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7)화 (7/366)



〈 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가 청자로써 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그럴 수밖에.


주인공이라는 놈들의 헛소리에 가까운 신세한탄을 들어주고 놈들의 멘탈이 깨지지 않도록 오구오구 해줬던 시간만 합쳐도 거의 1만 시간은 될테니까.

아무튼  덕분이었다.


초면인 디아나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끌어낼  있었던 건 말이다.


올곧기 그지없어서 뼛속까지 국가에 충성할 것만 같았던 그녀는 의외로 현재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정책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불만을 품고 있는 건 학원이라는 이름 하에서 행해지고 있는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는 맞선이었다.

그녀가 지나가듯 내뱉은 말 덕분에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솔직히 의문이 앞섰다.


내게 주입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세계의 여자들은 성욕이 넘쳐흘러서 남자를 따먹고 싶어 안달이 난 존재였으니까.

헌데 나라에서 남자를 붙여주겠다는데 거기에 불만을 품는다?

그래서 지나가듯 물어봤다.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런 내 물음에 대한 디아나의 답변은..


"가축끼리 접붙이는 것 같잖나. 우리는 가축이 아니라 사람인데 말이야."


상당히 수위가 쎘다.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서 변질된다면 디아나에게 악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사실을 그녀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던 걸까.


내 들어주기 스킬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본심을 꺼내놓고만 디아나의 얼굴 위로 일순간 낭패어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좀 그런 느낌이긴 하죠."

거기서 나는 위험할 수도 있는 그녀의 발언에 맞장구를 쳐주는 걸 택했다.

개인적으로 나이스한 선택이라 자부했다.

내가 맞장구를 친 순간 말실수를 한 이후 살짝 굳어있던 디아나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내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대차게 착각해버린 디아나가 알아서 다음 이야기를 더 풀어놓기 시작했으니까.


"애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풍조 자체가 문제다."

덕분에 디아나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흔히 말하는 출세지항형의 인간이었다.


'남자!'보다는 '출세!'를 외치는 타입이랄까.

흔히 뇌가 아랫배에 달려있다고 알려진 이 세계의 여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태도였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미 뒈져버린, 그러니까 남녀의 역할이 뒤바뀌지 않은 세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여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일과 출세에만 매달리는 놈들도 있었으니까.


디아나는 그런 놈들의 여자버전이었다.

그녀는 성욕보다 더 강한 출세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공 놈한테는 왜 관심을 보인 건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알고보니  세계의 여자가 출세하려면 결혼은 기본사양이라는 것.

 그런고 하니 그게 여자로서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남자하고 맺어지는 게 말이다.


주입된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보긴 했지만,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의 기억 속에 있는 나름 한가닥 하는 마을 어른들은 하나같이  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지 못한 어른들은 마을에서도 깍두기 취급이었고.

능력=남자라는 인식이 워낙 깊게 박혀있다보니 이 세계에서 능력있는 노처녀란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환상 속의 생물이라 할  있었다.

처녀비치나 처녀서큐버스 같은 거랄까.


본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옆에 남자가 없다면?


하자 있는 년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주변 이들이 어딘가 문제가 있으니까 능력이 있는데도 결혼하지 못했다고 알아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주변사람들에게 박혀버리면?

자연스럽게 출세길이 막히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디아나가 주인공 놈한테 관심을 보인 것도 바로 그런 인식 때문이었다.

기사로서 출세하고 싶어하는 그녀였기에 그녀에게 있어 결혼은 좋든 싫든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이왕 할거라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주인공 놈을 찝은 것이었다.

생긴 게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시발..'

개같은 주인공 버프 같으니라고.

피차 나쁘지 않게 생긴 건 이쪽도 마찬가진데 얼굴이 귀염상이라는 이유로 히로인 후보의 관심을 독차지하다니.


속으로 쯧하고 혀를 차면서도 디아나의 발언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다보니 거리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상업지구에서 중산층이 생활할 법한 동네로, 그리고 거기서 또   있는 이들이 살만한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디아나의 저택, 아니 앨런 가의 저택은 바로  거리에 속해있었다.

'오..'


그리고 디아나가 자기네 집이라고 소개한 저택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다시 한  결심했다.


어떻게든 주인공 놈쪽을 향해 돌아가있는 디아나의 관심을 내쪽으로 돌리고야 말겠다고.

"아가씨? 이런 시간에는 어쩐 일로.."

디아나가 임무 중에 저택을 찾은 게 그리도 의외였던 걸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집사로 추정되는 사용인을 상대로 디아나는 날 소개했다.

"이쪽은 이번에 학원에 입학하기로 한.."

"이안 데일입니다."

"그렇다는 군. 아무튼 기숙사가 개방될 때까지 우리 저택에서 신세지게 되었으니 집사가 알아서 챙겨줬으면 좋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디아나가 챙겨주라는 말을 한 순간 집사라 불린 여인의 얼굴 위로 묘한 미소가 걸린 게 누가봐도 나와 디아나의 사이를 놓고 요상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지만..


"그럼 난 다시 돌아가보겠다."

디아나는 굳이 그걸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한 번 찡그렸다가 말았을 뿐.


열심히 행복회로를 불태우고 있는 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한들 통하지 않는다는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저벅저벅하고 그리브 특유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사방으로 떨치며 디아나가 떠나가고, 졸지에 집사와 저택 현관에 단둘이 남겨진 나는 꽤 묵직한 눈빛을 받아야만 헀다.

 예비 며느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이 세계 기준으로 하면 사위인가?'

