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3)화 (13/366)



〈 1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만 가봐야할 것 같네요."


슬슬 그래야할 것 같았다.


디아나네 사용인이 날 찾기위해 골목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니까.


디아나가 사용인한테 오늘 있었던 일을 캐물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그럼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해서 앨리스를 뒤로 한채 막 골목으로 들어선 디아나네 사용인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얘 이름이 그러니까...


'에이미였나?'


"이안님!"

이안님이라니.

날 발견하고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에이미를 보며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날 디아나의 예비 신랑으로 보고 있는  집사 뿐만이 아닌 듯 했으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피차 같은 평민인데 님자까지 붙여가며 부를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위험하게 이런 곳은 왜.."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내 안위를 살피던 것도 잠시,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던 앨리스를 발견한 에이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 꼭 나와 앨리스의 관계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분은.."


앨리스의 정체가 궁금했던 걸까.


차마 본인 앞에서 뭐하는 년인지 대놓고 묻기엔 좀 그랬는지 에이미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내게 답변을 요구해왔다.

그래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저 뒷골목에서 한가닥할 것처럼 생긴 년은 느그 주인하고 같은 학원 소속에다가 같은  소속이라고.

"학원에 대해 궁금한 게 있었거든요. 마침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서.."


물어보려고 따라나섰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거기까지 말하니 에이미의 눈 속에 깃들어있던 경계심이 한층 옅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에이, 바로 요앞인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말을 들은 에이미가 할 말이  많아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물어봐서 놀라셨을텐데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상한 억측을 사는  피하기 위해 내뱉었던 변명을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골목 안에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달라진 내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걸까.

아주 잠깐이지만 앨리스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래, 도움이 됐다니까 다행이네."

그대로 앨리스가 퇴장하고, 나는 에이미를 따라 디아나네 저택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이로써 히로인 각이 보이는  여자 모두에게 한 발씩 걸쳐놓은 셈인가?

이틀도 안 되는 시간동안 참 부지런히 움직이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엔딩을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구를 때에 비하면 힘든 축에도 들지 않았지만.

디아나한테도 앨리스한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으니 생각 정리가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올 것이다.

 전까지 내가 해야할 일은..

'일단은 입학식 준비인가?'


보통 입학식이라고 하면 몸만 덜렁 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와 주인공 놈이 입학을 앞둔 학원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안의 기억에 따르면 거긴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니까.


학원은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평가해 등급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일거수일투족 중에는 입학식에 참여하는 자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평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로 최대한 단정한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어디보자..'


이안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메고 있었던 행낭을 풀어헤쳐 그 안을 뒤져보니 입학 통지서와 함께 배달되었던 학원의 제복이 곱게 접힌 채  반겨주었다.


여행 중에 망가지거나 하지 않도록 깔끔한 천으로다가 꼼꼼하게 감싸놓긴 했지만, 행낭 크기가 원체 작다보니 군데군데 주름이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이대로 입고 입학식에 참여한다면?

첫 평가부터 바닥을  거다.

고로 형편없이 구겨져있는 이것부터 어떻게 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보자..'

전기 다리미가..

있을 리 없지.

다리미 역할을 해주는 물건은 있을테지만, 그게 뭔질 모르다보니 그냥 내 식대로 하기로 했다.

 다리미로만 다림질을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주전자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주전자 말입니까?"


집사에게 가서 물으니 그건   찾는 지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빌려달라니 일단 빌려주긴 하더라.


그렇게 빌린 주전자에 물을 넣고 팔팔 끓인 뒤에 옷 위에 대고 꾹 눌렀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잡고서 그대로 슥슥 문지르니 손을 움직일 때마다 구겨진 부분이 깔끔하게 변했다.


'제복은 각이 생명이지.'


그리고 전회차를 군인으로 실컷 구른 덕분에 내 각잡는 스킬은 극에 달해 있었다.

오죽하면 옆에서 내가 하는  지켜보고 있던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표할 정도였다.

"굉장히 능숙하시군요."


그럼, 능숙할 수밖에.

마지막에는 총사령관으로 끝났지만,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있을 수는 없듯 나도 처음에는 짬찌끄레기였다.

당연히 잡일도 엄청했다.


개중에 제일 많이 했던 게 빨래였고.

그렇다보니 다른  몰라도 빨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집사 양반의 눈에는 집안일에 능숙한, 준비된 예비 신랑처럼 비춰졌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흐뭇한 눈빛이 한층 더 흐뭇하게 변하는데..

이번에도 굳이 오해를 바로잡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내일 있을 입학식 준비에 열중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갔고..


"오늘 맞나? 입학식이?"

"네."

정신차리고 보니 입학식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침부터 찾아온 디아나의 초대에 응해 그녀와 얼굴을 맞댄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저택에서 신세를 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보니 특별히 더 신경을 쓴 것일까.

아침인데도 메뉴가 제법 화려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베이컨에 아스파라거스, 거기에 겉면을 바삭하게 그을린 잉글리쉬 머핀을 닮은 빵에다가 수란, 거기에 살짝 감귤향을 풍기는 샛노란 소스까지.

'오우 쉣..'


나중에 디아나와 잘 안되더라도  집 주방장만 따로 뺴돌려서 데려갈 방법은 없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얌전하게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디아나의 얼굴을 흘깃거리고 있으니..

"..그럼 같이 가지."


디아나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왔다.


자기 갈 때 같이 가자고.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던져진 그 말을 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디아나가 나와 주인공 놈을 양쪽에 놓고 저울질을 시작했다는 걸.

애초에 놈과는 다르게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던 나였기에 나로서는 기껍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으음.."


