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누군가를 유혹하려할 때 차려입고 있는 복장이 중요하다는 건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진리이다.
유혹의 대명사 샤론 스톤이 원초적 본능에서 괜히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나왔겠는가?
같은 포즈, 같은 자세라 할지라도 복장이 어떻냐에 따라서 파괴력이 달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상해봐라.
샤론 스톤이 몸빼바지를 입고 다리를 꼬는 모습을 말이다.
그랬어도 수많은 남성들을 위아래로 울린 다리꼬기 씬이 나왔을까?
그 점을 고려하면 나도 아찔하기 그지없는 복장을 차려입어야 했지만..
나는 챙겨온 옷 중에서도 비교적 헐렁한 것들 위주로 골라입었다.
그 편이 내 목적이 더 부합한다고 보았으니까.
가뜩이나 몸이 끄뉵끄뉵한데 거기에 쫙 달라붙는 옷까지 입는다?
투 머치고, 너무 노골적이다.
그런 고로 그쪽은 패스.
그리고 뭣보다..
'헐렁하다고 파괴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원래 보일 듯 말 듯 한게 더 꼴릴 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은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진리에 입각하여 지금 내 컨셉은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짝 박시하게 입고 운동하는 남자였다.
거기에 내가 이안 데일이라는 놈을 선택한 이유였던 훌륭하기 그지없는 피지컬이 더해지면?
"후우.."
간단한 스트레칭 동작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유혹의 몸짓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박시한 옷을 입고도 몸에 쫙 달라붙은 옷을 입은 것 같은 광경을 연출하는게 가능하니까.
허리를 천천히 옆으로 젖히면서 몸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리는 내 행동에 입고 있던 티가 딸려올라가며 내가 봐도 흐뭇할 정도로 잘 빠진 치골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반응?
말할 것도 없이 폭발적이었다.
새벽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살며시 드러난 옆구리를 스친 순간 옆쪽에서 누군가 침을 꼴깍하고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아마 지금쯤 디아나의 눈은 정신없이 바쁠 거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 눈이 자꾸만 내 치골 쪽으로 돌아가니 본인으로서도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한 번 훔쳐볼 때마다 양심에 깨시가 쿡쿡 박히는 느낌일테니 말이다.
그런 디아나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스트레칭을 이어나갔다.
진짜 순수하게 운동을 하기 위해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좋네.'
이렇게 아침부터 느긋하게 운동을 하는 게 얼마만이더라.
일단 상당히 오랜만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인간들의 씨를 말려버릴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마족 놈들 때문에 5회차 때는 일단 눈뜨면 그 때부터 하루종일 구르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스트레칭 시간?
그런 것 따위 있을 리가 있나.
그럴 시간에 차라리 마족 놈의 대가리를 하나라도 더 날려버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상당히 오랜만에 누리는 듯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알아볼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못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이 몸은 진짜 피지컬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살짝 두꺼운 편인 몸이라서 반쯤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설마 유연성까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시험삼아 바닥에 손이 닿나 시험해봤더니 허리가 당기는 느낌도 없이 손이 닿더라.
덕분에 더 난이도 있는 동작도 얼마든지 수행이 가능했다.
다리를 일자로 쭉 찢은 뒤에 바닥에 상체를 찰싹 붙이는 자세까지도 말이다.
슬쩍슬쩍 내쪽을 훔쳐보다가 목격하게된 그 모습이 디아나에게는 꽤나 경이롭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상당히 유연하군."
나지막한 감탄사와 함께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감상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부러 몸을 움찔거렸다.
운동에 몰입하고 있다가 다아나가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말이다.
누가봐도 상대방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듯한 몸짓이었고, 덕분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던 디아나는 그대로 쭈구리가 되어버렸다.
"시, 신경쓰이게 했다면 미안하다. 그냥 난.. 신기해서.."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더 죄송하죠."
네 아침 훈련을 방해해서 면목없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니 뭐라 말하려던 것처럼 입술을 오물대던 디아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정해진 동작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헌데 그런 내 동작들이 디아나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특이한 동작이로군. 그.."
"편하게 이안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이름을 허락한다는 건 이 세계 기준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따위는 꿈에도 모른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 내 행동에 디아나의 표정이 애매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꼭 마치 아무한테나 함부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지 알질 못해서 난감해하는 느낌?
그런 식으로 얼굴 위로 고뇌를 내비치던 디아나는..
"그, 그래 이안."
결국 생각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그녀 딴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모양.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데까지 성공하고 나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행한 스트레칭 동작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를 상대로 대충 이게 어디에 좋고, 또 어떤 효과가 있는 지 입을 털어준 뒤에 관심있으면 함 배워보쉴?이라고 제안했더니 디아나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허릿심을 늘려주고 몸의 선을 가꾸는데 효과가 있다고 입을 턴 게 주효했던 모양이다.
"그럼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드릴테니 그걸 보시고 그대로 따라하시면 됩니다."
그리 말하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더니 디아나의 시선이 꽤나 노골적으로 내 몸을 훑어댔다.
내쪽에서 먼저 봐도 된다고 허락한 상황.
아무리 내게 관심이 없더라도 남자의 몸을 마음껏, 합법적으로 쳐다봐도 되는 이 상황을 '여자'로서 그냥 흘려보내긴 힘들었겠지.
'여자친구 있다고 야동 안 보는 것도 아니잖아?'
