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짜치인가?'
등장 타이밍이 너무 완벽해서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까 부회장이라고 불렸던 여자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닌 듯 했지만.
"자자, 그만."
등장이 워낙 화려했던 덕분일까.
레이시아는 어렵지 않게 운동장 내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쏟아지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거의 한순간에 멈춰버린 게 그 증거였다.
"다들 힘들지? 계속 서있느라고?"
그 물음에 누군가 외쳤다.
'아닙니다!'라고.
거기서 왠지 모르게 짬내가 느껴진 건 과연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라니까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계속 이러고 서 있을 수는 없잖아?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짧게 끝내겠다면서 도열해 있는 신입생들을 쭈욱 둘러보는 레이시아의 행동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 위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보통 저런 식으로 밑밥을 깔면 말과는 다르게 빨리 끝날 리 없다는 사실을 이 놈들은 모르는 걸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일단 보는 맛부터가 남달랐으니까.
게다가 목소리도 매력적이다보니 아까 이사장이라는 년이 나와서 일장연설을 할 때와는 집중도가 차원이 달랐다.
물론 이것도 한순간이긴 할테지만.
다행히 레이시아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했다.
말했던 것처럼 이 자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만같아 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겸사겸사 주인공의 반응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궁금했으니까.
누가봐도 아름다운 레이시아의 모습을 목도한 놈의 표정이 어떨지가 말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레이시아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놈의 모습을 말이다.
역시 궁극에 달한 미는 취향을 타지 않는 걸까.
살짝 입까지 벌린 채 감탄하고 있는 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꼭 마치 주인공 놈한테 저 아름다운 여자를 빼앗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물론, 그런 일이 당장 가능할 리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신분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니까.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나름의 업적을 쌓아올린 후라면 모를까 그냥 좀 생긴 학생 1에 불과한 지금은 이렇다할 접점을 만드는 것조차 힘들 터.
그렇기에 불안함으로 일렁거리는 마음을 어렵지 않게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신입생들을 위한 레이시아의 연설도 어느새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설명은 이만하면 충분히 한 것 같고, 다들 학원에 입학한 걸 축하한다."
여기서 배워가는 것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도움이 될테니 학원에 있는 동안 학업에 힘쓰라는 다소 상투적인 말로 연설을 끝마친 그녀가 신입생들의 대열 앞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을 향해 바톤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봤다.
이제 제 역할은 끝났다는 듯 단상 밑으로 내려간 레이시아가 자길 향해 걸어오는 부회장을 피하기 위해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치는 모습을 말이다.
어쩜 여기 히로인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귀여운 걸까.
보는 눈이 있다보니 냅다 튀지는 못하고 꽃게마냥 옆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검거되어 버리고 만 레이시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목하라는 우렁한 외침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과 예비 히로인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두껍기 그지없는 붉은 실의 존재를 생각하면 앨리스나 디아나 중에 한 명이 우리 줄의 안내역이지 않을까 했지만, 안타깝게도 디아나는 다른 줄 담당이었다.
앨리스는 아예 모습 자체가 보이질 않았고.
그래서 혹시나 네 번째 히로인 후보일까 싶어 안내역을 자처하고 나선 여자를 바라봤지만..
'음..'
아무래도 저쪽은 해당이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마운틴 고릴라같은 몸을 가진 여자가 히로인일리 없으니까.
'그나저나 시발..'
쥰내게 쳐다보네.
꽉꽉 들어찬 근육을 보면 아무래도 기사부 소속인 것 같은데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을 보니 아랫배에 위치한 제 2의 뇌가 큥큥 떨리기라도 하는 걸까.
본인은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해보려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욕망이라는 게 얼굴에 묻어나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변에 있는 꼬추 놈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주인공 놈?
의외로 별 반응 없더라.
꼭 마치 저 년하고 엮일 일 자체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자긴 주인공이라서 저런 엑스트라하고는 관계 없다 이거지..
덤덤하게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주인공 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입매를 비틀고 있으니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을 견디다 못한 고릴라녀가 헛기침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딱히 별거 없었다.
갓 입대한 훈련병마냥 앞으로 학원 내에서 사용하게될 이런저런 물건들을 받고, 꼭 알아둬야할 시설같은 곳을 안내받다가 기숙사 방을 배정받기 위해 그쪽으로 향한 게 전부니까.
아, 마지막은 살짝 기부니가 이상하긴 했다.
방 배정을 받기 위해 고릴라녀가 시킨대로 한 줄로 도열해 있는데..
기존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계시던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을 해대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에는 선배로서 기숙사에 새로 입사하게된 후배들을 반겨주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빛 부터가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것이라기 보다는 많고 많은 메뉴들 중에서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는 듯한 눈빛이었으니까.
"쟤 귀엽다."
"쟤는 어때? 쟤도 괜찮은 것 같은데.."
심지어는 그런 말을 대놓고 떠들어대는데..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이 여자라는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유를 말이다.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는데 대놓고 음담패설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심지어 그 당사자가 된 건 난생처음이라 기분이 뭐랄까 굉장히 이상했다.
그렇게 선배들 눈에는 귀여워 보이고, 내 눈에는 쓸데없이 덩치값 못하는 놈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 놈들이 쏟아지는 시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쪼그라드는 사이, 나는 주인공과 함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느그들은 떠들어라~ 나는 내 알아 할테니.'라는 자세로 일관하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싸그리 무시하고 있는 주인공 놈과는 다르게 나는 그것들을 살짝 의식하는 모습을 연기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알게된 사실 중 하나는..
"쟤 진짜 괜찮다. 몸이 무슨.."
