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솔직히 좀 놀랐다.
나름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발뒤꿈치까지 들어올린 채 살금살금 움직였는데 설마 이게 들킬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으니까.
그래서 뒷꿈치를 들고 다가가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멈춰있으니..
막 잠에서 깨어나서 그런지 살짝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한 모습을 선보였던 앨리스의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졌다.
그 일련의 변화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평소에는 제 본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걸.
"..뭐야."
그나저나 막 잠에서 깨어나서 그런 걸까.
저번에 들었을 때보다 한결 허스키해진 앨리스의 목소리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저런 목소리로 신음성을 내지르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그러한 속내를 꾹꾹 눌러담아 숨기면서 앨리스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루만이네요? 선배?"
"..끄응."
"어떻게 생각은 좀 해보셨나요?"
그러자 돌아온 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바로 어제 제안을 해놓고선 바로 오늘 물으러 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고 그리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른바 할많하않의 표정을 하고 있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상대방이 웃고 있으면?
거기다 대고 대놓고 독설을 날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지간히 독하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여긴 또 어떻게 찾은 거야."
그래서일까?
앨리스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가 건넨 제안에 대해 아직 제대로된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걸.
"생각 안해보셨구나."
해서 곧장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앨리스가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것도 잠시..
"그.. 소문이 돌던데."
"소문이요?"
소문이라고 해봐야 짚히는 건 하나 뿐이었다.
분명 나와 디아나에 관한 것이겠지.
이 타이밍에 하필이면 그런 걸 꺼내드는 건 이미 디아나라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동아줄이 있으면서 자기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역으로 물어봤다.
"그래서 싫어요?"
그래서 싫냐고.
그 물음에 앨리스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귀엽게 입술만 삐죽거린 게 전부일뿐.
나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나, 앨리스파임을 자칭하는 존재가 열렬히 부르짖었다.
??? : 앨리스 코인 떡상 가즈아ㅏㅏㅏㅏㅏ 님덜 빨리 풀매수 땡기세욧!!!!!!
떡상은 개뿔.
그래도 아직까지는 앨리스보다는 디아나였다.
레이시아야 뭐, 신분도 그렇고 존재 자체가 워낙 넘사벽으로 치니 논외라 보는 게 맞고.
"아무튼 싫지는 않으시다 이거죠?"
그것도 앨리스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거참 생긴 건 이 남자 저 남자 다 후리면서 침대 위의 여왕으로 군림할 것처럼 생겨놓고서는..
당혹스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런 풋풋한 마음은 처음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영 얼굴값을 못하는 앨리스를 보며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야 그녀가 그런 식으로 허둥지둥해서 나쁠 게 하등 없었으니까.
상대가 제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내가 원하는대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앨리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역할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맡을 수 없는,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역할이었다.
'분명 둘이 안면이 있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때 디아나가 앨리스를 대하던 태도는 누가봐도 선도부장 쯤 되는 위치에 있는 선배가 불량학생을 대하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불량학생'과 어울려 다니다는 사실이 디아나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과연 디아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역시 믿기 힘드셔서 그런 거죠?"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좀 손해인 느낌은 없잖아 있지만.. 선금 치룬다 치죠 뭐."
이 세계의 평범한 남자들이라면 감히 입에 담지조차 못했을 제안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거기에 상대 입장에서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미소까지 조미료마냥 곁들이니..
"무, 뭐?"
돌아온 건 색기 넘치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대체 뭘 상상한 건지 머리칼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 모습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세요? 그냥 간단한 데이트 말한 건데."
"읏.."
"대체 무슨 상상을 하셨길래 그렇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신 걸까나.."
말꼬리를 잡아서 쭉 늘어뜨리니 이제서야 내가 자길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앨리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대고 쐐기를 박았다.
"날짜는 보자.. 내일은 바쁠 것 같고, 모레는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능하시겠어요?"
"..마음대로 해."
끝까지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구만.
눈앞에서 흔들리는 장난감에 혹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바닥에 몸을 붙인 채 최선을 다해 도도한 척을 하고 있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앨리스의 모습에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답이 살짝 애매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그녀를 찾아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앨리스를 두고 자리를 뜨기 전에..
"아, 맞다."
돌아서다 말고 막 생각났다는 것처럼 다시 앨리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내 왼쪽 볼을 툭툭 두들기면서..
"여기 침 묻었어요."
그러니까 아까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얼굴이 붉어지더라.
그 상태로 허둥지둥하며 쪽팔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앨리스를 바라보다가..
"뻥인데."
그리 내뱉으니 정신없이 움직이던 앨리스의 움직임이 우뚝 정지했다.
"너.."
이크, 장난은 여기까지하고 이만 튀어야할 것 같았다.
"아무튼 모레에 점심 식사시간 끝나고 학원 정문에서 뵈어요!"
그래서 즉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이렇게 급하게 날라버릴 줄 몰랐다는듯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앨리스를 뒤로 한채 말이다.
그렇게 앨리스와 데이트 약속을 잡고 나서는 딱히 특별한 일같은 건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학원 측에서 잡아둔 일정을 소화하다가 식당에서 밥 먹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서 잔 게 전부였으니까.
