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가 디아나를 발견하는 게 살짝 늦었던 건 머릿속이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트를 마무리할 때 앨리스가 지나가듯 던졌던 한 마디.
-조만간 학원이 시끄러워질거야.
내가 선물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검은색 나이프 시스를 만지작대며 내뱉은 그 한 마디가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췌 짐작이 가질 않았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지?'
그냥 한 말같지는 않았다.
일단 나와 그녀의 관계부터가 내 전과를 위한 협력관계니까.
쓸데없거나 관계없는 말이었다면 굳이 꺼내지도 않았을 터.
그렇기에 한 마디가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기사부로의 전과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과연 기분 탓일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앨리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탓에 앞은 보고 있었지만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 날 상념 속에서 끄집어낸 건..
"..이안."
어딘가 이를 악문 듯한 디아나의 목소리였다.
내가 기숙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빨갛게 변한 눈.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디아나가 나와 앨리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걸.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디아나의 얼굴은 뭐랄까..
친구한테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웃으면서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여자친구 자취방까지 뛰어온 '남자'같았으니까.
'설마..'
울었나?
아니, 그래서 빨개진 느낌은 아니었다.
뭣보다 디아나가 우는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기도 했고.
그보다는..
'흥분? 분노?'
아마 둘 중 하나 때문이겠지.
혹은 둘다거나.
흥분과 분노라.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대응은 정해져있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
"선배님..?"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 채 그녀의 부름에 답을 했다.
꼭 마치 그녀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질문이었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니.
이미 다 알고있을텐데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 대체 뭘까.
'마조히스트야 뭐야?'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나한테 직접 듣는 게 더 뼈아플텐데 말이다.
"네? 저요? 저야 학원 밖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학원 밖에? 혼자서 다녀왔나?"
내 말을 끊으며 그런 질문이 날아든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얘가 지금 날 시험하고 있는 거구나.'하고.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야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아뇨..? 앨리스 선배가 안내해주신다고 하셔서 그 분이랑 같이 다녀왔는데.."
물론, 목소리를 살짝 죽여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서야 디아나의 상태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를 선보였지만..
디아나는 그런 내 태도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보다는 다른 데에 꽂힌 듯한 느낌이랄까.
"앨리스.. 그래 앨리스라고 부른단 말이지.."
얼핏 들으면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 말을 중얼거리는데..
소름끼치기 보단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히로인 후보 중 한 명이 내게 집착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기껍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러지만 저런 걸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런 상태에 빠진 히로인을 방치했던 주인공 놈이 폭주한 히로인한테 된통 당하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봤었으니까.
그런 꼴을 다 봐놓고서는 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게 스스로가 학습능력이 없는 머저리라고 증명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문제는..'
디아나의 상태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살짝 더 심각해보인다는 것 정도?
아무래도 그동안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날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수습은 해야하니까..
"선배님..? 혹시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척 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물론, 이번에도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앨리스하고는 어쩌다가 동행하게 된 거지?"
"아, 그게.."
말을 내뱉기 전에 앨리스한테 속으로 짧게 빌었다.
그녀한테 화살을 떠넘기는 날 부디 용서해달라고.
그리고는..
"도와주신다고 하셨거든요."
볼을 긁적거리며 시원하게 떠넘기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디아나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꼴을 볼 수 있었다.
"도와준다니?"
뭘?
꼭 그리 묻는 듯한 태도였고, 그렇게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전과요."
그러자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하는 게..
나름 귀여웠다.
아마 그녀의 표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 뿔 싸!'
쯤 되지 않을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까 질투심 유발작전을 쓸 거면 제대로 하던가 왜 어설프게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디아나가 내 앞에서 날 긁지만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진 할 생각이 없었다.
고로 지금 이 상황은 순전히 디아나가 쌓은 업보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의 여기사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하려나?
기대감으로 두근두근대는 가슴을 느끼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내게 부탁해도 됐을텐데."
그렇게 말하길래 미리 준비해놓은 말로 받아쳤다.
"네? 그렇지만.. 선배님은 진을 도와주기로 하셨던 거 아니었나요?"
그리 말하면서 '원래는 너한테 부탁할 생각이었다.'라는 뉘앙스를 살짝 풍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깨달았으리라.
자기가 진의 부탁을 승낙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어때?'
가슴 가운데가 짜르르 울리고 양심이 막 쿡쿡 쑤시고 그러려나?
남의 속을 어떻게 알겠냐만은 확실한 건 디아나가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후회에 젖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치졸해지기 마련이다.
"그, 그렇지만 앨리스는 너를.."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디아나는 어떻게든 앨리스의 흠을 잡으려고 했다.
무려 그때 골목에서 있었던 일까지 언급하려는 듯한 태도까지 선보이면서 말이다.
"저도 그 점이 살짝 마음에 걸리긴 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의외로 괜찮으신 분 같더라구요. 궁금한 것도 잘 답변해주시고."