아무튼 굉장히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정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디아나가 오해를 바로잡고 떠나갔다면 그에 맞춰서 행동했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이용할 수 있는  이용해 줘야지.'


보나마나 디아나가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봐왔을텐데 그렇다는 건 그녀에 대해 가족만큼이나 잘 아는 게 눈앞에 있는 집사양반이라는 소리 아니겠는가?

잘만 구슬린다면 분명 훌륭한 정보제공자로 둔갑할 터.

"그..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그래서 일단 조심스럽게 나갔다.

정확히는 예의 바르게.

 하던 짓을 하려니 팔뚝에 닭살이 돋아나는  같았지만 꾹 참으면서 이 세계가 남자한테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서 얌전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선보이니 집사의 얼굴 위를 맴돌던 흐뭇함의 색이 한층 더 짙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편하게 집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게 이 저택에서 제 역할이니까요."


"그래도.."


나보다 한창 어른인데 어찌 감히 그러겠느냐.

꼭 그리 말하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다가..

"그, 그럼 집사님은 안 될까요?"

지금쯤 그녀의 안에 각인되었을 내 이미지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그게 편하시다면요."

그 말 뒤로 따라붙은 건 살짝 어색한 침묵이었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내가 머물게 될 방이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집사 쪽에서 먼저 눈치채주길 바라면서.

오랫동안 남의 수발을 들며 자연스럽게 길러진 눈치가 어디간 건 아니었던 걸까.

"아."


그런 소리를 낸 집사가 이내 빙그레 웃어보였다.


"막 수도에 도착하셨을테니 많이 피곤하시겠군요. 일단 방부터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나온 즉시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니 다시 한 번 살짝 웃어보인 집사가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택의 규모가 상당하다보니 움직일 때마다 사용인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안내하고 있는 집사마냥 태반이, 아니 전부가 여자였다.

호흡기를 달고 있긴 하지만 아직 살아있기는 한 내 원래 상식을 기준으로 따지면 메이드 역할인 남자 사용인은 왜 없나 했는데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를 자원으로 보고 있는 이 놈의 나라에서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으니까.


남자가 일을 하길 원해도 당장 끌고가서 결혼시키겠지.


아무튼  저택에서 유일하다시피한 남자다보니 마주치는 이들마다 내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다.


소가주님의 손님이라는 소개의 탈을 쓴 경고성 멘트에 관심은 언제 피어올랐냐는 듯 바로 사그라들어버렸으니까.


"이곳입니다."

집사가 안내해준 방은 저택 입구를 기준으로 2층의 서쪽 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은..


"소가주 님 방은 저쪽이지요."

디아나가 머무는 방이었다.

방과 방 사이의 거리가 상당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층에 방을 배정해줄 줄이야.

덕분에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집사란 양반이 나를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를 말이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사실 이렇게 머무는  허락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나야 뭐, 막사에다가 맨바닥만 아니라면 딱히 상관없었다.

하물며 침대에다가 깔끔하기까지  방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니 그런 내 표정을 확인한 집사 양반이 흡족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쉬십시오. 식사는 준비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피곤할 게 뻔한 나를 더 괴롭히지 않겠다는 걸까.

집사가 아예 문까지 손수 닫으면서 방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방 안에 홀로 남겨져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나는 그대로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푹신했다.

시트도 매일 빨아서 교체하는지 앉자마자 밑에 깔린 이불에서 햇빛 특유의 마른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그 냄새를 만끽하면서 아까 집사가 말해준 디아나의 방이 있는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일단 집까지 밀고 들어오는데는 성공했는데..'


이 다음부턴 어떻게 한다?


일단 내게 허락된 시간은 3일 정도였다.


3일 뒤면 학원 측에서 기숙사를 개방할테고, 그렇다면 더는 이곳에 머물지 못할테니까.


그 말인 즉슨?

3일이라는 시간동안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한 성과를 내야한단 소리였다.


문제는  세계의 여자치곤 디아나의 가드가 꽤 두텁다는 점이었다.

남자보다는 출세에 더 관심이 있는 그녀를 상대로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뭔가 썸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봤다.


가능하긴 할련지.

'미친 척하고 몸으로 들이대봐..?'

그러다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 나이스한 아이디어같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올곧은 성격의 디아나다.

그리고 뭣보다 나는 이미 그녀를 상대로 진과의 연애를 도와주겠노라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런데 몸을 이용해 그녀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려고 든다?


디아나의 성격상 그런  행동을 좋게 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올곧은 성격을 가진 디아나의 기준은 그녀가 가진 올곧음에 맞춰져있을테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포기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무기기도 했다.


애초에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것만큼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도 또 없었으니까.

고로 어떤 식으로든 써먹을 필요가 있었다.

설령 무기의 형태를 조금 바꾸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유혹은 하되..'


대놓고, 노골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디아나가 유혹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그녀를 유혹한다면?


그래도 효과가 없을까?

생각을 이어나가다보니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에 나는 디아나라는 여자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의문이 뒤따랐다.

그녀는 정말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하는 의문이.

이 세계의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이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그녀는 흔히 말하는 운동계였다.


'운동계는..'


성욕이 강한 편이고.

남녀 가릴 것 없이 그랬다.

내가 봐온 모든 운동계의 인간들이 그랬으니까.


기본적으로 가진 성욕에다가 운동으로 인해 끓어오른 성욕까지.

그런데도 남자에 관심이 없다고?

정말로?


'그럴 수가 없을텐데..'


그렇다면?

긴지 아닌지 마땅히 확인해봐야겠지.


어렵지 않게 확인을 위한 수단을 생각해낸 나는 코밑을 맴도는 햇빛 냄새를 맡으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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