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안 데일은 디아나에게 도발을 시전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디아나는 빡침 상태가 되었다!
디아나의 공격력이 크게 증가했다!
왠지 그런 스크립트가 눈앞으로 쭈르륵 지나간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내 도발에 대한 디아나의 반응은 격렬했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눈빛에 날이 섰으니까.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후배 놈한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걸까.
뚜둑뚜둑하고 디아나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제법 살벌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가져다 준 천을 봉에 대고 감았다.
반은 손잡이 역할을 해줄 부분에, 나머지 반은 봉 끄트머리에 동그랗게 감으니 그 모습을 확인한 디아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그 뿐이었다.
어차피 곧 현실라는 걸 깨닫게 될 텐데 굳이 입 아프게 말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걸까.
"준비는 됐나?"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뛴 디아나가 그리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와 마주서게 되었다.
스윽-
그녀의 준비자세는 상당히 특이했다.
검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뜨리고 있는 자세라니.
그 특이한 자세를 눈여겨 보다가 탐색전을 벌이듯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시작된 대련은..
"..졌습니다."
내가 들고 있던 봉을 놓치고 디아나의 목검이 내 목에 드리워짐으로써 디아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져줄 생각으로 임한 대련이었으니까.
그래서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접대 골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원래 티 안나게 져주는 게 제일 어렵다.
하물며 디아나같이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가진 이가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대련을 이끌어나가다가 결정적인 찬스에서 실수한 척 승리를 '떠먹여'줬더니..
나름 접전 끝에 승리한 사람치고 디아나의 표정은 개운치 않았다.
동시에 굉장히 의외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데..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걸.
애초에 난 아무 생각없이 디아나에게 대련을 청했던 게 아니었다.
내게는 다 계획이 있었으니까.
내가 디아나에게 대련을 청했던 건 그녀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함도 있었지만, 그녀의 안에서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딱히 결혼할 생각이 없음에도 주인공 놈한테 관심을 보였던 건 놈의 얼굴이 그녀의 '취향'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주인공 놈에게 대항할 수 있을만한 나만의 무기를 갖출 필요성을 느꼈고, 그런 내가 선택한 게 바로 '무력'이었다.
나중에 가면 길 가다가 넘어져도 기연을 얻는 주인공 특유의 사기성 때문에 놈과 무력적으로 비비는 건 무리겠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아직 그 어떤 기연도 얻지 못한 주인공은 결코 날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타이밍에 스스로의 '무력'을 내세워서 내 가치를 드높이는 건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란 말이지..'
어떤 식으로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남자라면?
그 뛰어난 씨를 탐내는 귀족 여성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든다는 게 '이안'의 기억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디아나가 지금 저렇게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건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
모처럼 관심이 가는 상대가 생겼는데 그런 상황에서 귀족 여성으로서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대어가 눈앞에 튀어나온 상황이니까.
심지어 그 '대어'가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평범한 귀족 여성이었다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낼름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디아나는 그러지 않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성과 본능이 서로 박치기를 하고 있는 상황일테니까.
심지어 그녀는 제 입으로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뛰어난 이들끼리 짝을 붙이는 나라의 행태를 경멸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더욱 망설여질 수밖에 없겠지.
그녀의 성향상 이제와서 말을 뒤집기는 좀 그럴테니 말이다.
'뭐, 나야 땡큐지만.'
나야 그녀가 고민하고 번뇌할수록 좋았다.
해서..
"무리한 부탁이었을텐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이 그녀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주지 않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걸로 대련만 마무리했다.
"아, 아니다."
어색하게 답을 하는 디아나를 뒤로 한채 마무리 운동 삼아 몸을 풀어주고 있자니 집사가 말한 아침 식사가 연무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헤비하게 가기엔 좀 그랬던 걸까.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우유가 들어왔고, 나는 그것들의 운반이 끝날 때까지도 고민에 잠겨있던 디아나를 향해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내 손으로 포장까지 손수 뜯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눈앞으로 쑥 밀고 들어오니 놀랐던 걸까.
"드세요."
"아, 고, 고맙다."
순간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던 디아나가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에게 들고 있는 것을 건네는 '척'을 하면서..
우연을 가장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훑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움찔거리는 디아나.
이런 별것 아닌 스킨쉽에도 저렇게 격렬하기 그지없는 반응이라니.
반응이 생생하니 일을 저지르는 맛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이상 진도를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더 고민할 시간을 줘야지.'
말하지 않았던가?
디아나가 내게 매달리게 만들겠다고.
그녀에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무겁고 커지는 게 바로 고민이라는 놈의 특징이니까.
그녀의 품에 안은 고민의 무게와 몸집이 커져갈수록 내 존재감또한 덩달아 자라날 터.
해서 당분간은 그 상태로 내버려둘 생각이다.
그 말은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 디아나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결정을 철저하게 이행했다.
이 저택에 머물게 된 첫날에는 그녀를 기다리기까지 해가면서 그녀와 마주치려 했지만, 연무장에서 대련을 한 날 이후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 뒤로는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같은 저택에 있어도 그녀와 나는 생활 패턴 자체가 달랐으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디아나와는 다르게 애초에 나는 최대한 뻐길 수 있을 때까지 침대에서 버티는 타입이었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5회차 때 하도 험하게 구른 탓에 잘 수 있을 때 최대한 자두는 습관이 영혼에 새겨지다시피 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느~긋하게 생활했더니 디아나 딴에는 내가 자길 피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이쪽을 신경쓰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는데..