그래서 그렇게 받아쳤더니 디아나의 얼굴 위로 고구마를 한 번에 백개쯤 쳐먹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표정이냐고?
글쎄..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직전인 표정?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앨리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하지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꼭 마치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사자가 도사리고 있는 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앨리스를 더 깎아내린다거나 그러지는 못했다.
아마 방금 내 발언으로 인해 알아차린 걸거다.
지금 여기서 앨리스를 더 깎아내려봐야 내게 반감만 살 가능성이 크다는 걸.
내게 반감을 사게 된다면?
앨리스를 도와주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디아나로서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을 터.
그렇게 앨리스를 깎아내려 내쪽에서 먼저 앨리스와의 협력을 포기하도록 만든다는 방법마저도 막혀버린 디아나가 더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두커니 길을 막고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살짝 피곤한 척 지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그런 내 표정이 디아나에게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 표정을 확인한 순간 입술을 살짝 깨문걸 보면 뭔가를 상상한 것 같긴 하지만.
"아, 아니다. 그럼 쉬도록."
"네에, 선배님도 들어가세요."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비켜선 디아나의 곁을 지나쳐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문 채 떠나가는 멀어져가는 내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는 디아나의 모습을 말이다.
앞쪽에 있는 창문 위로 어렴풋하게 비치는 그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뭐 깜깜한 밤이나 밤을 건너뛰고 아침에 기숙사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낮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 것이니만큼 아직까진 불안하긴 해도 그로 인해 절박해진다거나 그 정도는 아닐테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가려나..'
앨리스에게 괜히 그런 걸 선물해준 게 아니다.
이왕 선물을 할 거라면 평소에도 사용할만한, 그 중에서도 눈에 확 띄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검은색 나이프 시스는 그런 내 기준에 딱 부합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마지막에 봤을 때 그걸 꽤나 마음에 들어했던 만큼 앨리스는 어지간하면 그걸 착용하고 다닐 것이다.
그건 훈련같은 걸 할 때도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는 건?
언젠가는 디아나가 그게 디아나의 눈에도 띄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점찍어둔 남자를 데리고 학원 밖으로 외출했던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가 들고 나온 처음보는 물건.
거기에 그걸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한 앨리스의 태도까지.
디아나라도 어렵지 않게 그게 내가 선물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고..
'그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지겠지.'
그 날카로움이 공격성으로 변해 원인인 앨리스를 향해 표출되기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을 거다.
그렇게 디아나가 자신을 상대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앨리스라고 과연 가만히 있을까?
딱봐도 악바리같은 삶을 살아온 그녀인데?
그녀도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을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나가 자신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나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보일 터.
그럼 나는?
적절한 타이밍이 올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둘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나를 향한 둘의 욕망또한 그에 맞춰서 몸집을 불릴테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쯤되면 자존심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배경도 뒷배도 든든한 디아나에 비해 앨리스는 그쪽이 살짝 부실해보인다는 점이었다.
가문도 가문이지만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인 1왕녀의 신임까지 듬뿍 받는 게 바로 디아나다.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앨리스를 찍어누르려 한다면?
앨리스로서는 상당히 곤란해지겠지.
그러다가 GG치고 날 포기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당분간 앨리스 위주로 케어를 좀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았다.
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높아질수록 앨리스는 나라는 존재를 쉽게 놓지 못할테니까.
그녀가 상대의 체급에 질려 지레 포기하지 않게 만들려면?
보다 단단하게 붙들어둬야 할 터.
그런 생각을 하며 방으로 기어들어가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아직 잠을 청하기엔 좀 많이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모처럼 마음 편히 먹기도 했고, 꽤 돌아다닌 탓에 몸이 제법 노곤노곤했으니까.
아, 물론 문은 당연히 잠궈놓았다.
그렇게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생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디아나가 디아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든 쓸데없는 조언을 해준 것으로 추정되는 장본인의 얼굴을 말이다.
길게 늘어뜨린 백금발.
자애로우면서도 살짝 퇴폐미를 풍기는 얼굴.
레이시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어떻게 그녀인지 확신하냐고?
그야 그녀 뿐이니까.
디아나의 주변에서 그런 식의 조언을 해줄 수 있을만한 위치와 계기를 가진 인물은 그녀밖에 없었다.
디아나의 옆에 서 있던 날 경계하던 모습도 그렇고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그리 득이 되지 않을 말을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것도 그렇고..
'역시..'
내 안에서 한 가지 확신이 굳어지는 동안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기계적으로 학원에서 정해준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전날 앨리스가 지나가듯 던졌던 말의 의미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학원이 난리가 났으니까.
이사장과 학원장의 날인이 동시에 찍힌 채 내걸린 공지 하나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것 참..'
주인공이 엮인 일이니만큼 어떻게든 될거라고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이야.
학원에서 내건 공지.
그것은 한 가지 조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조치란..
-오늘부로 남학생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부로 전과할 수 있다.
남학생들의 앞에 다른 부로 향하는 길이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