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안 되겠다.'
존버도 좋지만 이러다가 아무고토 못하고 상장폐지되서 '나 홀로 특별부에'를 찍을 각이다.
그래서..
"선배."
"..응?"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사부 행정실로?"
앨리스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여태껏 뭔가를 기다리듯 잠자코만 있었던 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그게 의외였던 걸까.
앨리스의 눈이 살짝이지만 동그랗게 변했다.
"신청하려고?"
"해야죠.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그것 외에 내가 기사부 행정실을 찾을 이유가 또 있겠는가?
해서 고개를 끄덕이니 '흐음..'하고 살짝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앨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도서관을 빠져나와 기사부가 있는 서관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이안."
이걸 우연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했다고 봐야할지 모르겠지만 디아나와 딱 마주쳐버렸다.
날 찾아다니기라도 했는지 날 발견하자마자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던 디아나가 내 옆에 선 앨리스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것도 모자라 살짝 입술까지 깨무는데..
나와 같이 그 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한 앨리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원래는 귀찮게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디아나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요것 봐라?'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달까.
얼핏보면 지금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디아나를 상대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선배님?"
앨리스는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행동까지 선보였다.
무려 디아나를 상대로 먼저 말을 건 게 바로 그것이었다.
'우와..'
성격하고는 진짜..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매단 채로 디아나를 향해 말을 거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티나지 않게 짜게 식은 눈을 하고 있자니..
"마침 잘 됐군. 찾고 있었다."
디아나가 앨리스를 깔끔히 무시하며 날 향해 다가왔다.
찾고 있었다고 날?
왜?
요즘 설득하러 다닌다고 바쁜 거 아니었나?
의아한 마음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모처럼 먼저 말을 걸었는데 개무시를 당해버린 앨리스가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는 듯 나와 디아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런 앨리스의 행동이 디아나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뭐, 보나마나 날 못 넘겨준다는 선전포고 쯤으로 느껴졌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앨리스가 앞으로 나선 순간 눈에 불이 켜질 이유가 없으니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그에 비해 디아나의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앨리스 토르쟈. 비키도록."
그래서 더 오싹오싹한 뭔가가 있었고.
그렇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야 좀 아는 척을 해주시네요. 저는 또 대답을 안하시길래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투명마법이라도 익힌 줄 알았지 뭐에요."
"비키라고 했을텐데."
저렇게 뚝뚝 끊어서 음산하게 말하는데 안 무섭나?
확실히 그동안 공을 들인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순간적으로 흠칫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나려 하지 않는 걸 보면은 말이다.
"그 전에 데려가려고 하시는 이유부터 말씀해주시는 게 먼저 아닐까요?"
"..뭐?"
지금 제가 들은 걸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크게 뜨인 눈동자.
그 속에 담겨있는 건 기가 차다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거기에 대고 아예 기름을 퍼부었다.
그것도 콸콸콸.
"아니이, 지금 선배님 눈을 보니까 이대로 둘이 보내면 뭔가 터져도 터질 것 같아서 말이죠."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네가?
꼭 그런 말이 들린 것만 같았다.
디아나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어찌나 기가 차 하는지 앨리스의 평소 행실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대체 평소에 어떻게 지내길래 저 말 한 마디를 듣고 저렇게까지 기가 차 하는 걸까.
'땡땡이는 좀 치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가?
그렇게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멀뚱멀뚱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존심 강한 두 여자의 티키타카를 지켜보고 있으니..
"아니이, 그러니까 그 이유라는 걸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그래야 저도 좀 안심이 되지 않겠어요?"
저렇게 말하면서 살살 눈웃음을 쳐대는데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진짜 얄미웠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빨간색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욕망이 물씬 차오를 정도로.
뒤에서 본 나조차도 그렇게 느꼈을진데 그것에 직격당한 장본인은 어땠겠는가?
빠직하고 디아나의 이마 위로 핏줄이 솟아올랐다.
