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8)화 (8/366)



〈 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계획을 세웠다면?


당연히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한낱 공상일 뿐이니까.


'일단..'


먼저 확인해야할 게 있었다.


다만 그걸 확인하겠답시고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때를 기다렸다.


'때되면 부르러 온다고 그랬으니까.'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때'가 되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내 목표를 생각하면  점의 위화감도 남겨둬선 안 되니까.

해서 천장에 새겨진 무늬를 세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똑똑-


"계십니까?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앗, 네네."

 말을 들은 즉시 침대에 뉘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가니 아까 이곳까지 올  마주쳤던 사용인 중  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시면 됩니다."


방으로 날라다 줘도 될텐데 참으로 과분하게도 나는 주인없는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메뉴는 나쁘지 않았다.

집사가 주방에 따로 언질이라도 했는지 코스로다가 요리가 쫙 깔렸으니까.

기차 식당칸에서 먹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  자체였다.


'점점 더 마음에 드네.'


요리사까지 훌륭하다니.

디아나를 반드시  것으로 만들어야할 이유가 하나  늘어버렸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가져다 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자니..

끼익-


내가 들어온 이후로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집사 양반이 얼굴을 비췄다.


그냥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내가 식사를 끝마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내 앞에 놓인 접시가 깔끔하게 비워져있는 걸 확인한 집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떻게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접시가 빈  봐놓고선 물어보기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겉으로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또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다시금 흐뭇하게 변한 집사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제안을 해왔다.


"소화도 시키실 겸 저택을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영지의 저택에 비하면 그리 넓은 저택은 아닙니다만."

기다렸던 제안이었고,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제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덥썩 물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제안하자마자 덥썩 물어버리면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티가 날테니까.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뒤로 빼는 척을 하다가 집사를 따라나섰다.


자연스럽게 내 안내를 도맡게  집사의 태도는  예비 안주인이라도 대하는 듯 했다.


"이 저택은 앨런 가문의 12대 가주님께서.."

덕분에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앨런가의 역사나  저택의 연혁같은 정보들도 주워듣게 되었다.

그렇게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다보니 확인하고 싶었던 곳의 모습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긴.."


"소가주님께서 몸을 단련하실 때 사용하시는 곳입니다."

바닥에 단단한 타일들이 빼곡하게 깔려있는  누가봐도 연무장이다 싶어 슬쩍 운을 뗐더니 집사가 덥썩 미끼를 물었다.


"아하.."

관심있는 척 눈을 빛내며 연무장 곳곳을 둘러보는 척을 하니 집사가 다시 한 번 미끼를 물었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네? 아.."


관심은 있지만 내가 어떻게 이곳을 사용하겠느냐.


꼭 그리 말하는 느낌으로 말끝을 흐렸더니 집사의 눈빛이 반짝반짝 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더니 사용하기 전에 미리 말만 해준다면 상관없다는 답을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 혹시 새벽에 잠깐 사용할 수 있을까요? 보통  시간에 운동을 해서."

"물론입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집사가 한 마디를 추가로 덧붙였다.


"아, 참고로 소가주님께서는 주로 아침에 이곳에 들리십니다."


아침이란 말이지..

받아내야할 것과 얻어야할 정보를 모두 얻어낸 이상 더는 집사의 산책에 어울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안내가 끝날 때까지 집사를 따라다녔다.

진심으로  저택에 관심이 있기라도  것처럼.

별거 아닌  같아도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중에 크게 돌아올테지.

누군가를 판단함에 있어 주변 사람에 대한 평가만큼 참고가 되는 것도 또 없으니 말이다.

"정원이 예쁘네요."


"그렇지요? 특별히 신경써서 관리하고 있답니다."

제 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집사를 살짝 비행기를 태워주는 걸로 산책을 마무리 지은 나는 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기차 여행에 지친 몸은 얼른 침대로 뛰어들라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래서 바깥이 어둑어둑하게 변할 때까지 그러고 있었더니..


'왔다..!'

날 몇 시간이나 창가에 눌러앉게 만든 장본인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렇게 밤이 되고 나서야 신입생을 실어다 나르는 기차 행렬이 끝난 걸까.


아까 저택을 떠날 때와는 다르게 정원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르는 디아나의 발걸음은 살짝 무거워보였다.

그녀가 저택 입구에 근접한  확인하고는 잽싸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것 중에 몇 개를 벗어던져서 최대한 복장을 가볍게 만든 뒤..

'하나만 풀까? 아님  개?'

셔츠의 맨 윗 단추를 풀어젖혔다.


거기에 머리에 손을 올려 몇 번 헤집어주는 걸로다가 마무리.


그렇게 방 안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다가 잠깐 어딜 가기 위해  깨어난 듯한 모습을 연출해준 뒤 그대로 방을 빠져나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우선..'


디아나같은 타입에게는 이쪽이 이성이라는 걸 확실히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상대방이 이쪽이 이성이라는  인지하고 있어야 은근하게 유혹을 하더라도 먹히지 않겠는가?

마침 타이밍도 괜찮았다.


계단 앞에 도착한 순간 아래쪽에서 2층을 향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계단 벽을 따라서 메아리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발맞춰서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다보니..


"..."

"아..?"

계단 중간에서 디아나와  마주쳤다.


내려오고 있는 이가 내가 아닌 저택의 사용인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가 졸지에 나와 눈이 마주치게 된 디아나가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디아나의 눈동자가 묘한 움직임을 선보인 건.

