술을 살짝 내민 채 입고 있던 제복 상의를 벗어던졌다.
'오우..'
기사부는 훈련이 곧 일상이자 수업이기 때문일까?
겉을 감싸주던 제복 상의가 사라지자 땀을 굉장히 잘 흡수해줄 것 같은 검은색 쫄티가 뿅하고 튀어나왔다.
피부에 쫙 달라붙은 채 디아나의 탄탄하기 그지없는 상체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보배롭기 그지없는 광경에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고 있자니..
디아나가 밑을 향해 손을 내리다 말고 그대로 멈칫했다.
그 상태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내쪽을 힐끔거리는 디아나의 위로..
"뭐야 치마입고 싸우려고? 그럴 거면 그냥 둘이 손잡고 춤이나 추지? 응?"
스승의 가차없는 재촉이 떨어져내렸다.
하늘같은 스승이 그러는데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살짝 입술을 깨문 디아나가 그대로 치마를 벗어던졌다.
'오오..!'
디아나의 하체를 덮고 있던 치마가 그녀의 손에 잡혀 휙하고 젖혀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
알고보니 치마 아래에 쇼트 타이즈를 입고 있더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 비쥬얼에 실망감이라는 놈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나쁘지 않은데?'
위에 입은 것과 세트로 추정되는 검은색 타이즈가 그녀의 허벅지에 찰싹 들러붙어 그곳을 꽈악하고 조이고 있는데 몸매가 원체 탄탄한 편이다 보니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제복을 벗어던지고 한결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거듭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입고 있는 제복이 불편하게 느껴져서..
스윽-
반사적으로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부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랬더니..
"자, 잠깐! 뭐하는 거냐!"
디아나가 기겁을 하며 나를 뜯어말렸다.
그와 함께 뒤쪽에서 들려온 아쉬워하는 감정이 듬뿍 담긴 쯧하는 소리에 디아나의 눈빛이 대번 사나워졌다.
그 상태로 그녀가 내 뒤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뭐, 왜."
그녀의 스승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뻔뻔했다.
꼬라보면 어쩔 거냐는 식으로 일관하니 제자된 입장에서 어쩌겠는가?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디아나였다.
다시금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당부했다.
불편한 건 이해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네? 안에 셔츠 입었는데.."
"그, 그래도 안 된다!"
하긴 그녀는 내 셔츠차림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도 아주 정신을 못 차렸었지.
그런만큼 그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게 자기 스승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스승이라도 여자는 여자니까.'
게다가 스승치고는 젊잖아.
앨리스만큼은 아니어도 내심 경계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약간의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대련 준비는 무사히 끝이 났고, 나와 디아나는 약간의 거리를 둔채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내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대련이니만큼 허투루 할 생각은 없다는 걸까.
날 향해 목검을 겨눈 디아나는 눈빛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로부터 실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하고.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번에 디아나와 대련을 하면서 알게된 것은 그녀는 기본기가 탄탄한 타입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타일도 기본적으로 지키면서 상대가 틈을 보일 때마다 역습을 가하는 수동적인 스타일이었고.
쉽게 말해 기술적인 실수는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거다.
그런 이가 실수를 하도록 만들려면?
테크닉보다는 다른 쪽을 공략해야 했다.
이를테면..
'그래 멘탈같은 부분을 말이지.'
마침 괜찮은 방법이 떠올라서 나는 디아나를 따라서 자세를 취하는 척 그녀를 향해 목봉의 끝을 겨눴다.
다만 저번과는 자세를 살짝 달리했다.
저번에는 약간 어설픈 느낌을 자세에 실었다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동안 훈련을 열심히 했나보군. 저번에 대련했을 때하고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어."
디아나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미끼를 물었다.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칭찬을 던지는 디아나의 행동에 나는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어 이유를 밝혔다.
내가 며칠 사이에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네, 앨리스 선배가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물론, 저 멀찌감치 물러난 디아나의 스승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디아나의 멘탈을 흔들어놓기에는 말이다.
꿈틀하고 경련하는 눈썹.
그렇게 디아나가 순간적인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내비친 순간.
"뭐해? 시작 안하고."
대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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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 시점****
저번에 대련했을 때와는 다르게 한결 가벼운 복장이라서 그런 걸까.
디아나는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싱숭생숭한 감정이 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이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살짝 민망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봐줬으면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 복잡한 감정 속에 퐁당 빠져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속으로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대련은 이안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대련이었다.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이안의 실력을 백퍼센트 이끌어낼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살짝 흐트러진 정신상태를 다잡은 순간, 마침 저쪽도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이안이 목봉의 끝부분을 이쪽을 향해 겨눠왔다.
그 순간 그녀는 창을 겨누고 선 이안의 자세가 저번에 대련했을 때와는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견고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여전히 살짝 어설픈 느낌이 있긴 했지만 고작 며칠만에 일어난 변화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밤낮으로 얼마나 노력했을까.
남자라서 연습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만큼은 그 노고를 알아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분명 기뻐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칭찬을 했던 것인데..
"네, 앨리스 선배가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돌아온 대답이 기껏 바로잡아 놓았던 멘탈을 있는 그대로 흔들어놓았다.
도와줬다고?
그 년이?
그 순간 디아나의 눈앞으로 떠오른 것은 대련을 빌미로 이안의 몸 곳곳에 손을 대는 파렴치녀의 모습이었다.
꼭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으로 훤히 그려지는 그 광경에 일그러지려 하는 얼굴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그 순간.
"뭐해? 시작 안하고."
대련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스승이 입이 닳도록 언제나 '침착'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던 이유를.
탁-!
"..어?"
"음..?"
너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하지만 딱 두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자신이 검을 놓친다는 검사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과..
"뭐하냐? 지금?"
그 어처구니 없는 실수에 스승이 크게 분노했다는 것.
귓가로 울려퍼진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디아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