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화 (3/366)



〈 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골이 살살 땡겨오는 느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것도 잠시,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언제까지 신세를 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이 몸의 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변에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이 제법 따끔했으니까.

그 와중에 몇 개는 거의 뭐 내 몸을 아주 노골적으로 핥는 느낌이라서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이 남자를 따먹고 싶어서 안달난 여자들로 가득  정신나간 세계라는 것을.


'허허허..'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까지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기존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상식이라는 놈이 다급하게 외쳤다.


[상식: 여긴 미쳤어..! 미쳤다고..! 어서 도망쳐..!]

도망은 개뿔.

뭐, 자살이라도 하라고?


이제  시작한 거나 다름없는 지금 도망가면 꼼짝없이 나락행이다.

분명 노예같은 걸로 다시 태어나서 박박 구르겠지.


그런 꼴을 당하는  초회차로 충분했다.


해서 일단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니..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이에게는 그런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희한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푸욱하고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이 정신나간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상식이라는 놈이 절규를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고 있으니..

'아니지 잠깐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딴 세계에 떨어진 게 정말 좆된 일인가하는 생각이.

빠릿빠릿하게 조연놀음을 할 생각이었다면?


'ㅈ 됐 다!'를 외칠만한 상황이 맞긴 했다.

남녀가 역전된 세계라는 건 기득권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는 건 기득권이 아닌 입장에서 그들의 저항까지 받아가며 엔딩을 향해 내달려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이미 이번 회차는 던지기로 했잖아.


애초에 달리질 않을 거라면?


장애물에 걸려서 넘어질 걱정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오히려 날로 먹을거라면  편이 차라리..'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 나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나았다.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탓에 이 세계에서 주로 경제활동을 하는 쪽은 남성이 아닌 여성 쪽이었으니까.

그뿐만이랴?

군대도 여성이 가고, 심지어 일부다처가 이 세계에서는 보통이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어찌어찌 잘만하면 합법적으로 기둥서방과 같은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여자 쪽의 능력이 상당히 좋아야겠지만..


그럼 능력 좋은 년으로 골라 잡으면 그만이지.


마침 상황도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라는 놈이 내 눈이 닿는 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주인공은 일종의 꽃과 같아서  향기에 이끌린 히로인이라는 벌들이 주변에 꼬이기 마련이다.

남녀의 입장이 내 기준으로 정상적인 세계에서도 그럴진데 하물며 이런 세계라면?


굳이 입아프게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  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를 따먹고 싶어서 안달난 '능력좋은' 예비 히로인들에게 둘러쌓이게 될 것이다.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 근처에 빵빵하기 그지없는 남자들이 꼬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중에  명만 낚아채도..'


평생 걱정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입장에서야 히로인이 될지도 모르는 이 중에  명을 내게 뺏기는 셈이 될테지만 주인공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은 주인공의 옆에서 그를 격려해주고 의욕을 고취시켜주며 때때로는 목표를 달성하는 걸 돕는 조력자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현실의 히로인들은 장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내가봤던 히로인이라는 년들이 모두 그랬다.


고로 이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수 있었다.


주인공은 방해받지 않고 엔딩까지 달려갈 수 있어서 좋고, 나는 편안하게 놀고 먹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계획을  바꿔야할 것 같았다.


기존의 계획은 주인공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만 나서는 것이었지만..

히로인이 되고자 덤벼드는 년중에서 우량주를 낚아채려면 주인공의 옆에 붙어있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테니까.


문제가 있다면 아까 살짝 지랄을 해댄 탓에 지금쯤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내 인상이 나쁜 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게 해결이 가능했다.

내가 뭐 패드립을 박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맨입으로 사과만 대뜸 건네는 건 성의가 없어보일테니까..


적당히 기름칠을 하는 게 좋겠지.


마침  기차에 매점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보자..'

뭐가 좋으려나.

적당히 아무거나 던져줘도 잘 먹을 나이긴 한데..


식당칸은 여성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점원까지도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들어가자마자 날아와꽂히는 시선들이 제법 따끔했다.

"잠시만요.."


뭘 먹을지 고르고 있는 듯 매점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이들을 조심스럽게 팔로 떠밀며 그 사이로 파고드니 순간 몸이 닿은 이들이 움찔하며 떨어져나갔다.

'아.'


여긴 그런 세계였지.


살짝 당황한  하면서도 은근한 눈길을 보내오는 걸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점원 앞에 섰다.

음, 어디보자 뭘 좋아하려나.

역시 주인공이라고 해야할지 중성적인 미를 뿜뿜 뿜어내던 주인공 놈의 상판데기를 떠올리며 관상학적으로  좋아할 상인가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으니..


"이, 이거 맛있는데."


아까 나하고 몸이 부딪혔던 이들 중 한 명이 목소리를 살짝 떨면서 뭔가를 가리켰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니 만쥬같은 것이 그려진 박스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에 크림같은 게 들어있는 달달한 빵 종류인 모양.


달달한 간식이라.

나쁘지 않지.

솔직히 킹상학적으로 볼 때 뭘 줘도 맛만 있으면 다 잘먹을 상이긴 했지만 단 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무니까.

"이걸로 하나 주시겠어요?"


"네에."

기억 속에 남아있는대로 상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돈주머니를 꺼내 계산을 끝내고 돌아가려고 하니..


"그..!"

용기있게 메뉴를 추천했던 여자가 다급하게 말을 붙여왔다.