심지어 디아나는 주인공 놈과 사귀기는 커녕 이렇다할 썸씽조차 없는 상황 아닌가 그녀가 거리낄 거라고는 스스로의 양심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양심은 성욕한테 못 이기지.'
그건 디아나라고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이 때가 기회다!'하고 철저히 본능에 따라 눈을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디아나가 뭐, 내 몸에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굉장히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디아나처럼 자기자신만의 주관과 선이 뚜렷한 사람이 무엇을 계기로 무너지는지를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철옹성마냥 견고한 이성을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자그마한 일탈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일단 한 번 선을 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는 괜찮을거야.
-그런 것도 했는데 고작 이런 게 문제가 되겠어?
그 말들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계속 선을 넘어버리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디아나는 처음으로 스스로가 그어놓은 선을 넘고 있었다.
"이해하셨나요?"
"으, 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이해했을 리가 없으니까.
동작보다는 몸매 감상에 열중했다는 걸 뻔히 아는데 이걸 이해했다고?
솔직히 내가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였는지 기억하고 있기나 하면 다행이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럼 한 번 해보시겠어요?"
디아나에게 방금 내가 취했던 동작을 그대로 취해볼 것을 요구했다.
그런 내 말에 찔리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몸을 움찔했던 것도 잠시, 그래도 어느 정도 눈에 남은 게 있었는지 디아나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흉내만 낸 수준이라서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무게중심도, 힘분배도 엉망인 채 어설프게 자세만 취하고 있는 디아나를 '응? 이게 아닌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당황하며 바라보니 슬쩍슬쩍 내 눈치만 보고 있던 디아나의 얼굴 위로 붉은 물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못 보셨나 보네요. 다시 한 번 보여드릴게요."
물론 반복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럴 줄 알고도 행한 것이긴 하지만.
"음.."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디아나의 자세를 바라보며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잠시만 그대로 있어보시겠어요?"
그리 말하며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갑작스런 내 접근에 놀랐던 걸까.
어색하기 그지없는 자세에서 해방된 디아나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자세를 좀 봐드릴.."
그에 맞춰서 내뱉으려던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덕분에 분위기가, 굉장히, 무진장 어색해져버렸다.
디아나를 향해 다가가려다 말고 멈춰버린 나와 그런 날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다가 멈춰버린 디아나.
그런 우리 둘 사이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만들어낸 침묵이었기에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그것을 깨뜨렸다.
"죄송해요. 그.. 제가 갑자기 다가가는 바람에 놀라셨죠."
남자 쪽에서 먼저 여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민망한 상황까지 무릅 써가며 순수하게(?) 그녀를 돕고자 했던 내가 사과를 하는 상황.
이 상황이 디아나에게 어떻게 느껴질지야 뻔했다.
'막 빚진 것 같고 그렇지? 장난 아니게 미안하지?'
어색하게 굳은 디아나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내 사과에 답을 했다.
"아, 아니다. 그냥 다리가 좀 땡겨서.."
자세가 불편해서 풀었을 뿐이다.
널 피하려 했던 게 아니다.
누가봐도 날 피하는 듯한 기동을 선보여놓고선 뻔뻔스럽게도 그리 말하는 디아나를 보며 나는 그렇다면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척'을 했다.
꼭 마치 그녀가 날 피했다는 걸 무진장 신경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내 행동이 디아나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그건 솔직히 디아나만 알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일단 그녀는 나라는 놈이 엄청나게 신경쓰일 것이다.
그리고 'hoxy..?'라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후배가 집에서 신세 좀 져도 되겠냐며 밀고들어오고, 거기에 서스럼없이 바디터치까지 감수하려 한다?
'각이지.'
하물며 이렇게 남녀가 유별한 세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분명 지금쯤 내가 제게 호감을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대차게 착각질을 해대고 있을 거다.
'뭐, 완전히 착각은 아니긴 하네.'
호감?
있긴 했다.
그녀가 상상하는 것과 종류가 좀 다를 뿐이지.
'그나저나..'
이대로 어정쩡하게 물러나는 건 좀 아쉬운데.
모처럼 과감하게 나선만큼 뭐라도 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뭣보다..
-만지고 싶다!! 아 ㅅㅅ! ㅅㅅ하고 싶다!
디아나가 들었다면 환멸했을지도 모르는 외침이 내 머릿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자라는 존재에 굶주릴대로 굶주린 내 본능이 내지르는 구조신호였다.
그러니까..
살짝만 만져보자.
나도 오늘 당장 끝장을 볼 생각은 없었다.
내 목표를 생각하면 절대 그러서는 안 되니까.
디아나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내가 그녀에게 매달리는 듯한 구도가 되어선 곤란했다.
내가 원하는 건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걸 위해서라도 각이 보인다 할지라도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기듯 중얼거리면서 어색하게 옷깃만 만지작대고 있던 디아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말씀드린대로 자세 봐드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자세 좀 취해주시겠어요?"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꼴깍하고 못 들은 척 흘려넘기기에는 너무 노골적인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렇지만..
"네, 그렇게 허리를 좀 더 숙이시고.."
못 들은 척 했다.
그랬더니 디아나의 표정이 오묘해지길래..
스윽-
"하체에 힘 한 번 줘보시겠어요?"
딴 생각 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몸 위에 손을 올렸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딱 걸쳐있는, 은밀한 곳이라 말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곳에 손을 올린 채 꾸욱하고 누르자..
흠칫-
내 지시에 따라 아까 내가 선보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디아나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