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골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그럴 수밖에.
방금 내 발언은 갓 대학에 입학한 여자 새내기가 처음보는 남자 선배를 상대로 '선배네 집에서 자도 돼요?'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는 꼴이니까.
'개꿀인데?'
는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놈이나 할 법한 생각이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의아하게 생각하고 경계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디아나가 보인 반응은 딱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래도 그녀는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기 보다는 다른 선택을 했다.
"숙소를 구하지 못했나?"
일단 내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사정부터 파악해봐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조심스럽게 던져진 질문 덕분에 디아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마냥 딱딱하게만 보여도 그녀는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날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
숙소비를 빌려주던가 하다못해 날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하던가 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나 혼자서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모를까 내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주인공 놈이 바로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까.
헌데 여기서 고개를 끄덕여버리면?
기껏 해놓은 호감도 작업이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건 물론 주인공 놈이 이상하게 여기고 날 의심하게될 공산이 컸다.
내 목표를 생각하면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다행히도 방금 내 발언은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내뱉은 게 아니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후속으로 내뱉을 발언도 생각해둔 상태니까.
"구해놓은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해서 일단 그리 내뱉은 뒤 말끝을 흐렸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런 내 행동에 디아나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런데?"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둘이라고는 하지만 남자 둘이서 아는 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며칠을 보내야 한다는 게.."
느그들이 이렇게 몸소 순찰까지 돌 정도면 남자를 노리는 모종의 세력이 많다는 뜻 아니냐. 그런데도 이렇게 불안해하는 신입생들을 여관에 덜렁 내버려 둘 것이냐.
대충 그런 뉘앙스로 내뱉으니 나름 일리가 있다고 여긴 것인지 디아나가 '흐음..'하고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췄다.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대뜸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서 나한테 잠시 의탁하고 싶다?"
"네.."
"내 뭘 믿고?"
나도 여자인데 날 신용할 수 있겠느냐.
그녀는 그리 묻고 있었다.
그래서 받아쳤다.
"믿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흠?"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학원에서 지시를 받고 순찰을 돌고 계셨다고."
그 말인 즉슨?
학원 측에서 그녀를 신뢰할만한 인물이라 봤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 점을 지적하니 디아나가 허를 찔렸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 시점에서 사실상 결론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내 요청을 들어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제 여기서 별다른 변수만 없다면 이대로 예비 히로인의 집에 입성..
"..전 됐습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인공이라는 놈이 눈치도 없이 초를 쳤다.
'시벌 놈이..'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초를 쳐?
아니지 잠깐만.
나쁘지 않을지도..?
기존에 상정하고 있던 건 놈이 따라오는 거였지만, 이왕 이리된 거 놈과 잠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놈이 따라오지 않으면 노마크 찬스 상태에서 디아나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그걸 티낼 수는 없으니..
"괜찮겠어..? 그러지 말고.."
놈을 향해 걱정을 내비췄다.
물론 대답은 전과 같았다.
자신은 괜찮으니까 나 혼자서라도 들어가라는 것.
그런 식으로 고집을 부려대니 어쩌겠는가?
물러날 수밖에.
물론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면.."
둘러메고 있던 꾸러미를 뒤져 그 안에 든 목패같은 것을 꺼내든 나는 그것을 놈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미 독자노선을 선언한 상황에서 내가 건네는 걸 받기가 좀 그랬는지 놈은 사양하려 했지만 억지로 쥐여줬다.
그러니 날아와 꽂힌 건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서 설명해줬다.
"거기 보면은 여관 이름이 적혀있을 거야."
그걸 들고 그 여관으로 가면 이 몸의 형이 예약해놓은 방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걸.
내 말을 들은 녀석이 다시 그것을 내게 넘기려 했지만 받지 않았다.
"이왕 잡아둔 방인데 아무도 안 쓰면 아깝잖아."
"으음.."
방 잡을 돈도 없으면서 고민하는 척 하기는.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는 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끌끌하고 혀를 차고 있자니 결국 받기로 한 것인지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내어준 패를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그대로 떠나려는 놈을..
"잠깐."
디아나가 불러세웠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꼴에 예비 히로인이라고 주인공한테 무언가 끌림같은 거라도 느낀 걸까?
그래서 놈을 설득해보려는 것이고?
하여간에 적폐 같으니라고.
이 와중에 살짝 불안한 점이 있다면 놈이 디아나의 설득에는 마음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히로인과 주인공 사이에는 그런 걸 가능케할 보이지 않는 무언가, 인비저블 썸띵이 있으니까.
'갈 거면 빨리 가라고!'
속으로 그리 소리치는 사이 떠나려다가 멈춰선 진을 빤히 바라보던 디아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리도록."
명령조로 그리 내뱉는 게 아닌가?
놈을 설득하려던 게 아니었던 걸까.
그렇게 진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디아나가 아까 보여준 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잡힌 패가 푸르게 발광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부장? 부르셨습니까?"
디아나처럼 허리춤에 검을 패용한 여자 하나가 우리가 서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가볍게 손을 들어올려 그녀를 맞이한 디아나가 그때까지도 멀뚱히 서 있던 진을 새로이 등장한 여자 쪽으로 살짝 떠밀었다.