'와..'
저건 진짜 빡친 것 같은데.
하긴, 얄밉긴 하지.
아주 사람을 살살살살 긁어대는 게 어딜 긁어야 상대방의 이성을 날려버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달까.
"네가?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요약하자면 '너 이안이랑 무슨 사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냐.'쯤 되시겠다.
설마 디아나쯤 되는 이가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아무리 앨리스라도 예측하지 못했던 걸까.
여태껏 여유만만한 태도를 고수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앨리스는 동요를 내비췄다.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떨리는 몸.
뒤늦게 숨기기에는 너무나도 큰 반응이었고, 디아나는 그런 걸 그냥 흘려보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나. 앨리스 토르쟈."
"으음.. 친한 선배니까?"
재촉당해 내놓은 대답은 살짝 궁색했다.
그마저도 디아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 같았지만.
기껏 쥐고 있던 주도권을 이대로 빼앗길 순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앨리스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안을 데려가시려는 이유가 뭔데요?"
아니, 이 년 보소?
내가 그렇게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했을 때는 죽어도 안 부르더니 이걸 이 타이밍에 써먹는다고?
앨리스의 대응에 무릎을 탁 치던 것도 잠시, 구경은 이만하고 나서기로 했다.
더 내버려두면 곧 서로 칼 빼들고 치고받을 기세였으니까.
"지금 두 분.. 혹시 싸우시는 건가요?"
그래서 눈을 가늘게 뜬 채 둘 사이로 끼어드니..
"그, 그런 게 아니다!"
"아닌데?"
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내게 질투나 하는 '여자'답지 않게 치졸한 사람으로 보이긴 싫었던 모양.
그나저나 아니기는 무슨.
에라이 이 년들아 거짓말을 해도 먹힐 거짓말을 해야지.
금방이라도 칼 빼들고 칼춤이라도 출 기세였으면서 아니라고?
맘같아서는 둘다 꿀밤 한 대씩 먹여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서 참았다.
그리고는..
'자, 지금 나는..'
입을 열기 전에 스스로부터 세뇌했다.
지금 나는 내 기준으로 하면 이제 막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그래서 살짝 순수한 면이 있는 금발에다가 거유인 시골처녀라고.
'뭐야 그거. 개꼴리잖..'
아니 이게 아니지.
순간 든 잡생각을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척 고개를 가로저어 털어낸 뒤..
"선배님."
디아나를 바라보며 그녀를 불렀다.
내 딴에는 앨리스한테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나마 할 말이 있는 디아나를 먼저 불렀던 것인데..
둘에게는 그게 좀 다르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내 입에서 디아나를 향한 게 분명한 호칭이 튀어나온 순간 둘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으니까.
앨리스는 뭔가 못마땅한 것처럼 칫하고 작게 혀를 찬 반면 디아나는 살짝 불안에 젖어있던 표정이 확 펴졌다.
'누가보면..'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네 진짜로.
속으로 작게 툴툴대면서 디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함이었다.
"절 찾고 있다고 하셨었는데 찾으셨던 이유가 뭔가요?"
"아, 음.."
질문을 받고는 고민하던 것도 잠시 디아나가 제복에 감싸여있는 가슴을 살짝 펴보이며 날 찾았던 이유에 대해 밝혔다.
알고보니 디아나는 반대 입장에 선 학생들을 설득하고만 다닌 게 아니었다.
학생들을 설득하러 다니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반대가 극심하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내 입장을 두둔해줄 든든한 아군의 필요성을 느꼈고..
"내 스승님께 부탁드렸다."
그래서 그 스승이라는 사람이 누군데?
그런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다만 디아나가 그 스승이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한 순간 옆에 있던 앨리스의 눈이 살짝 커졌던 걸로 보아 일단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다고 짐작 정도만 했을 뿐.
"원래는 이런 문제에 개입하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었지만.."
디아나가 말하길 자기가 열심히 설득했단다.
