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 ㅈ대로 할 거라고 마음 먹었다고 해서 진짜 좆대로 했다간 상황이 좆같아질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행동방침을 정해두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제일 시급하고도 신중하게 정해야할 사안은 뭐니뭐니해도..
'주인공 놈을 어떻게 대하냐는 건데..'
바로 그것이었다.
주인공.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구마를 백 개쯤 원샷 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일단 한숨부터 박았다.
맘 같아서는 주인공이고 뭐고 '난 내 알아 할테니 너도 니 알아 사세요.'를 시전하고 완전히 남남처럼, 아니 아예 마주치지도 않고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긴 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됐다.
한순간의 분에 못 이겨서 그 따위 선택을 했다가 주인공이라는 놈이 허무하게 뒈져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대로 6회차를 건너뛰고 바로 7회차로 돌입하게 될 테니까.
이미 다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마당에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빌어쳐먹게도 상관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전의 회차에서 거둔 성적은 새로운 회차가 시작될 때 소급 적용되어 반영되니까.
이전의 회차를 말아먹었으면 그만큼의 패널티를 받고, 이전의 회차에서 선방하는 모습을 보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어드밴티지를 갖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엔딩이라는 이름의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굴러야할 저주의 부역자들이 '아몰랑!'을 외치며 탱자탱자 놀고먹는 걸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자 안타깝게 실패를 맛본 이가 좌절해서 발버둥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걸 막기 위한 일종의 방지책인 셈인데..
고로 주인공과 엮이기 싫다고 개썅마이웨이를 택했다가 주인공이 아무고토 이루지 못하고 어디 객지에서 허무하게 뒤져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7회차에서 개처럼, 아니 차라리 개가 낫겠다 싶을 정도로 박박 구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로 주인공과 엮이지 않기 위해 떨어진다 할지라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않는,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주인공에게 사망각이 떳을 때 즉각 개입해서 그걸 차단하는 게 가능할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붙기에는..
'피곤해..'
초등학생 꼬마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마취침을 뿅뿅 쏴대는 만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주인공이라는 놈들은 걸어다니는 재앙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재해 중에서도 소용돌이라고 해야할까.
놈의 주변에 있으면?
좋든 싫든 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버리게 될 터.
그런고로 최적의 포지션은 역시..
적당히 아는 사이 정도?
딱 그 정도가 좋겠지.
무슨 일이던 적극적으로 도울 사이는 아니지만 여차할 때 도움의 손길을 턱턱 내밀 순 있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눈앞에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로딩바가 멈춰섰을 때 뭐가 튀어나오는지가 상당히, 아니 미친듯이 중요했다.
내가 이렇게 마음먹었다고 해도 적절한 시작조건이 걸리지 않으면 말짱 황이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전회차에 어떻게든 엔딩을 보겠다고 아둥바둥한 게 있다보니 이번만큼은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띠링
경쾌하기 짝이 없어서 더 빡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와 함께 새롭게 갱신된 창 안에는..
-이안 데일
-발데스 프리처드
두 개의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저것들이 이번 회차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시작 신분이라는 건데.
'두 개?'
고작?
설마 마지막에 난죽택을 시전했다고 평가에서 점수가 깎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두 개라니.
초회차에도 세 개는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시발..'
역시 아무리 좆같아도 끝까지 비벼봤어야 했나?
새삼 후회가 몰려왔지만 지금의 심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할지라도 솔직히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개같았으니까.
'아니지 아니야.'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더 생각해봐야 뭐하겠는가?
어차피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그 시간에 차라리 선택지랍시고 주어진 저 두 개를 살펴보는 게 몇 배는 효율적일 터.
그런 생각을 하며 일단 위에 자리한 것부터 펼쳐보니 두 개밖에 안 되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내용물이 나쁘지 않아싿.
우선 '이안 데일'이라는 왠지 모르게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졌을 것만같은 놈과 '주인공'의 관계는 동향 친구였다.
정확히는 같은 동네에서 살다가 같은 시기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함께 수도로 상경하게된 사이라고 해야할까?
마음에 드는 점은 그 전까지는 주인공과 데면데면한 사이라는 점이었다.
'괜찮은데..'
원하던 것보다 거리감이 가까운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거야 내가 알아서 거리를 조절하면 그만이고..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느낌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것도 잠시, 일단 밑으로 내려갔다.
밑에 있는 놈이 더 좋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확인하게 된 '발데스 프리처드'라는 놈의 특징은..
우선 돈이 많았다.
그리고 동갑내기였던 이안이라는 놈과는 다르게 주인공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배니 어쩌니 하는 말이 주저리주저리 적혀있었고.
이쪽도 꽤..
나쁘지 않았다.
돈이 많다는 설명이 보란듯이 적혀있을 정도면 진짜로 많다는 소리였으니까.
이쪽을 택하면 그 빵빵한 금력을 이용해 주인공 놈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동네 친구'대 '돈많은 선배'라.