아, 물론 침대에 들기 전에 디아나가 당부한대로 방문을 꼭꼭 걸어잠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테스트 삼아 한 번 열어놔보고 싶긴 했지만 첫날부터 그래버리면 나중에 곤란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그렇게 기숙사에서의 첫 날이 딱 한 가지 사건을 제외하면 별 탈없이 지나가고, 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두 번째 날이 도래했다.
두 번째 날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빡빡했다.
대부분이 쓸데없게 느껴지는 절차였다는 게 살짝 흠이긴 했지만.
바쁘긴 바쁜데 실속이 없달까.
그렇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선 때로는 비효율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유지되어야만하는 절차같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
'산은 산이요 강은 강이로다..'
오리엔테이션이라면서 대체 뭘 이리도 길게 떠들어대는 것인지.
입학식날 봤던 이사장도 그렇고 여기 선생들은 말을 길게 해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종특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그 와중에 또 딴짓하는 놈들은 어찌나 잘잡아내는지 졸려도 졸 수가 없었다.
졸리다가 걸리는 족족 어제 입학식을 무사히 끝마친 대가로 들어온 포인트가 훅훅 깎여나가는데 어떻게 졸 수가 있겠는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렇게 개같이 졸린 수업을 하필이면 점심시간 바로 뒤에 배치해놓은 학원 측의 저의가 뭘지 생각해보고 있자니..
척-!
"뭔가요? 거기 앉아있는 학생."
주인공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나마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주인공 놈을 향해 몰려들었다.
사람 발을 향해 몰려드는 닥터피쉬마냥 몰려드는 그 시선에 부담스러움을 느낄 만도 하건만 주인공 놈은 꿋꿋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질문드릴게 있습니다."
"뭐죠?"
"특별부가 아닌 다른 부로 전과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 절차가 궁금합니다."
전과.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강사의 목소리 외에는 조용하던 강의실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경우 입학한 시점에서 얄짤없이 모두 특별부 소속이니까.
예외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졸업할 때까지 달라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방금 주인공 놈의 발언은 그러한 학원의 상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야..'
역시 주인공이라고 해야할까.
앞뒤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그 저돌성만큼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성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 무슨 의도로 저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 것 같긴 했지만.
'여론을 만들어보시겠다?'
재밌네.
아무래도 이번 주인공 놈은 꽤 재미있는 타입인 것 같았다.
설마 벌써부터 정치질을 시도하려고 들 줄이야.
그 의도가 빤히 보이는 놈의 행동에 피식피식 웃고 있으니 질문을 받은 강사의 입에서 끄응하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그녀도 눈치챈 거겠지.
방금 그 발언으로 인해 꽤 골치 아픈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 여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정면돌파 혹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 소관이 아니라 답변드리기가 어렵네요. 학원 측에 정식으로 문의해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문제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 뿐이겠지.
그래 저렇게 말이다.
나름 젊어보이는 나이에 괜히 이만한 단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강사는 침음성을 흘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를 시전했다.
누가보면 진짜로 모른다고 착각하기 충분할 정도로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모를 리가 없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미꾸라지마냥 쏙 빠져나가 버리는 강사를 보며 슬며시 입술을 깨무는 주인공 놈을 보며 속으로 끌끌하고 혀를 찼다.
'어설프네 어설퍼.'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아직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나였다면 접근법을 살짝 달리했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자체를 주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것말고 더 궁금한 게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아직 설명해야할 게 많아서요."
결국 다른 남학생들을 끌어들여 교수, 아니 학원과 한판 붙어서 전과라는 전리품을 따내려 했던 주인공 놈의 시도는 놈의 판정패로 끝이 났다.
그동안 주인공이라는 놈들에게 하도 당한 게 많아서 그런지 날 괴롭게 만들었던 놈들하고 다른 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주인공이라는 놈이 시원하게 물을 먹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좀 고소하긴 했다.
잘 볶아진 아몬드를 한움큼 우적우적 씹어먹은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것과는 별개로 결말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남학생들의 여론이 그쪽으로 몰리면 오히려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내게 나쁠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아 사태를 관망했던 건 득보다는 실이 더 클 것 같았기에 그런 것이었고.
만에 하나 학원 측에서 전과를 허락할 경우 그것을 심사하는 이가 누구겠는가?
특별한 사건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기사부의 교수들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교수를 곤란하게 만들어 악감정을 산다?
떨어뜨려 달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다.
담당하고 있는 부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결국 같은 학원 소속이니만큼 교수들 사이에 왕래가 없을 리 없으니까.
지금 단상 위에 서 있는 저 여교수가 기사부 교수들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몇 마디 속삭이기만 해도 심사에서 대체 몇 점을 깎이고 시작하게 될지 솔직히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거들지 않은 거였다.
예전같았다면?
주인공 놈이 제 무덤을 파는 꼴을 보며 어떻게든 막아보거나 하다못해 거기 같이 들어가기라도 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의리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놈은 주인공이니만큼 어떤 식으로든 제가 원하는 것을 성취해낼 것이다.
다만 시작부터 꼬여버린만큼 상당한 피를 봐야겠지만은 말이다.
놈이 굳이 피를 보겠다면?
'응, 볼거면 너 혼자 봐~'
그동안 나는 뒤에서 꿀이나 빨고 있지 뭐.
그러다가 일단 주인공 놈이 주인공 버프로다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고 나면?
그때 주인공 놈의 등에 업혀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