"아서라. 쟨 이미 앨런이 찍었다더라."
"앨런? 설마 그 디아나 앨런?"
"그럼 다른 앨런도 있냐. 아무튼 입학식 전에 둘이서 학원을 걸어다녔다는데.."
"에이 뭐야.. 그럼 텄네 텄어. 쯧,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놈이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소문의 전파 속도가 빠르다는 것 정도?
나와 디아나의 관계에 대해 듣고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하고 다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소리를 낸 장본인의 얼굴이 무지하게 궁금해졌지만..
참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신입생들을 품평하기 바쁜 나름 선배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안 데일."
"넵!"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 차례가 도래했다.
그래서 앞으로 한 학기동안 신세를 지게될 방의 모습은 과연 어떨지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308호라는 명패가 박힌 문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 바로 다음으로 주인공 놈이 호출되었다.
그리고 내 바로 옆방을 배정받더라.
그 현장을 목도한 순간 나는 문을 향해 다가가던 것도 잊고 주인공이 옆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오, 시발..'
역시 주인공과 조연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인 걸까.
하필이면 옆방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기껏 주인공 놈 쪽을 향해있던 디아나의 관심을 내쪽으로 돌려놨는데 말이다.
이렇게 딱 붙어서 생활하게 되면 혹시라도 디아나가 날 찾아왔다가 주인공 놈도 같이 목격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래선 안 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마음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주인공 놈은 최대한 예비 히로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놈에게로 향할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내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옆방이라니!
내가 주인공 옆방이라니!
이래버리면 아까 잠깐 기숙사에 들렸을 때 들었던 커플마냥 기숙사에서 떡 치는 것도 힘들텐데..
지금이라도 방을 바꿔달라고 해야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지금의 나는 말하자면 갓 자대에 배치된 이등병이다.
그런데 그 이등병이 배정받은 관물대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꿔달라 하면 과연 순순히 바꿔줄까?
나 같아도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를 외칠 것 같은데?
'하..'
결국 당분간은 이대로 지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주인공 놈과 반 강제로 일상을 공유하게된 현실에 속으로 포옥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날 더 환장하게 만드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 이안."
아까 끌고갔던 신입생들의 안내는 진작에 끝마친 것일까.
살짝 수줍어하는 목소리와 함께 디아나가 내 앞으로 짠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공 놈이 아직 방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아니..'
저 놈은 기껏 방을 배정받았는데 왜 안 들어가고 입구에서 쳐 뻐기고 있는 걸까.
어?
방을 배정받았으면 말이야 안으로 들어가서 가구도 좀 확인해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썩 좋지 않은 타이밍에 찾아온 디아나를 탓해야할지 아니면 쓸데없이 방문 앞에서 뻐기고 있는 주인공 놈을 탓해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날 향해 다가오는 디아나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세요. 선배?"
둘다 아는 얼굴이다보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주인공 놈의 시선이 나와 디아나 사이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이제와서 디아나한테 관심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디아나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시길래 저런 표정인걸까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 깜빡하고 알려주지 않은 게 있어서 말이다."
알려주지 않은 거라니?
이제 학원에 대해 어지간한 건 다 들은 것 같은데?
궁금한 마음에 그게 뭘까 싶어 맞은 편에 선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니..
"그.."
어쩐 일인지 그녀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알려주지 않은 게 대체 뭐길래 얼굴이 저렇게까지 빨개지는 걸까.
몬가..
몬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디아나가 간신히 말을 이어붙였다.
"바, 밤에 말이다."
"밤에요?"
"그, 그러니까 잘때 말이다. 문을 꼭.. 잠구고 자도록."
저렇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놓고서는 기껏 하는 말이 고작 문단속에 대한 당부라니.
문을 잠구지 않으면 뭐?
여학생들이 날 덮치기 위해 몰래 숨어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여기가 뭐 치안 안 좋은 동네의 여관도 아니고 명색이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딸린 기숙사인데?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의 눈속에 묘한 결의가 깃들어있는 걸 보니 내가 확답을 주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원하는대로 답을 해주고 나니 디아나가 그럼 실례했다면서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가려 했다.
그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주인공 놈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선배님."
나와 디아나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앞으로 나서는 주인공 놈의 행동에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아까 느꼈던 불안감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로 디아나한테 관심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이제와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놈의 말은 내 바람을 가볍게 즈려밟았다.
설마 저번에 골목에서 만난 게 전부인 상대에게 부탁을 받게 될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살짝 놀란 듯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탁?"
"네, 실은.."
그리고 이어진 것은 주인공 놈의 주절거림이었다.
자기가 기사부로의 전과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혹시 그 준비를 도와줄 수 있냐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던져진 주인공의 물음에 디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나지?"
"그야.. 기사부에 소속되신 분중에서 안면이 있는 분이라고는 선배님이 유일하니까요."
"으음.."
제법 간절해보이는 주인공 놈의 표정을 보고 침음성을 흘리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불안감으로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는 의외로 이런 돌직구적인 부탁에 약했으니까.
사람이 원체 착하다보니 남이 부탁해오는 걸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침음성을 흘린 디아나가 이내 내쪽을 힐끔대기 시작했다.
명백히 날 신경쓰는 듯한 그 모습에 그나마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디아나는 이미 나라는 우량주에 풀배팅을 하고자 결심을 한 상태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 입장을 뒤집는 듯한 행동을 한다?
기본적으로 올곧은 편인 그녀가 그럴 리 없었다.
그건 날 배신하는 거나 다름없는..
"나도 일정이라는 게 있어서 오래 도와주진 못할텐데."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아니, 시발 잠깐만.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