덥썩 수락하는 대신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한 이유?


간단하다.

너무 쉬운 존재로 비춰지는 건 또 피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하지 않았나 디아나가 내게 매달리도록 만들겠다고.


그를 위해서라도 튕길 때는 또 튕겨줄 필요가 있었다.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입학 예정자는 입학식 전까지 학원 내로 진입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해서 살짝 튕겨줬더니 엄청 당황하더라.

"그, 그거라면 괜찮을 거다. 내가 보증하면 되니까."

물을 마시려다가 말고 멈칫하더니 허둥지둥하며 열심히 그런 말을 늘어놓는 게..

솔직히 좀 귀여웠다.

맘 같아서는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너무 튕기기만 하는 것도 곤란했다.

결혼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디아나의 성격상 염두에 둔 상대가 쓸데없이 튕기기만 하면 그대로 튕겨져나갈 가능성이 크니까.


"그럴까요? 그럼?"


해서 고개를 끄덕여 수락의 의사를 밝혔더니 은근 내 눈치를 보던 디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일찌감치 저택을 나서는 디아나인만큼 시간에 맞추려면 서두를 필요가 있었으니까.


'미리 다려놓길 잘했네.'

어제 성심성의껏 다림질을 해둔 덕분일까.


각이 아주 그냥 제대로 서 있었다.

보는 내가  흡족해질 정도로.


그보다  마음에 드는 건..

'괜찮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학원의 제복이 이 몸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나조차도 그렇게 느꼈을진데 높은 확률로 제복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을  세계 여성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그건 곧 확인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헤어스타일 정리까지 끝낸 뒤에 디아나가 기다리고 있을 저택 입구로 향하니..


날 발견한 디아나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으니까.


"..잘 어울리는 군."


저도 모르게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민망하기라도 했던 걸까.

흠흠하고 두어번 헛기침을 한 디아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제복차림에 대한 감상을 전해왔다.

그녀의 성격상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씩 웃는 것으로 그녀의 칭찬에 답했다.


화아악-

얼씨구?


아무래도 내 제복차림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모양이다.

아침 식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암만 방긋방긋 웃어보여도 이렇다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 디아나가 미소 한 방에 저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보면 말이다.

"가, 가지."

이성적인 감정으로부터 기인한 민망함은 처음이었던 걸까.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디아나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려 했고..


"아앗..!"

조급한 마음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불러들였다.

헛디뎌진 발과 함께 휘청하는 몸뚱이.


디아나의 몸이 기우뚱하고 옆으로 넘어가는 걸 목도한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손부터 뻗었다.

"아.."


졸지에 무슨 탱고라도 추는 것마냥 내 팔에 몸을 기댄 꼴이 된 디아나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괜찮으십니까? 조심하셔야죠."


"어, 어.."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이 정신을 차리질 못하는 디아나의 몸을 반쯤 안다시피해서 옆으로 넘어가다 말고 멈춘 그녀의 몸을 똑바로 세워주었다.


"넘어지실 때 발목이 살짝 꺾이신 것 같던데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다."


디아나는 괜찮다 말했지만, 여전히 눈빛이 멍한 것이 솔직히 신뢰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들어가서 앉으시죠."


마차 내부로 이어지는 계단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서있던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낸 뒤, 자리에 앉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건  세계의 남자가 할만한 행동은 아니긴 하지만..


내 본능이 속살거렸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얼른 행동으로 옮기라고.

그래서 그대로 했다.


"자, 잠..!"

디아나의 발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니 내가 하려는 행동을 눈치챈 디아나가 발을 이리저리 뒤틀어가며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 했다.

그런 그녀의 저항을  무시한채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냈다.


그러자 드러난 건 옅은 분홍빛이 맴도는 새하얀 발이었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발이라는 부위가 이렇게 예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

발 패티쉬가 없는 사람도 패티쉬가 생기게 만들 것 같은 귀여운 발이었다.

어쩜 발가락 하나하나도 저렇게 앙증맞을 수가 있는지..

자길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내 시선을 의식하듯 꼼질대던 발가락이 일제히 오므라들었다.


그렇게 움츠러든 발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그것을 건드려보았다.

"읏.."


그 순간 디아나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자그마한 신음성이 마차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그저 발목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뿐인데 엄청나게 야릇한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 탓에 자꾸만 싱숭생숭해지려는 가슴을 꾸욱하고 내리누르며..


"일단 삔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최대한 담담한 척을 했다.

그에 비해 디아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손대면 펑하고 터질 것처럼 두 볼이 빨갛게 변한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라도 달아오른 얼굴을 숨겨보려는 것처럼.

그런 그녀의 얼굴을 못 본 척 하며 내 손으로 벗겨냈던 그녀의 신발을 다시 신겨주었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았던 자세를 풀고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 그러면 안 된다."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디아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무엇을 말하는 걸지야 뻔했다.

분명 방금 내게 제 몸에 서스럼없이 손을  걸 말하는 거겠지.


방금 상황은 말하자면  원래 상식 기준으로 여자가 남자를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킨쉽을 한 거나 다름없는 셈이니까.


당하는 입장에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해야할까.


"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한 척을 했다.

그녀가 방금  행동을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내가 '이안이는 아무고토 몰라요.'라는 식을 시전하니 난감해진 건 다름아닌 그 말을 꺼낸 장본인이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 지 알  없었던 걸까.


디아나가 입을 꾹 다물어버림으로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마차 안으로 울려퍼졌다.


다그닥다그닥-


그렇게 어색하고도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가 길을 따라 내달렸다.

학원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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