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12)화 (12/366)



〈 1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 있었다.

끝에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색기어린 인상의 미녀가 말이다.

"우연이네에~? 여기 묶나봐~? 3층? 2층?"


히죽히죽 웃는 낯짝에서 내뱉어진  말을 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걸.


'노렸네. 노렸어.'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나나 주인공 놈의 뒤를 쫓았다는 소리다.

직접 했던 사람을 붙였던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그리고 아마 추적의 대상은..

내가 아닌 내 눈앞에서 살짝 얼굴을 굳히고 있는 요놈이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오른편 자리를 꿰찬 빨간머리녀, 아니 앨리스의 시선은 등장한 이후로 줄곧 주인공 쪽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이 세계에서는 호남형보다는 귀염귀염한 얼굴이  잘먹히는 걸까.


아니면 히로인 후보들의 취향이 다 그쪽으로 고정되기라도  걸까.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디아나부터 시작해서 제 2의 히로인 후보일지도 모르는 앨리스의 관심까지 듬뿍 쳐받으시는 주인공 놈의 모습에 솔직히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무슨 공기라도 되는 것마냥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든 앨리스를 보고 놀란 척을 하고 있으니 그제서야 그녀의 시선이 내쪽에 와서 닿았다.

 향해 욕정어린 시선을 듬뿍 보냈던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흥미라고는 한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바라보다는 역할에 충실한 시선.

주인공을 바라볼 때 하고 있었던 것과는 온도 자체가 다른  시선이 내 얼굴을 한 번 찍고 떠나간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년 저거..'


저 빨갱이 년이 대충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 지를.

그도 그럴 것이 몇 번 본적 있는 거였으니까.


특이한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 눈빛은 말이다.

언제였더라?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2회차였을 것이다.


거기서 중간보스처럼 등장하는 자칭 서큐버스 퀸이라는 년이 있었는데 그년이 주인공을 바라볼  딱 저런 눈빛을 하곤 했었다.


자신의 유혹을 버텨낸 건 주인공이 처음이라나?

뭐 그런 이유를 대면서 시도 때도 없이 주인공을 덮치려드는데..

'시발..'


솔직히 부러웠다.

생각해봐라.

밤마다 여신 뺨치는 얼굴에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딱 넘어가는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자길 따먹어달라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이다.

그걸 마다할 남자가 있을까?


놀랍게도 있더라.

무슨 박쥐포비아로 있는지 주인공은 서큐버스퀸 등에 달려있는 박쥐 날개만 보면 아주 학을 뗐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빨갱이, 아니 앨리스는 특이한 걸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특이하다는 건 특별하다는 소리기도 하니까.


아마 저번에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 계기였겠지.

그녀와 그녀의 패거리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주인공 놈의 시선을 의식해 누가봐도 이 세계의 평범한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을 선보였다.

그에 비해 주인공 놈은?

날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섰었다.


음..

당시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좀.. 그렇긴 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은 사람 뒤에 숨은 셈이니까.


아무튼 앨리스가 주인공으로부터 특별한 느낌을 받은 건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신선했겠지.


이 세계의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부담스러워 한다.


주입된 기억에 따르면 뭔 저주 때문에 그렇다는데 아무튼 중요한  그게 아니고..


앨리스의 인상은 기본적으로 센 편이다.

그러니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그녀를 더더욱 부담스럽게 여겼겠지.

그렇게 늘 자신을 보면 쫄기 바쁜 남자들만 보다가 처음으로 자신을 상대로도 쫄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맞서는 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관심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터.


'이런..'


지나간 일을 후회해봐야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어쩔 수 없었다.


뭐,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이제라도 잘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속으로 그런 다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주인공 놈과 앨리스는 서로 시선을 교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달달한 분위기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놈은 명백히 앨리스를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앨리스는?

관심을 가진 상대로부터 그렇게 노려봐지만 가슴 아파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녀는 그걸 즐기고 있었다.


주인공이 자길 상대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 기꺼워하는 느낌?

그 증거로 그녀의 눈빛 속에 깃든 흥미의 색이 아까보다 한층  짙게 변해있었다.


스멀스멀 일어나는 그 변화를 목도한 순간 본능이 속삭였다.

저걸 그냥 방치하면  된다고.


"그.. 선배님? 이시죠?"


그래서 즉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앨리스가 나와 주인공 놈 사이로 끼어들 때처럼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흥미로 반짝반짝 빛나던 앨리스의 눈이 일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엄청난 온도 차에 일순간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지만,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그런 내 모습이 살짝 의외였던 걸까.


여전히 흥미라고는  톨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긴 하지만 바로 조금 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눈을 한채 그녀가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색기가 기본사양으로 탑재된 그녀의 인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응, 맞아. 그때 골목에서 봤던 그 정의의 사도님처럼 기사부 소속이야. 일단은."

일단은이라.

기사부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소속감같은 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긴..


안 봐도 군대식으로다가 빡빡할게 분명한 기사부의 규칙을 눈앞의 여자가 순순히 따를 것 같지는 않으니까.

분명 기사부 내에서도 트러블메이커쯤 되는 위치겠지.


그리고 역시나 주인공 놈은 기사부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 모습 덕분에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놈도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이안 데일'처럼 기사부로의 전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걸.


주인공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보니  모르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붙을 거다.

그것이 주인공이니까.