 세계 기준으로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상식을 기준으로 하면 남자가 모르는 여자한테 말을 붙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어디보자.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니 제법 나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수줍게 손을 꼼질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얼굴을 발그레하니 물들인채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기분이 뭐랄까 굉장히 새삼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저런 얼굴을  여자를 상대하는  언제나 주인공의 몫이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면 참 분에 겨운 상황이라   있었지만..

'흠.'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눈앞의 상대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으니까.

히로인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내가 본 히로인들 중에는 수수한 타입의 히로인들도 몇 명 있었지만, 그녀들은 말만 수수하지 저마다 엄청난 무기 하나씩을 숨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보여도 벗으면 굉장하다던지 꾸미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헌데 눈앞의 여자는..


누군가 나라시라도 쳐놓은 것마냥 앞섬 쪽이 평평했다.


평평해도 어찌나 평평한지 어깨를 번지점프대로 삼아서 그대로 수직낙하를 해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걸어온 여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런 내 심정이 눈 속으로 고스란히 깃들기라도 한 것인지 여자의 어깨가 급격하게 쭈그러들었다.

그러더니..

"아, 아니에요.."


급소심해져서는 그대로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아니라면야 더 잡혀있어줄 이유도 없겠지.

슬쩍 웃은 나는 그대로 간식이  상자를 들고 기차칸으로 복귀했다.

그러고나니 눈으로 들어온 건 역시..

'확실히 눈에 띄긴 하네.'

독보적인 미모를 뽐내고 있는 주인공 놈의 모습이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수도로 향하려니 가슴이 바운스바운스 두근대면서 복잡하기라도  걸까.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켜두고 있는 놈을 근처에 앉은 여성들이 흘깃흘깃 훔쳐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시선 강간이라는 단어가.


훔쳐볼거면 표정부터 어떻게 하던가 입을 헤하고 벌린 채 연신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에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얼굴이 발그레하니 물든 것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보아하니 아마 지금쯤 머릿속에서 열심히 살색투성이의 광경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떡줄 놈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사발 째로 들이키는 꼴이었으니까.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겠는가?


끽해봐야 엑스트라 A나 B에 지나지 않을 이들이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고 한들 주인공과 그들은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뭐, 지금이 그나마 희망이 좀 있긴 하지.'

운명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가 본격적으로 구르기 시작하고 난 후라면 근처를 맴도는 예비 히로인들 때문이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져서 어떤 어필을 하던 씨알도 안 먹힐테니 말이다.

그에 비해 아직 제대로된 예비 히로인들과 접하지 않은 지금이라면?


약간이지만 가능성이 있긴 했다.


내가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옆좌석도 같이 구매한 걸까.

아니면 타이밍 좋게 자리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걸까.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노마크 찬스로 놈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놈을 부르니 창문 쪽을 향해 돌아가있던 고개가 내쪽으로 돌아왔다.


'거참..'

이미 창문으로 내가 다가오는  봐놓고서는 이제와서 눈치챈 척 하기는.

"왜?"


아까 그런 식으로 대했기 때문일까.

귀로 날아와 꽂히는 목소리가 제법 퉁명스러웠다.

"그.. 아까는 미안했다.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내가 아까 널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은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충 그렇게 말하는 느낌으로 볼을 긁적이면서 아까 식당칸에서 챙겨온 간식거리를 놈을 향해서 내밀었다.


정중하기 그지없는 사과와 어우러진 뇌물의 효과는 상당했다.

마침 입이 심심했는지 놈의 입꼬리가 위를 향해 움찔하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뭐.. 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간식만 낼름 받아먹고 끝내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이번 주인공 놈은 그렇게까지 양심없는 놈은 아닌 것 같았다.

간식만 전해주고 돌아가려는 '척'을 하니 놈이 그러지 말고 같이 먹자면서 제 옆자리를 권해왔으니까.

"응? 앉아도 돼?"

"빈좌석이야.  살때 옆자리 것도 같이 구매했거든."

그렇다면야 사양할 이유는 없겠지.

마침 필히 알아내야만 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자."


포장은 또 언제 뜯었는지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 중에 하나를 날 향해 내미는 놈의 성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그걸 우물거리면서..

놈의 행동을 흘깃흘깃 관찰했다.


'이놈 이거..'


일단 내츄럴은 아닌 것 같은데.

개짓거리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쌓여온 짬밥이 속삭였다.


눈앞의 놈은 회, 빙,  중에 하나일 거라고.

문제는  중에 어느 쪽이냐는 건데..

일단 회귀자일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아까보니 제게 날아와 꽂히는 여자들의 시선을 제법 즐기는 듯 했으니까.

그리고  세계의 남성들은 여성들의 그런 시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헌데 그걸 즐긴다?

그럼 분명 둘 중 하나겠지.

여자가 남자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 세계에서 넘어왔던지 아니면  세계 기준으로 '남자'답지 않게 발랑까진 놈이던지.


그리고 놈과 슬쩍슬쩍 대화를 주고받아본 결과 발랑까진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사람 속이다보니 그런 모습마저도 연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긴 했지만..


저게 연기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령님 박수를 칠 의향도 있었다.


저 모습이 연기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이 연기의 신이라는 뜻일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떠보기나 해볼까?


해서 표정을 살짝 바꿨다.

누가봐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걸 알 수 있도록.

그 상태로 주변을 흘깃 훑은 뒤..

"그.. 괜찮아?"


"응? 뭐가?"

"아까 전부터 다들 네쪽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게 부담스럽지 않느냐.

그걸 걱정하는 척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니 놈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응? 딱히?"


어딘가 살짝 억눌려있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데 남들 앞에서 그걸 티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걸 목격한 순간 반쯤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빙이나 환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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