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솔직히 말하자면 학원이 '소란'스러워 질거라는 앨리스의 말은 애교 수준이었다.
이사장과 교장이 기습적으로 발표한 조치 때문에 학원이 말 그대로 난리가 났으니까.
'와! 역시 이사장 님! 학원의 채고존엄! 학원을 완죤히 뒤집어 놓으셨다!'
는 그럴 리 없지.
이사장이 교장과 짝짜꿍을 해서 그런 조치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입학식 날 단상 위로 뛰쳐올라온 레이시아에게 속절없이 밀려나던 이사장의 모습이었다.
이 나라 대빵인 왕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유력한 왕위계승권자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후보에 불과한 레이시아에게도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던 년이 뭐?
뭘 해?
믿을 걸 믿으라고 해야지.
게다가 그떄 봤던 이사장은 뭐랄까..
꼰대라는 단어를 꾹꾹 뭉쳐서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꼰대들의 특징이 있다면?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급격한 변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조치를 취한다고?
머리가 있다면 그로인해 엄청난 저항에 시달리게 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을텐데?
'차라리..'
주인공 놈이 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말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을까?
고로 지금 학원을 뒤집어놓은 이 조치는 절대 이사장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
제 본의가 아님에도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겠지.
그렇다는 건 그녀보다 더 윗선에서 시킨 일이라는 소린데..
이사장의 윗선이라고 해봐야 애초에 한 곳뿐이다.
왕실.
고로 지금 이 조치는 왕실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의 입을 빌려 발표한 건 말할 것도 없이 그녀를 희생양으로 내세우기 위함일 것이고.
그럼 교장은 뭐냐고?
그야 뻔하지.
한 명한테만 몰아주면 너무 심하게 두들겨맞을 가능성이 크니 어그로 분산용이겠지 뭐.
둘을 한데 묶어놓으면 겸사겸사 교수 및 강사들을 대표하는 교장과 이사진들을 대표하는 이사장이 서로 대화 끝에 그러한 합의를 도출해낸 거라는 느낌도 줄 수 있을테고 말이다.
'뭐 약점같은 거라도 잡혔나?'
왠지 모르게 천사님이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채 이사장을 겁박하는 모습이 눈앞으로 떠올랐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추측을 이어나갈 정보가 부족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앨리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냐는 것 정도?
대체 정체가 뭘까?
전도유망한 정보상인이라도 되나?
그런가 보지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발표로인해 학원이 개판 오분 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남학생들의 전과에 관한 조치가 학원을 휩쓴 이후 학생들은 크게 두 패로 나뉘어졌다.
그 중 한 쪽은 말할 것도 없이 찬성파였다.
가관인 것은 그들이 찬성을 외치는 이유였다.
-남자들이 우리 부로 올 수 있다고? 그럼 남자들하고 같이 수업 들을 수 있다는 거잖아? 헉헉 남자다! 남자!
놀랍게도 찬성을 부르짖는 이들 중 대부분이 저 이유 때문에 찬성을 외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도 그럴 것이 어딜가도 같이 수업을 듣게될 남학생들과 친해져볼 생각으로 가득 찬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뇌에 좆박은 놈들도 아니고..'
아니 이 경우에는 자궁인가?
아무튼 한창 여자와 야한 것에 미쳐있을 남고 소속 남고생들 앞에서 '우리 학교 올해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뀜!'을 외쳐도 저정도까지 불타오르진 않을 거다.
그렇다는 건 대체 얼마나 남자한테 미쳐있다는 걸까.
물론,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지 평등한 기회라던지 남자라는 이유로 묻히는 인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찬성을 외치는 이들의 수도 제법 됐다.
그럼 반대하고 나선 년들은 뭐냐고?
뭐겠는가?
"기사부는 학원의 통보에 가까운 일방적인 조치에 반대한다!"
"반대한다! 반대한다!"
"학원은 각 부의 전통을 존중하라!"