앨리스도 주인공이 기사부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어느새 제 몫의 음료까지 주문한 그녀가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로 기사부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음료를 주문하길래 보나마나 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점원이 가져온 건 과즙을 물에 타서 만든 음료수였다.

생긴 건 와인같은 걸 즐겨마실 것처럼 생겨놓고서는 의외로 어린애 입맛인 걸까.

오렌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컵 안에 담긴 주홍빛 액체를 홀짝홀짝 들이키던 그녀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반응을 보니 기사부에 관심이 있나보네. 왜? 전과라도 하려고?"


그 물음에 주인공 놈은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렇다고 인정한거나 다름없는 그 반응에 앨리스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쉽지 않을텐데~"

그러면서 은근 자신을 과시하는 게 자신이 도우면 그 쉽지 않은 일이 해볼만한 수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했다.


전과에 도움을 주는 걸 빌미로 주인공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쓰으읍..'

대체  놈은 전생에 무슨 복받을 짓을 했길래 저렇게 매혹적인 여자가 알아서 철썩 들러붙고 그러는 걸까.

앨리스가 주인공 놈한테만 제안한 상황이라 끼어들기도 뭣해서 쓰린 속만 부여잡고 있으니..


"도움이라면 됐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해야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주인공이 앨리스가 내민 손을 그대로 걷어찼다.

보는 내가 다 시원할 정도로 가차없이.


설마 그렇게 대차게 까일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앨리스의 미소에 쩌적하고 금이 갔다.

솔직히 좀 고소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앨리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대놓고 무시를 당하면 기분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흐음, 그래? 뭐, 그렇다면야.."

이미 단호하게 거절을 당한 상황에서 재차 권하는 것도 모양이 빠진다고 생각한 걸까.

앨리스는 더 권하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식사 중이었지? 반가운 마음에 실례했었네."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떠나려는 듯 생긋 웃어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련같은 건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럼 입학식 때 봐~"


그렇게 등을 돌려 떠나가는 그녀를..

"나도 이만 가볼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조심스레 따라나섰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앨런 가문의 사용인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눈으로 들어왔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 신경써줄 겨를은 없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시원하게 걷어차인  민망하긴 했던 모양인지 앨리스의 걸음이 무진장 빨랐으니까.

한  앞서 여관을 빠져나간 그녀를 따라 거리로 나오니 그 잠깐 사이에 저기까지 간 것인지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뒤를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한 번 던져 디아나가 붙여준 사용인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앨리스가 들어간 골목으로 들어갔다.

'왠지..'


유인당하는 느낌인데 말이지.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굽이치는 골목을 따라 모퉁이를 돈 순간.

홱-!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벽쪽으로 딸려가서 부딪혔다.

 벽으로 몰아넣은 사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앨리스였다.


"엄마가 남자 혼자서 어두운 골목같은 데 들어가면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고 안 가르쳐주시든?"


날 벽으로 몰아붙인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올린  웃고 있었다.


여관 식당에서 보여주었던 미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미소였다.

분명 웃고 있는 건 똑같은데 이쪽은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긴달까.


그나저나 엄마라..


"죄송하지만 제가 고아라서요."


그런 거 없는데?


덤덤하게 받아치니 그런 식의 답변이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걸까.

10시 10분을 그리고 있던 앨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흥미라는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꼭 마치 '요것 보게?'라고 흥미로워하는 느낌?


그래봐야 주인공을 상대로 보이던 것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고로 지금부터 내 역할은 그것을 키우는 것이었다.

해서 앨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슬슬 놓아주시죠."

"내가 왜?"


그래야할 이유를 대보라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길래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바로 조금  내가 돌아나온 모퉁이 부분을.


"슬슬 절 찾는 사람이 등장할 타이밍이라서요. '오해'를 당하시더라도 상관없으시다면 이대로 가만 있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디아나가 붙여준 사용인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벌어질 일이야 뻔했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뜻으로 앨리스를 응시하니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더니 내 몸을 짓누르고 있던 팔을 풀며 살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그녀였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맞닿아있던 내 몸의 감촉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보란듯이 주물러대는  아닌가?


"뭐, 몸은 마음에 드네."


그리 말하면 내가 움찔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당연하죠. 어떻게 만든 몸인데."

움찔하는 대신 뻔뻔하게 받아치니 앨리스의 입꼬리가 한층 더 삐뚤어졌다.


"어떻게 만들었는데?"


"열심히? 잘?"

방긋 웃으니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골목에서 그건 연기였니?"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그래서 날 따라온 목적은?"

여기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가자는 걸까.

그래서 말해주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핑계를.


"아까 굉장히 재미있는 제안을 하시던데.."


"흐음?"

"실은 저도 노리고 있거든요. 전과."


"그래서 도와달라고?"

씨익하고 웃고 있는 앨리스의 얼굴은 꼭 '그럼 뭘 줄 수 있는데?'라고 묻는  했다.


"그건 얼마나 도와주시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뵈도 은근 고급인력이라서 말이야.  비쌀텐데?"

"모자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죠. 뭐."

아까 마음에 든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뉘앙스로 맞받아치니..


"하..!"

바람 빠지는 소리가 골목을 따라 울려퍼졌다.


그런 그녀를 마주보며 지지 않고 씩 웃어보였다.


'특이한 걸 좋아한다고?'

그렇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그 특이한 놈이라는 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