"신입생이다. 예약해놓은 숙소가 있다고 하니 그 앞까지 안내해주도록."
"앗, 넵!"
이 세계에서는 귀염귀염한 상이 더 잘먹히는 걸까.
졸지에 제 앞까지 떠밀려온 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시 헤벌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이제와서 표정관리를 해봐야 이미 늦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가 많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데려다주고 오도록."
"네엡!"
진의 눈속에 옅은 경멸의 기색이 섞여들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갈색머리의 여기사가 자꾸만 솟아오르려 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진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렇게 골목 안에 디아나와 둘만 남겨진 순간이었다.
"그럼."
멀어져가는 둘을 바라보던 그녀가 내쪽으로 돌아섰다.
그에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피식하고 웃은 그녀가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움직이지."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많이 바쁜데 직접 안내까지 해주겠다는 걸까.
거참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속으로 씩 웃으면서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니 놓치지 말고 잘 따라오라고 당부한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잽싸게 그런 그녀의 뒤로 따라붙으니 살짝 속도를 늦춰서 나와 보폭을 맞춘 그녀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하고는 친구사이인가?"
"네?"
주인공 놈에 대해 묻길래 주변 소리에 묻혀서 못 들은 척 했더니 아예 쐐기를 박더라.
"그 소년 말이다."
빌어먹을 주인공 버프 같으니.
누군 관심 한 번 끌어보자고 대놓고 들이대는 거나 다름없는 짓까지 했는데 가만히만 있어도 관심을 한몸에 받는 구만.
말 그대로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어떻게 답을 하면 좋을 지 고민했다.
일단 눈치를 보아하니 주인공 놈을 향한 디아나의 마음은 아직 호감까지는 아니고 살짝 관심있는 수준?
딱 그정도인듯 했다.
그렇다면..
"글쎄요. 일단 같은 동네 출신이긴 합니다만.."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살짝 말끝을 흐렸다.
"같은 동네 출신이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다?"
"애초에 수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딱히 접점이랄게 없었거든요."
같은 반이라고 다 친한 건 아니지 않은가?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라도 그럴진데 같은 동네라면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꽤 그쪽을 신경쓰는 것 같던데."
그 점을 찔러올 줄이야.
하긴 아까 내 행동은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엔 좀 무리가 있긴 했지.
그나저나 나하고 주인공 놈의 관계는 왜 이리 궁금해하는 걸까.
"그래도 동향사람이니까요. 여기선 피차 같은 처지인데 고향사람끼리라도 서로 보듬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속으로 의문을 표하면서도 디아나의 물음에 답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아, 이거 그거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디아나의 반응을 목도한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왜 자꾸 나와 주인공 놈의 관계에 대해 캐물었는지를.
그녀는 지금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 관심을 끌어당긴 남자가 어떤 놈인지, 그리고 그 놈과 제법 친밀해보였던 날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교두보로 써먹을 수 있을 지를 말이다.
'이거 참..'
기분이 개같았다.
내가 앞에 버젓이 서 있는데 주인공 놈만 생각한다 이거지..
그래서 웃었다.
설마 다른 이도 아니고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흠.. 아니다."
아니기는.
누가봐도 관심있어서 그러는 게 한눈에 보이는데 말이다.
못마땅한 마음에 속으로 쯧하고 혀를 차던 것도 잠시,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잘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어봐야 주인공을 향한 다이나의 호감만 무럭무럭 자라날 거다.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겠지.
그 '뭐라도'가 설령 팔자에도 없는 큐피드 짓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안 그래도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고민 중이었으니까.
주인공 놈과의 연애를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접근하면 놈에게 관심이 있는 디아나도 섣불리 쳐내려 들진 않을 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무진장 쓰려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는 자꾸만 비틀어지려고 하는 입매를 억지로 바로 잡으며..
"..혹시 관심있으십니까?"
그녀의 의중을 떠보듯 내뱉었다.
"뭐?"
나보다 살짝 앞에서 걸어가던 디아나의 걸음이 멈춘 것도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
그것을 마주하며 살짝 웃어보였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소년' 말입니다."
굳이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중심을 찌르고 들어가니 남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살짝 민망했는지 디아나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리는데..
빌어먹게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을 정도로.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관심있으시면 도와드리려고요."
"음?"
내 말에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씰룩이는 디아나의 모습은 꼭 '별로 안 친하다며?'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 시선을 받으며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같은 동네 출신이긴 하니까요."
어차피 아는 것도 없을 텐데 내 도움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런 뉘앙스로 내뱉으니 일리가 있다고 느낀 건지 디아나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말을 얹었다.
"선배도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뭐라도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된다는 뜻으로 살짝 말끝을 흐려보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에는.
그야 그렇겠지.
올곧은 데다가 배려심까지 깊은 그녀의 성향상 이렇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후배의 호의를 섣불리 거절하긴 힘들테니까.
"으음, 자, 잘 부탁하마."
아까 별로 안 친한 사이라 했더니 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남자 후배에게 이런 도움을 받는 경험이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런 걸까.
어정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를 바라보며 슬며시 입매를 비틀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노력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