"존중하라! 존중하라!"
저것들이 반역도당..
아니 반대파였다.
다르게 말하면 기사부와 그 외 찌끄레기들이라고 해야할까.
그랬다.
학원의 그러한 조치에 반대하고 나선 건 기사부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성욕을 이긴 케이스라고 해야할까.
그녀들은 자신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입성하는데 성공한 성역이 별다른 노력조차 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침범당하는 걸 용납치 못했다.
그런 이들이 중심이 되고 그 외에 남녀차별주의자라던지 여성우월주의자같은 요상한 사상을 가진 년들이 뭉쳐 이사장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며칠째 열심히 시위를 해대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있는 이곳에서도 훤히 보이는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참 멍청하기 짝이없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러한 조치가 논의되고 있는 와중이었다면?
저래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이미 시행키로 결정이 나버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저렇게 대놓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라..
학원 측에서도 저항이 이 이상 격렬해지는 건 원치 않을테니 저걸 가지고 대놓고 패널티를 주거나 그러진 않을 거다. 그래버리면 사태가 정말 겉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번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다만..'
기록으로는 남겨두겠지.
그리고 그 기록 한 줄이 나중에 저기 모여있는 이들의 앞길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본인들도 알게되지 않을까?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제 미래를 국밥 한 그릇 때리듯 후루룩 말아먹어버렸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다행인 것은 저 무리 속에 내가 아는 얼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앨리스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디아나는 애초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녀는 단순히 찬성만 하는 게 아니었다.
반대를 외치는 이들을 설득하고자 꽤나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지를 말이다.
'학원 측에서 언급한 조치가 그대로 시행된다면?'
남성들은 다른 부로 전과할 때 시험을 치룰 필요가 없다.
그 말인 즉슨?
내 전과 준비를 돕겠다면서 앨리스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을 명분도 사라진다는 소리였고.
그래서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디아나를..
나는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내게 나쁠 건 없을 것 같았으니까.
남학생들의 전과를 찬성하는 쪽에 선 학생들의 수가 늘어난다면?
기사부로 넘어갔을 때 느낄 차별과 텃세도 줄어든다는 소리니 말이다.
'나야 땡큐지.'
텃세만큼 쓸데없으면서도 귀찮은 게 또 없으니까.
꼬추 새끼들이 부리는 텃세도 그랬는데 집요한 구석이 있는 여자들의 텃세는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귀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왔다.
그렇게 디아나가 내 옆에서 앨리스를 떼어내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는 주로 앨리스를 찾아다녔다.
학원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앨리스만큼 좋은 대화 상대가 또 없었으니까.
겸사겸사 디아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기 위함도 있었고.
"선~배~"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딜가도 존재하는 소란을 피해 도망친 것일까.
오늘도 도서관 구석탱이에 짱박혀있는 앨리스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 그녀를 향해 다가서니..
내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앨리스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그리고는 날 보자마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또또 인상 쓰신다."
그렇게 생겨난 골을 마사지를 하듯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야말로 아차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스킨십에 앨리스의 표정이 멍하게 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자꾸 인상쓰면 여기에 주름진다니까요."
그리 되면 참 속상할 것 같다는 뜻으로 살짝 입꼬리를 늘어뜨리니 앨리스의 입꼬리가 작게 움찔거렸다.
본인은 나름대로 그걸 숨기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방금 살짝 웃었죠?"
감히 누굴 속이려고.
다 들켰다는 뜻으로 히죽하고 웃으며 곧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순간적으로 살짝 얼굴이 빨개진 앨리스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뭔 소리야."
부끄러워 하기는.
다 안다는 뜻으로 피식 웃으니 앨리스가 살짝 눈을 흘겼다.
이 화제가 지속되어봐야 계속 내게 놀림만 당할 뿐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깨우친 것일까.
"그래서 뭔데."
