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런 세계라서 별로인 점이 있다면?
어딜 가던 시선이 따라붙는 탓에 뭔가를 몰래 하는 게 극히 어렵다는 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딱히 상관없엇다.
아니, 오히려 많은 이가 봐줄수록 좋았다.
그러려고 일부러 약속 장소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학원 장문으로 잡은 것 아니었던가?
그렇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 약속 장소인 정문을 향해 나아가니 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문 옆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말이다.
날 기다리고 있는 티를 내기라도 하면 누군가한테 지기라도 하는 걸까.
기껏 약속장소까지 나와놓고서는 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에 속으로 피식하고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누가봐도 내 목적이 앨리스임을 알 수 있도록 방향을 정확히 그녀쪽으로 잡고서 다가가니..
날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주변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심해지기 시작했다.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는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쐐기를 박아넣듯..
"앨리스 선배!"
앨리스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그녀의 앞까지 쪼르르 달려가 섰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상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나와 앨리스가 만났다는 사실은 곧 소문으로 변해 학원을 휩쓸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테니까.
'이거이거..'
오늘 밤에 당장 쳐들어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왠지 모르게 씩씩거리면서 내 방으로 뛰쳐들어오는 디아나의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려 했다.
그렇지만 차마 앨리스의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그걸 꾹 눌러서 참으면서..
"일찍 나오셨네요?"
앨리스에게 말을 붙였다.
"..음."
설마 내가 진짜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치 않고 있었던 걸까.
앨리스의 반응이 살짝 뜨뜻미지근 했다.
이게 진짜인지 뭔지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
모든 일이 번갯불이 콩 볶아먹듯 빠르게 이루어지다보니 이게 뭔가 싶은가 보다.
하긴 이렇게 남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몇 번 겪어보지 못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긴 하겠지만.
"점심은 드셨어요?"
그 말에 앨리스가 입을 열어 답을 내놓기도 전에 그녀의 배가 대답을 대신했다.
꼬르르륵-
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길래 저렇게 우렁찬 소리가 터져나오는 걸까.
뭐라 리액션을 하기도 애매해서 물끄러미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없이 어색하게 변해버린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나도 아직 식사 전이라는 거였다.
"음.. 일단 밥부터 먹죠."
그래서 일단 그것부터 해결할 생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끄니 졸지에 내게 손이 잡혀버린 앨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모양.
스킨십의 효과는 확실했다.
앨리스를 꼼짝 못하게 만든 건 물론 웅성거림이 아까보다 더 커졌으니까.
둘이 어디 가려는 것처럼 학원 정문에서 만나는 것도 모자라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잡고 이끈다?
그 모습이 두 눈 부릅뜨고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을 여자들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을지야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리고 뻔한만큼 순식간에 와전되어 디아나의 귀에 들어가겠지.
소문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아마 외출을 끝내고 학원에 돌아올 쯔음에는..
내가 디아나를 두고 앨리스와 떡을 쳤다는 느낌으로다가 소문이 돌고 있지 않을까?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어하며 내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던 앨리스가 정신을 차리고는 잡혀있던 손을 뺴냈다.
그런 그녀가 한 마디 하기 전에..
그녀에게 길안내를 떠맡겼다.
"음, 혹시 괜찮은 곳 아는데 있으세요? 아시다시피 전 수도가 처음이라.."
"그런 것 치고는 잘만 돌아다니던 것 같던데."
설마 디아나가 붙여준 사용인과 돌아다녔던 때를 말하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아무래도 아직 내 진의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나같아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모르는 척 눈치채지 못한 척을 싱긋 웃으며 앨리스를 재촉했다.
"끙.."
결국 내 재촉을 배겨내지 못한 앨리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앨리스를 따라 움직이니 눈앞으로 등장한 건..
"여기에요?"
현실로 따지면 기사식당쯤 되지 않을까 싶은 비쥬얼의 식당이었다.
살짝 허름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식당의 외관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이건 앨리스 나름의 테스트라는 걸.
아마 내가 이 세계의 평범한 남자들과 같았다면?
저런 게 튀어나온 시점에서 화를 내며 돌아가는 걸 택했거나 하다못해 실망한 기색이라도 얼굴 위로 내비췄을 것이다.
현실로 따지면 여자가 첫 데이트랍시고 잔뜩 기대감을 품고 나갔는데 남자 쪽에서 기사식당으로 안내한 꼴이니까.
실망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
그렇지만 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아직까지 전생에 먹은 군바리 물이 덜 빠진 건지 겉멋만 번지르르한 곳에서 식사를 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편한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래서 학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상당히 고역이었다.
누가봐도 날 평가하고자하는 목적이 다분하게 느껴지는 시선이 식당 곳곳에서 날아와 푹푹 꽂히는 게 훤히 느껴지는데 어떻게 식사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체할 뻔했다.
내가 밥을 먹는 중인지 아니면 식사예절을 평가받는 중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서 적응이 되면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좀..
오늘 점심을 거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식당 밥이 암만 맛있으면 뭘하겠는가?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체하기 딱 좋은 분위기인데.
그렇기에 나는 앨리스가 안내한 곳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얼른 들어가죠."
오히려 먼저 내쪽에서 안으로 들어갈 걸 재촉하니 그게 의외였던지 앨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등을 떠밀다시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기 보단 점심시간을 살짝 빗겨난 시간대라서 그런 걸까.
식당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리고 허름해보이던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여긴 뭐가 맛있어요?"
적당히 비어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며 자연스레 맞은 편에 앉게된 앨리스를 향해 그리 묻고 있으니..
