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체 누구길래 디아나를 저렇게 친근한 느낌으로 부르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서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천사가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잘못을 포용해줄 것만 같은 자애로운 인상에 길게 뻗은 생머리.
살짝 아래로 처진 눈꼬리와 그 밑에 작게 찍힌 눈물점은 자칫 자애로움 원툴이 될 수도 있었던 인상에 퇴폐미라는 자극적인 맛을 한 꼬집 추가해주고 있었다.
압권인 건 천사 씨의 몸매였다.
역시 천사라고 해야할까.
빨면 젖과 꿀이 나올 것만 같은 거대한 흉기가 제복차림의 가슴팍을 팽팽하게 당겨주고 있었다.
'시발..'
저거 저러다가 단추가 발사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압도적인 흉부였다.
'완전 상체팀이네 이거.'
터질 듯한 존재감을 발하는 미드에 비하면 바텀은 살짝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균형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바텀까지 압도적이었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확실한 건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천사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세 번째 히로인 후보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녀일 거라고.
'진짜 누구지.'
대체 누구길래 저리도 아름다운 걸까.
속으로 의문이 폭주하는 걸 느끼고 있으니..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란 듯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디아나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천사를 향해 부복했다.
그 몸짓을 본 순간 직감했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쥰내게 높은 사람인 건 확실하다고.
그렇다면?
기어야지.
자고로 암만 능력이 좋아도 높은 사람한테 찍혀서 좋을 건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건 주인공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지가 주인공이랍시고 '자쉰'이 넘쳐서 높은 사람을 상대로 깝쳤다가 힘들게 구르는 꼴을 몇 번이나 봐왔으니까.
주인공이라 해도 그럴진데 조연 찌끄레기에 불과한 나라면?
찍히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해서 즉시 디아나를 따라 천사에서 여신으로 격상된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으니..
"왕녀님, 여긴 어쩐 일로.."
스스로의 판단을 칭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이 디아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왕녀!'
천사의 정체에 대해 들은 순간 긴가민가하던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왕녀라면 히로인 후보를 꼽을 때 늘 빠지지 않는 왕도와도 같은 존재니까.
중국집으로 따지면 짜장면급이지.
하물며 여자가 왕위를 잇는 게 보통인 이 세계라면?
왕녀라는 존재의 가치는 더 뛸 수밖에 없다.
하물며..
'둘 중 어느 쪽이지?'
이 왕국처럼 계승권을 가진 왕녀라고 해봐야 두 명뿐인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천사는 아무래도 둘 중에 장성한 쪽인 것 같았다.
내게 주입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나이가 어린 쪽은 이제 갓 어린아이를 벗어난 나이라고 들었는데 저 발육은 그런 꼬맹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역시 왕족, 로열 패밀리라고 해야할까.
정체를 알고 나서 다시 보니 저 압도적인 미모가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좋은 유전자를 몰빵해서 이식받은 결과겠지.
애초에 학원을 운영하는 주체도 왕실이고, 학생들을 평가하는 주체도 왕실이다.
그렇기에 학원 내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좋은 '씨앗'들은 자연스럽게 왕국 내에서도 최상위층에 위치한 왕족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몇 대가 넘도록 반복되었다고 생각해봐라.
유전자 레벨에서부터 달라질 수밖에.
그나저나 그렇게 높으신 양반께서 디아나는 대체 왜 부른 걸까?
설마 둘이 친한가?
만약 그런 거라면 디아나에게 점수를 좀 더 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왕실에서도 그녀의 뛰어남을 알고 있다는 뜻이고, 그 말은 즉 출세가 보장되었다는 소리니까.
출세길이 보장되었다는 건 그녀에게 부양받게 될 내 삶이 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소리고.
마음 속으로 저 압도적인 미드는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부터 시작해서 디아나와의 관계는 어찌 되는 것일까까지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자니 천사님의 고운 음성이 다시 한 번 귀를 간지럽혔다.
"일어나세요. 경. 학원에서는 신분의 격차는 무의미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만.."
"회장님이라 부르기 싫다면 이름도 괜찮습니다. 한 번 불러보세요. 레.이.시.아 선배라고."
일어나자마자 왕녀와 만담아닌 만담을 하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나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이 만담이지 천사님이 디아나를 일방적으로 놀리는 듯한 느낌이 강했지만.
'왠지 즐기는 것 같은데..'
아무튼 덕분에 다시 한 번 천사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얼굴을 말이다.
'미쳤네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 있는 걸까.
몇 대동안 행해진 유전자 개량 작업이 뽑아낸 최상의 결과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줄곧 디아나 쪽을 향해있던 천사님의 시선이 내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천사, 아니 레이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물음에 디아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질문을 받자마자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렸으니까.
대체 그 질문 어디에 그렇게 부끄러워할 포인트가 있었던 걸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신호라 여기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 이번에 학원에 입학하는 신입생입니다. 어쩌다보니 제가 보호하게 되어서.."
"그랬군요. 흐으음.."
아니, 천사님 왜 그렇게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시는 겁니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억울할 따름이었지만..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관계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친밀하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설마..?
천사님 당신 Hoxy..?
영 심상치 않은 반응에 살짝 불경한 상상까지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이쯤에서 나서야할 것 같아서 즉시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왕녀님. 이안 데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끝?
그래요가 끝이라고?
놀랍게도 그랬다.
더 물어볼만도 한데 내게 줄 관심은 딱 거기까지가 전부라는 듯 꾹 다문 입을 꿈쩍도 하지 않더라.
그렇기에 아까했던 불경한 상상을 다시 한 번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런데 왕녀.."