다행히 그 스승이라는 사람도 남자인 내가 자기 제자인 디아나와 어느 정도 맞상대를 했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했고.
"아직 전과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 것까지 아는 건가?
하긴 지금도 이사장실 앞에서 시위하고 있을 이들과 같은 학생이긴 해도 디아나는 그들을 관리하는 위치니까.
전과 현황에 대해 알고 있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네가 무엇을 걱정해서 망설이는지 알고 있다. 분명 전과하게 될 경우 받게 될 견제와 텃세가 걱정인 거겠지."
아닌데..
그냥 주인공을 미끼로 쓸 수 있을 때까지 존버했던 것 뿐인데..
디아나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런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아무튼 그 스승이라는 사람이 뭐 어쨌다고?
"내 스승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텃세가 있긴 해도 네가 걱정하는 만큼은 분명 아닐 거다. 그러니까.."
지금 얼른 같이 가자는 말이겠지?
앨리스의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뒷말은 생략한 것 같았지만 날 향해 슬쩍 내밀어진 손을 보면 확실했다.
'흠..'
이거 어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은 느낌인데..
여기서 디아나가 내민 손을 잡는다면?
앨리스는 분명 토라질거다.
'게다가..'
디아나가 자기만 믿으면 다 괜찮아질거라는 식으로 말은 했지만 솔직히 난 부정적이었다.
그래, 그녀가 말한대로 그녀의 스승이라는 사람한테 인정을 받게된다고 치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숨겨놨던 걸 조금 더 꺼내들면 될테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된다고 정말 디아나가 말한대로 일이 흘러갈까?
'글쎄..'
난 아닐 것 같은데.
기사부 내에서도 명망 있는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면 학원의 조치를 등에 업고 뻔뻔스럽게 기사부로 밀고 들어온 놈이라는 인식이야 벗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딱 그게 전부일 거다.
디아나는 상황을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듯 했지만, 그거야 기준이 본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럴테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거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무턱대고 그렇게 생각했다간 큰 낭패를 보는 수가 있었다.
감히 조연주제에 내 잣대로 주인공이라는 놈들의 속내를 재단해보려고 했던 과거의 나처럼 말이다.
'인정을 받든 못 받든..'
날 인정하지 않는 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입학식날 학원을 강타했던 나와 디아나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빌미로 디아나가 제 연인인 날 띄우기 위해 제 스승까지 이용했다고 꿍시렁대는 년까지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서 디아나를 따라가는 건 딱히 의미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어떻게 한다.
잠깐 고민하다가..
"알겠어요. 따라갈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디아나의 얼굴 위로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반대로 앨리스의 표정은 아까 내가 디아나를 불렀을 때보다 조금 더 안 좋아졌고.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는 둘의 모습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대신 행정실부터 들렸다 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싸리 다같이 움직이자.
그 옛날 황희라는 양반마냥 '네 말도 옳고, 쟤 말도 옳다.'를 시전하니 둘의 반응이 다시 한 번 나뉘었다.
앨리스가 살짝 안도하는 느낌이라면 디아나는 뭐랄까 분해하는 얼굴?
그렇게 상반된 표정을 한 둘을 양옆에 낀채 기사부 건물이 있는 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있으니 시선이 엄청 몰리더라.
심지어 서관에 가까워질수록 쏟아지는 시선의 농도는 한층 더 짙어졌다.
아무래도 둘다 부 내에서 꽤나 유명인사인 모양.
물론, 날 힐끔거리며 수근대는 이들도 꽤 있었다.
개중에 몇몇은 부정적인 시선을 굳이 숨기려들지 않았고.
다만 의아한 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덜 한데?'
반대파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이사장실 쪽에 빠져 있어서 그런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진?"
"이안?"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과 신청서를 받는 기사부 행정실.
그곳에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며칠동안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을 선보여가며 내 애간장을 활활 태우셨던 장본인께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