"음? 또 오셨네요."
식당 주인인지 아니면 점원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 중년 아저씨가 앨리스를 상대로 아는 척을 해왔다.
시발 서빙하는 사람이 앞치마 차림을 한 중년의 아저씨라니.
말세로다.
말투가 나긋나긋해서 더 빡쳤다.
'그나저나..'
주인 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올 정도라면 꽤 단골이라는 소린데..
어디 우리 두 번째 히로인 후보의 미각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실까?
"옆에 분은.."
"..후배입니다."
"아하.."
아하는 무슨.
우리 둘을 보며 히죽히죽대는 꼴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가 뻔히 보이는데 말이다.
디아나네 집사도 그렇고 눈앞의 아조씨도 그렇고 이 세계의 나이 지긋하신 양반들은 왜 젊은이들만 보면 커플각을 못재서 난리인 걸까.
'이건 뭐 죄다 우결충도 아니고..'
뭐라 말하기도 애매해서 방긋방긋 미소만 짓고 있으니 그런 내 미소를 조금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아조씨의 얼굴 위에 맺혀있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 낯간지러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걸까.
앨리스가 순식간에 주문을 끝마쳤다.
애초에 메뉴 자체가 몇 개 되질 않아서 고를 것도 없긴 했지만.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특별히 신경 좀 써달라고 주방 쪽에 말하고 올테니까."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아저씨가 참 주책이었다.
그런데 넉살도 좋아가지고 말릴 수도 없달까.
대체 무슨 말을 해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방에 말을 해주겠다더니 몇 걸음 움직이는 동안 싹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옆옆 테이블을 지키고 있던 아줌마들과 자연스레 수다를 떨어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래서.."
식당에 들어온 이후 날 상대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앨리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응?"
"말씀드렸잖아요? 도움을 받고 싶다고."
무엇에 대한 도움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헌데 생각외로 앨리스는 기사부로의 전과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자기가 도운다고 한들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냐면서 쏘아붙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오히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으음..'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그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는 느낌?
그 태도를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뭔가를, 그러니까 남학생들의 전과와 관련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뭐지?'
대체 뭘 알고 있길래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된다면서 부정했을 그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는 걸까.
뭐, 그건 지금부터 알아내면 되겠지.
오늘 하루 그녀와 지내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알아낼 기회가 올테니 말이다.
"아니, 도와달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 도와주면 되는 지 말을 해달라고요?"
"그래, 뭐 대련같은 거라도 해주면 되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천천히 생각해보자구요.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은 일종의 선금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하루동안 즐기면서 내게 뭘 줄 수 있는 지 고민해봐라.
그런 뉘앙스로 그리 내뱉으니 앨리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 선금만 받고 입 싹 씻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먹튀라.
애초에 그 가능성에 대해 먼저 언급한 시점에서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한 꼴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안 그러실 거잖아요?"
대신 살짝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더니 티나지 않게 내 반응을 살피고 있던 앨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입꼬리가 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내 발언을 굉장히 흥미롭게 여기는 느낌?
그렇지만 그걸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앨리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눈빛만으로 물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야..
"재밌어하시고 계시잖아요?"
내가 본 앨리스는 흥미본위의 인간 그 자체였으니까.
그 말은 내가 그녀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이상은 그녀 쪽에서 먼저 날 놓을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소리였고.
그래서 그대로 내뱉어봤는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입꼬리를 통제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그것을 마음껏 풀어놓는 걸 보면 말이다.
'이것 봐라?'
그런 느낌으로 한쪽 입꼬리만 살짝 말아올린 채 살살 웃고 있는 그녀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있으니..
"자아, 잠시만 실례할게요~"
아까 주문했던 것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음식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학원 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이 정도면 별 다섯 개 만점 기준으로 네 개 정도는 될만한 수준이었으니까.
앨리스가 왜 여기 단골이 되었는지 알만도 하달까.
특히나 수프가 괜찮았다.
이안의 기억 속에 있는 수프들은 하나같이 남는 재료들을 모조리 때려부어서 만든 잡탕들 뿐이었는데 여기 스프는 국물도 뻑뻑하고 건더기도 내장을 쓴 것이긴 해도 큼직큼직하고 잡내도 딱히 나지 않는 것이 꽤나 신경써서 우려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시발..'
국밥 생각나네.
뭘로 스프 육수를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먹다보니 유사 갈비탕 느낌이 나서 자꾸만 국밥이 마려워졌다.
살코기를 숭덩숭덩 썰어넣은 국밥에다가 밥 조금 말아서 푹푹 떠먹다가 잘 익은 깍두기 한입 베어먹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뭐, 언젠가는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어떻게해서든 우량주를 잡아야하는 거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까.
국밥의 재현?
까짓 거 돈 때려부어서 요리사들을 고용한 다음에 박박 갈아넣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졌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본 세 명의 히로인 후보 중에서 몇 명이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중에 한 명이라도 잡아서 평생 놀고먹는 이상적인 기둥서방의 삶을 살고야 말겠노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이걸로 참아야 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내 앞에 놓인 스프를 퍽퍽 떠먹고 있으니..
그게 또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생전 처음보는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의 시선이 얼굴로 푹푹 날아와 꽂히는 걸 느끼면서 나는 속으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호감을 느끼는 타입도 많으니까.
하물며 앨리스는 이곳 단골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은 그녀가 이곳의 음식을 좋아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내가 자신처럼 이곳의 음식을 마음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없던 호감도 생기지 않을까?
원래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취향,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먹었다.
게걸스럽게 보이지는 않도록 세심하게 조절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