나로서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날 신경쓴다는 건 그녀의 안에서 내 존재감이 주인공 놈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떡상 좋구연.'
그런 디아나를 뒤로한채 외출을 나왔다.
디아나가 붙여준 사용인까지 뒤에 대롱대롱 매단 채로.
원래는 혼자서 나오려고 했는데 외출 나가는 날 발견한 디아나가 있는 게 여려모로 편할 거라면서 억지로 붙여줬다.
"그럼, 어디부터 가실 생각이십니까?"
어디부터라고 해도..
딱히 수도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어딜 콕 찝어 말하기가 애매했다.
"일단 사람 많은 곳으로 나가볼까요?"
"그렇다면 중앙광장으로 가시죠."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나 했더니 진짜 많더라.
눈 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득실득실 한 것이..
그 득실득실한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라서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무슨 구경난 것도 아니고 주변을 지나가는 여자마다 흘깃흘깃 시선을 던져대는데..
'이러다가 아주 여자 치한도 만나겠네.'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만큼 날 흘깃대는 여성들의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꼭 마치 '저 남자.. 침대에서는 어떨까?'라고 상상하는 듯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아무래도 훌륭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이 몸의 피지컬 때문인 듯 했다.
기본적으로 주변을 오가는 이들보다 기본적으로 한 뼘정도는 크다보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처지기도 했고.
'그나저나..'
여자 치한이면 치녀인가?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에 그에 관해 생각하고 있으니 동행한 사용인의 눈에는 좀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부담스러우시면 자리를 옮기시는 건 어떨까요?"
가만히 서 있는 걸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한 건지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리를 옮길 것을 권했다.
나야 어차피 저 많은 사람들 사이로 굳이 기어들어가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였기에 제안을 받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건데..
내가 외출을 나온 건 어디까지나 시간도 때울 겸 앞으로 생활하게될 수도라는 도시가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유명한 관광지같은 곳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가봤자 현지인보다 관광 온 외지인이 더 많을텐데 뭣하러 간단 말인가?
'차라리..'
나온 김에 디아나한테 줄 선물같은 거나 사갈까?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막 엄청나게 거창한 물건은 힘들겠지만 간단한 간식거리같은 거라면..
인파가 비교적 덜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주인공 놈에게 빌려주었던 여관방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솔직히 확신하긴 힘들었다.
은근 자존심하고 경계심이 강한 놈이니까.
받아가는 척만 하고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을 부려서 그렇지 사람 자체는 착한 놈이니까.
내 성의를 함부로 무시하지는 않았을 터.
'한 번..'
확인이나 해봐?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놈이 내가 내어준 방에 머물렀다면 이제 거기에 머무른지도 2일차가 되어가는 상황.
슬슬 고마워하는 감정이 희석되기 충분한 타이밍이니 이쯤에서 한 번 얼굴을 내밀어서 그걸 상기시켜준다면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더 오래갈테니까.
그래서..
"양의 뜰 여관에 가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동행하고 있던 사용인에게 부탁해봤다.
다행히 그녀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여관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확인한 여관의 실물은..
'괜찮은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일단 여관 문을 드나드는 이들의 복장부터가 꽤 사는 듯한 이들이나 입을만한 것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상회에 소속된 부인의 연줄을 이용해 수도를 드나드는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을 숙소로 잡아준 모양.
드나드는 이들이 하도 많아서 닫힐 새가 없는 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가니 경쾌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날 반겨주었다.
꽤 사는 양반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서 그런 걸까?
여관 내부는 꽤 본격적이었다.
아무래도 1층은 식당을 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관 측에서 고용한 걸로 추정되는 악사의 경쾌하기 그지없는 연주가 1층 벽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 경쾌함에 힘입어 식당 내부는 대낮부터 반주를 때리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고.
좀 기묘한 느낌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호쾌하게 낮술을 때리고 있는 이들이 전부 다 여성들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사람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려나..
입구 옆쪽에 서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여관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척봐도 수상해보이는 로브를 뒤집어 쓴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카운터 석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저 로브 안에 내가 찾고 있는 이가 들어있을 거라고.
왜 저리 꽁꽁 싸맨 건지는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럴 이유야 하나 뿐이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겠지.
지금 주인공 놈의 상황은 뭐랄까..
아저씨들로 가득 찬 술집에 미모의 아가씨가 홀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그 '아가씨'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게 몰려들 게 분명한 시선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을 터.
그렇지만 이런 세계인지라 버프를 먹을대로 먹은 주인공의 미모는 그깟 천 한장으로 어찌하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지금도 봐라.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고 있지 않나?
여러모로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합리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 광경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놈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
그리고는 비어있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사를 건네니..
헛수작을 부리러 온 년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딱봐도 짜증났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렸던 주인공 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약 하루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나와 주인공 놈 사이로..
"뭐야~? 어제 그 신입이들 아니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