그녀가 말 돌리기를 시도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수였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동안 많이 놀리긴 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놀리는 족족 귀여운 반응이 튀어나오는데 그 진귀한 모습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해서 그녀의 옆 자리에 앉으며..
"전과 신청 현황은 어때요? 어제하고 비하면 좀 달라졌어요?"
전에도 던진 적이 있는 질문을 또다시 그녀를 향해 던졌다.
앨리스는 내가 왜 그런 데에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똑같아. 행정하고 경영쪽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과학 쪽도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늘고 있고."
내가 궁금해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텐데도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나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대화를 주고받고 싶어서?
하여간에 귀엽다니까.
"기사부는요?"
그렇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해서 곧바로 그녀가 빠뜨린 것에 대해 언급하니 앨리스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
"말했잖아. 똑같다고."
슬며시 서운함을 내비치면서도 대답만큼은 착실하게 하는 앨리스였다.
똑같다라.
그렇다는 건 여전히 기사부에 전과신청서를 제출한 남학생의 수가 0명이라는 거다.
그랬다.
남학생들을 쭉쭉 빨이들이고 있는 다른 부들과는 다르게 기사부는 조치가 발표되기 전과 같은 인원수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제일 반대가 극심한 곳이니까."
다른 부라고 무조건 찬성만 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위까지 벌여가면서 반대의사를 표한 것은 기사부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남학생이 미쳤다고 거길 들어가려 하겠는가?
들어가봤자 무슨 꼴을 당할지 뻔한데 말이다.
'학생들만 반대하면 다행이지..'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학원에서 까라면 까야할 교수들의 여론도 좋지 않단다.
그러니 더더욱 지원자가 없을 수밖에 없지.
아무리 그래도 마감을 하루 남긴 오늘까지도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아마 그 사실을 놓고 기사부 쪽에서도 은근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한 명이라도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건 차원이 다르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기사부가 끼리끼리 작당해서 학원 측의 의사에 반한 것처럼 비춰질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 사실을 기사부에 소속된 교수들이라고 모르지 않을테니 아마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남학생들을 설득하고 다니자니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의 눈치가 보일 것이고 말이다.
'쯧쯧.. 안됐구만 안됐어.'
지금쯤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를 내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기사부 소속 교수들을 향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던 것도 잠시, 티나지 않게 입 안쪽의 살을 짓씹었다.
'아직도 지원을 안 했단 말이지..'
내가 앨리스에게 자꾸만 같은 것을 물어본 이유는 간단했다.
0명에 머물러있는 기사부 전과 신청자가 1명으로 바뀌는 걸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며칠 째 소식이 없었다.
마감을 고작 하루 남긴 지금까지도 말이다.
'대체..'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걸까?
기사부로의 전과를 노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 페이크였나?
아니면 생각외로 기사부에 소속된 이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지레 겁을 집어먹고 쫄아버리기라도 했다던지..
'그러면 곤란한데..'
기사부로 전과를 신청한 첫 남학생이라는 영광은 반드시 주인공의 것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어그로가 모조리 그쪽으로 쏠릴테니까.
'쓸데없는 견제는 사양이란 말이지..'
자고로 시련이란 주인공의 것 아니겠는가?
디아나가 암만 열심히 설득하고 다닌다 한들 모든 이가 돌아서지는 않을 거다.
지금 이사장실 앞에서 열심히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반대 입장에 남을 것이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감당하는 건 오롯이 전과한 남학생들의 몫이 되겠지.
그렇다면 가장 극심한 견제에 시달리는 건 누가 될까.
그건 당연히 첫빠따의 몫이 될 것이다.
원래 첫 타자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래서 놈이 신청하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따라붙어서 놈의 존재감에 묻어가보려고 존버하고 있던 거였는데..
이러다가 신청 기간이 끝나버리게 생겼다.
'이 놈 이거 설마..'
고새 마음을 바꿔서 다른 부에 신청서를 낸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