살짝 흔들린 눈동자가 내 목덜미서부터 하복부에 이르는 구간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그럼 그렇지.'

뭐?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

차라리 고양이가 생선을 싫어한다는 말을 믿지.

디아나는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남자를 갈구하는 몸을 지녔지만 그걸 억지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빠른 스캔이 증거였다.

'그나저나..'

이제 놀란 척을 해야하는데..


여자처럼 꺅하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이 물밀듯이 몰려왔지만..

"아앗..!"

일단 했다.


놀라서 굳었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것처럼 당황한  눈동자를 떨면서 아까 일부러 벌려놓았던 옷깃을 모아쥐었다.

"죄,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어딘지 헷갈려서.."

그러면서  이런 차림으로 방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발언에 대한 디아나의 반응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놀란 나머지 뇌정지라도 온 모양.

'하긴..'


지금 상황은 아까하고 이어서 생각해보면 일단 후배를 재워주기로 하고 잠깐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그 '후배'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튀어나온 셈이니까.


그 올곧던 디아나가 저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이성의 와이셔츠 차림이 진리로 통용되는 건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좀  풀어놓을 걸 그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츠리니..

"미, 미안하다!"


그제서야 내쪽에 고정시켜놓고 있던 시선을 황급히 다른 곳으로 돌리는 디아나였다.


분위기?

더없을 정도로 어색했다.

 와중에 웃긴 건 디아나의 행동이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 내 쪽을 힐끔대는데..


꼭 마치 야한 걸 처음 본 남자중학생같달까.

그렇게 유지되던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을 산산조각낸 건..

"아가씨? 거기서 뭐하십니까?"


다름아닌 집사양반이었다.


난 그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것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할 때가 아님을 깨달은 디아나가 날 향해 열심히 눈짓했다.

일단 들어가보라는 걸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방을 나선 이유는 달성하고도 남은 상태였으니까.

이제 디아나는 좋든 싫든 날 의식할 수밖에 없겠지.

"죄,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호다닥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사한테 변명하는 거야 디아나가 알아서 하겠지.

'자, 그러면 이제..'

아침에 다시 한 번 마주치면 되는 건가?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로 천장을 보고 있자니..


"흐.."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만큼 계단에서 나와 마주친 순간 디아나가 보여준 반응은 강렬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방금 본 것처럼 눈에 훤할 정도로 말이다.

'귀여웠지.'


완고해보이던 표정은 어디가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라니.

 기준으로 '여자'같은 표정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 식으로 실실대는 사이 밤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휘감은 채 도도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아침부터 시끄럽게 짹짹대는 새대가리 놈들의 모닝콜에 맞춰서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난 나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어제 미리 봐두었던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보다는 새벽이라 불러야 마땅한 시간대라서 그런 걸까.


어제 안내를 받을 때와는 다르게 저택 안은 오가는  한 명 없이 한적했다.

서늘한 새벽의 공기가 맴도는 복도를 가로질러 연무장이 있는 1층으로 내려온 나는 뒷마당과 연결된 쪽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들을 수 있었다.

쐐액-!

누군가 이 새벽부터 힘차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리를 말이다.

역시나.


 봐도 부지런할 상이더니만..

원하는대로 술술 풀려가는 상황에 치솟아오르려 하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닫혀있는 문을 열고 연무장이 있는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을 맞으며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은 순간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흡-!"

새벽 특유의 서늘한 공기 뚫고 울려퍼지는 기합성과 함께 어제처럼 하나로 묶은 그녀의 금발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동시에 선이 고운 얼굴 위에 맺혀있던 새벽이슬같은 땀방울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렇게 훈련에 매진하고 와중에도 주변에 대한 경계만큼은 놓지 않고 있었던 걸까.

"물이라면 거기 두고 가도록."

날 집사나 사용인 중에 한 명이라 착각한 모양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그리 말하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다가..

"그.."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곧게 내리그어지던 디아나의 검로가 순간 휘청거렸다.

내 목소리를 들으니 간밤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기라도  걸까.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칼 사이로 슬쩍 보이는 디아나의 귀는 빨갛게 변한 채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주로 아침에 쓰신다고 들어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쓰기 전에 잠깐 쓰려고 들렸을 뿐이다.

그리 말하며 돌아서는 척을 하니..

"그..  상관없다."

디아나가 떠나려는 날 붙잡았다.

운동하려고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자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간다 하니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


"아뇨, 괜찮습니다. 집중하고 싶으실텐데.."

거기에 대고 다시 한 번 사양했다.


아직 덥썩 받기는 좀 그랬으니까.


효과는 확실했다.


내 말에 디아나가 피식하고 웃었으니까.

"난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도록. 연무장이 좁은 것도 아니고  명이 써도 널널하니까."


이렇게 넓은데 무슨 방해가 되겠냐며 그녀가 날 다시 자리에 눌러앉혔다.


"어차피  이쪽만 사용하니..."

넌 반대쪽을 쓰면 될 거라며 디아나가 살짝 옆으로 비켜서면서 자리를 내줬다.


그렇게 그녀가 내어준 곳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늘 디아나는 알게 될 것이다.

이성과 함께 운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이다.

'우선..'

가볍게 스트레칭부터 시작해보실까?

말이 스트레칭이지 사실 섹스어필이라고 읽어야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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