"흐으음?"
"레, 레이시아님 입학식 준비는 어떻게하시고 여기에.."
저저 시선 피하는 꼴좀 보라지.
어쩐지 아까 처음 등장했을 때 어디서 급하게 도망치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살짝 헐떡이더라니만..
안 봐도 뻔했다.
분명 도망친 거겠지.
준비하는 게 귀찮아서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말이다.
디아나도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레이시아의 도주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레이시아가 등장한 이후로 줄곧 쪼그라들어 있던 디아나의 눈초리에 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회장님.."
"그, 그렇지만.. 귀, 귀찮단 말이야!"
저게 학생회장이자 왕녀인 사람이 할 소리일까.
주변에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책임감은 엿바꿔 먹은 듯한 레이시아의 외침에 디아나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물론 나도.
'마망 계열인줄 알았는데..'
저렇게 자애롭고 퇴폐미 넘치는 얼굴에다가 모성이 흘러넘칠 것 같은 모습을 해놓고서는 말괄량이 계열이라고?
몬가..
-???:이건 아니야!!!!!!!!!!
뭔가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다고 내 안의 무언가가 끔찍한 절규를 내뱉었다.
생각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 레이시아의 실제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사이 전도유망한 기사에 의한 도주범의 체포는 착착 종료 수순을 밟고 있었다.
"가시죠."
"히이잉.."
내심 상상했던 모성 넘치는 모습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긴 하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귀엽게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면서 시무룩하니 어깨를 늘어뜨리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파괴력이 엄청났다.
나도 모르게 달래주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고 해야할까.
'그나저나..'
아무래도 둘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친밀한 모양인데..
단순한 선후배 관계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끈끈한, 둘만 공유하고 있는 뭔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진짜 가야해..?"
"가셔야죠. 학생회 분들은 얼마나 당황하셨겠습니까."
"맨날 몰래 빠져나와서 이제 딱히 그렇지도 않을 텐데.."
"..."
졸지에 도망친 곳까지 제 발로 앞장을 서게 된 레이시아가 소심하게 설득을 시도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리고 디아나를 뒤에 매단 채 가기싫은 학원을 향해 끌려가는 꼬맹이마냥 걸음을 옮기던 레이시아는 척봐도 잔소리가 엄청 많을 것 같은 깐깐해보이는 인상의 미녀에게 넘겨졌다.
"협조에 늘 감사드립니다. 디아나 님."
"부회장님도 매번 고생이 많으시네요."
레이시아를 사이에 둔채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과연 기분 탓일까.
그렇게 레이시아가 부회장이라는 여자에게 잡혀서 사라지고, 그 후에 디아나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관계를 말이다.
알고보니 둘은 소꿉친구 비슷한 관계였다.
왕녀가 어렸을 때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치게 된 디아나의 어머니, 그러니까 예비 장모님께서 둘을 서로에게 소개시켰고 그 인연이 쭉 이어져서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
"조금.. 짖궃으신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시다. 또 굉장히 뛰어나시기도 하고."
조금 짖궃은 게 아닌 것 같던데.
날 빌미로 디아나를 몰아붙일 때 레이시아가 보여주었던 눈빛은 분명 즐기는 자의 그것이었으니까.
정작 디아나 본인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음..'
말해줘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킵해두기로 했다.
어쩌면 그게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으니까.
그렇게 제 소꿉친구이자 미래의 상관이 될지도 모르는 이의 변호에 열을 올리면서도 디아나는 날 안내한다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여기는 식당이다. 매일마다 메뉴가 달라지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주문할 수 있지."
"무료입니까?"
메뉴판 옆에 가격이 적혀있질 않길래 그리 물었더니 디아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단 무료는 아니라는 걸.
'하긴..'
이것도 다 세금일텐데 예산이 썩어나는 것도 아니고 아무 대가 없이 밥을 주겠는가.
"어떨 것 같나?"
"학원 내에서만 쓰는 화폐같은 게 있는 겁니까?"
놀랍게도 그렇단다.
"아마 입학식이 끝나면 받게 되겠지만.."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 거라며 디아나가 입고 있던 제복 상의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오우야..'
안으로 파고들어간 손에 떠밀린 봉긋한 언덕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티나지 않게 흘깃거리고 있자니 그 사이에서 얇은 패같은 것이 목걸이 줄에 꿰인 채 튀어나왓다.
"이건 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해주는 일종의 신분증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걸 여기에 가져다 대면.."
디아나가 손에 들고 있던 패를 메뉴판 쪽에 가져다 댄 순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그 위로 일련의 숫자가 떠올랐다.
2633.
아마도 저게 학원 내에서만 쓰이는 재화이자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점이겠지.
'꽤 본격적인데?'
못해도 천 명은 될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일일히 평가하고 급을 나누나 했더니만..
설마 이런 수단이 있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2633점이면 높은 걸까 낮은 걸까.
디아나가 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 낮은 점수는 아닌 듯 했지만 살짝 애매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앨리스와 레이시아의 점수도 궁금해졌다.
둘은 과연 몇 점일까?
앨리스는 왠지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줄 것 같긴 한데..
레이시아 쪽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디아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쪽에 대한 경계심이 장난 아니니까.
"식사는 기본적으로 한 끼당 1점이고, 넌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이라 해당이 없겠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착실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2학기부터는 무려 기숙사비도 지불해야 한단다.
그나마 남자는 여자가 내야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싸긴 하다는데..
"같은 건물에서 지낸다고요? 남녀가?"
"그래."
아니, 무슨 그런 천국같은 곳이..
얼마나 많은 일이 그곳에서 이루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