둘다 장단점이 있다보니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해서 이번에는 둘의 외모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솔직히 어지간이 좆같이 생기지만 않았으면 딱히 상관없는 입장이긴 했지만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이왕이면 잘생긴 편이 좋지 않겠는가?
비슷한 조건이라면 말이다.
해서 이안이라는 놈의 와꾸부터 확인해봤더니..
"오.."
예상과는 달리 샛노란 금발에다가 호쾌한 인상을 가진 남자의 사진이 튀어나왔다.
미남까진 아니더라도 훈남 소리는 들을 법한 얼굴이랄까.
그런 얼굴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피지컬이었다.
188에 달하는 키와 평소에 턱걸이 좀 조졌는지 어깨가 떡 벌어진 근육질의 몸까지.
떨어지게 될 세계가 어떤 곳인지 모르니만큼 피지컬이야 좋으면 좋을수록 좋았다.
야만이 판치는 세상이라면 목숨을 붙들어두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 반대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까.
하다못해 여자 꼬실 때 매력포인트라도 되어주지 않겠는가?
'우선 합격.'
이리되니 자연스레 남은 한쪽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다른 쪽은 어떨까 싶어서 곧바로 확인해본 나는..
'어우.'
그대로 후퇴해 '이안 데일'쪽을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데스 프리처드'라는 놈은..
과연 제 힘으로 걷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돼지새끼였다.
거기에 인상도 썩..
솔직히 살이야 빼면 그만이라지만 다른 곳 신경쓰기도 바쁠텐데 굳이 그런 번잡스런 짓까지 해야겠는가?
이안이라는 고생할 필요도 없으면서 훌륭하기 그지없는 대안을 내버려두고서?
'돈이야 뭐..'
벌면 되지.
암 그렇고 말고.
뭐니뭐니해도 중요한 건 건강 아니겠는가?
고지혈증에다가 당뇨까지 의심되는 저런 몸으로 살기는 싫었다.
이왕 즐기면서 살기로 한 것 벽에 똥칠할 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딱봐도 건강해보이는 이안의 몸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해서 녀석의 이름을 택했더니..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발령대기모드로 진입합니다.
-곧 기억주입이 시작될 예정이니 준비하여 주십시오.
게임을 연상시키는 창들이 눈앞으로 쭈르륵 떠올랐다.
그래서 참..
기분이 좋았.. 아니, 좋같았다.
게임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내게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이러한 흐름들이 누군가에게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회의감이 들었으니까.
주인공이라는 놈들은 알까?
즈그들에게는 행복함으로 점철되다시피한 세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좆같은 세상일수도 있다는 걸?
피식-
하긴, 알 리가 없겠지.
알 리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막아야하는 적을 코앞에 두고 토낀다는 미친 짓거리를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대던 것도 잠시,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이 공간이 싫었다.
쓸데없이 현실의 내 방을 닮아있어서 이곳에만 오면 별 생각이 다 드니까.
딱 그렇게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워낸 순간이었다.
-기억주입이 시작됩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무기질적인 음성과 함께..
'이안 데일'의 일생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같은 건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정보의 폭격에 머리가 과부하를 호소하며 관자놀이 쪽이 제멋대로 지끈거렸다.
그 아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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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나는 내가 아닌 '이안 데일'이 되어있었다.
"괜찮아? 갑자기 땀을.."
그나저나 이 년, 아니 이 놈은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얼굴을 바짝..
눈앞으로 들이밀어져 있는 선이 고운, 미소년이라 불러야 마땅할 얼굴이 눈에 담긴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내 앞에서 걱정스러운 낯빛을 한채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 놈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주인공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그 순간 놈의 이름과 정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내 얼굴을 살피고 있던 놈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신경 끄지?"
"우풉?!"
졸지에 내 손바닥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알게된 놈이 퉤퉤하고 입안으로 들어간 걸 뱉어내며 날 노려봤지만 파리 내쫓듯 손을 휘휘 저으니 놈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걱정하는 척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설정에 적혀있었던대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보니 놈도 그렇게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
내게는 잘 된 일이었다.
막 이곳으로 떨어진만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안 데일이라는 놈의 기억을 고스란히 주입받긴 했지만, 알고만 있는 것과 이해하고 있는 건 분명히 다르니까.
일단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할 건 역시..
이 세계가 어떤 곳이냐는 것이겠지.
문명화된 세계일 것이냐 아니면 야만이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스펙터클 세계일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그 중간 쯔음에 있는 과도기일 것이냐.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확인해봐야할 것이 참 많았다.
일단 이렇게 기차에 몸을 실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꽤 문명화된 세계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찬찬히 살펴보기 위해 그대로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여태까지 거쳐왔던 세계들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 세계만의 특징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시발..'
내키는대로 살 거라고 마음 먹기는 했지만..
그게 이렇게 개막장스러운 세계에 걸려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남녀역전세계라니..'
뭐 이딴...
좇됐음의 요정이 날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느낌에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