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우게 된 게펜 평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소집된 연합군의 지휘관이자 제국의 이름높은 기사이며 개인적으로는 용사의 절친한 친구라 알려진 파르암 백작, 아니 남자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도 망한 것 같다고.
그렇기에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하고.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히로인의 싹이 보였던 년이 하필이면 금발에다가 거유에, 주인공보다 4살 연상이었던 게 잘못되었던 걸까?
아니면 전장에서 하도 구른 탓에 정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용사 놈이 불쌍해보여서 멘탈케어 좀 해줄 겸 연애 좀 해보라고 여자와 만나는 걸 묵인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놈이 책임감이라고는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어쩌다가 이 세계로 소환되었을 뿐인 애새끼였던 시점에서부터 이 파국은 예견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생판 모르는 세계로 떨어졌으면 남들 눈치라도 좀 보던가.
쓸데없이 자신감만 넘쳐가지고 여기저기 깔짝댄 탓에 그걸 수습하겠답시고 대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이래서 ㅈ같은 이고깽물들이 문제였다.
그것들 때문에 애새끼들이 지가 주인공이면 뭐든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설치는 것 아닌가?
당장이라도 뒤통수를 깨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가면서 수습할 거 다 수습해주고 떠먹여줄 거 다 떠먹여가면서 어찌어찌 마왕 놈하고 비벼볼만한 수준까지 끌고왔는데 이제와서 뭐?
더 소중한 게 생겨버렸으니까 그걸 우선시하고 싶다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고?
지도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튀는 게 양심에 걸리긴 했는지 주저리주저리 그 따위 뉘앙스가 담긴 말들을 열심히 주워섬기고 있는 용사의 마지막 편지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진심으로 용사의 대가리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애새끼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게 무슨 뜻인지 혹시 몰랐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동안 놈이 보여주었던 행동거지나 발언 따위를 생각해보면 빡대가리도 그런 빡대가리가 없었으니까.
학교 성적도 보나마나 뒤에서 세는 게 빠른 수준이었겠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찐따 티가 팍팍 났던 걸 보면 친구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이곳으로 소환당했을 때 그토록 신나서 설치고 다녔던 것 아니겠는가?
아니 그런 건 차치하더라도 그 새낀 정말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새끼라 할 수 있었다.
그 애새끼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면 적어도 토낄 때 용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성검은 놔두고 갔을 테니까.
어차피 용사가 그 능력을 이끌어낼 수 없는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성검은 그 자체로도 막대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성유물이었다.
신성결계의 핵 역할을 해주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그것만 있었어도..
그래, 버틸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겠지.
적어도 지금처럼 다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뛰어다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흐흐흐흐흐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이대로 다 뒤지고 사이좋게 멸망해버리는 수밖에는.
그 애새끼는 알까?
자신의 선택 한 번으로 얼마만큼의 생명이 죽어나자빠지게 될지?
수렁 속으로 빠져들듯 점점 더 흑화하던 남자를 건져낸 것은 막사를 박차고 들어온 한 여인의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백작님..!"
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도 있었지.
사실 눈앞에 있는 여자야말로 그 애새끼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순수한 이세계인 중에서는 말이다.
남자가 감히 제 막사를 침범한 불청객이자 전 성녀였던 여자를 관대한 태도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밖에 마왕군이..!"
참 불쌍한 여자였다.
한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애새끼의 행동 때문에 평생동안 지켜온 맹세의 진위를 의심받고 성녀에서 일개 수녀로 강등당한 여자.
생각해보면 그 애새끼가 튄 데에는 이 여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야 그 놈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테니까.
감히 주인공인 자신의 손길을 거부한 여자를 말이다.
그녀 때문에 현실에서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 얻은 PTSD같은게 재발했던 걸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더더욱 제가 무엇을 요구하던 다 받아주던 그 금발젖소년한테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는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로 여자를 맞이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스스로의 태도가 남들의 눈에는 어떤 식으로 비칠 지를.
다들 패닉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홀로 침착한 남자에게서 기이한 느낌이라도 받은 것일까?
기세 좋게 뛰어들어왔던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도 여자는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것도 잠시, 한시가 급하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다급히 입을 열어 외쳤다.
성채가, 그 자체가 인류의 목숨줄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침공받고 있음을.
"백작님 용사님은 어디에..!"
"없습니다."
"..네?"
여성으로서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까지 당할 뻔 해놓고서도 용사를 찾는 걸까.
"호, 혹시 뭔가 중요한 작전을.."
현실을 들려주었음에도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질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보고 싶었다.
용사란 새끼한테 그런 꼴을 당할 뻔 해놓고서는 여전히 놈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는 저 얼굴이 배신감과 절망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수녀, 아니 성녀님."
"..."
"용사는 도망쳤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험한 일이 용사에 의한 성폭행 미수였을 전 성녀님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 가혹한 진실이었던 걸까.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끄륵끄륵하고 배 안쪽에서부터 새어나온 것이 거품처럼 입가에 끼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젖히다가..
"그리고 인류도 끝장났습니다."
담담하게 선고했다.
이 세계가 사실상 끝장났음을.
"그, 그렇지 않아요. 아직 희망이..!"
"희망이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말려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싫었다.
힘든 것 하나 모르고 살아온 년놈들이.
세상이 얼마나 어렵고 더러운지를 모르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쓸데없이 세상을 꽃밭 아름답게 바라보듯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현실이 얼마나 씹창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희망, 희망이라."
"..."
"용사가 도망쳤습니다.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곳을 두고요."
"..."
"바깥이 아까보다 소란스러워진 걸 보면 슬슬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군요."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쓸데없이 전염성이 강하다.
하물며 절망이나 분노같은 부정적인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어찌어찌 도망친 용사를 잡아다가 다시 전선에 세운다 할지라도 이 군대가, 용사라는 희망의 상징에 대한 믿음 자체를 잃어버린 이 집단이 이전처럼 똘똘 뭉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용사가 언제 또 도망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끝났다.
머지 않아 이 군대는 와해될 것이고, 마족 놈들의 공세를 꿋꿋이 버텨주었던 이 요새도 곧 놈들의 발에 짓밟히겠지.
고로..
"뭘 하셔야겠지 모르겠다면.."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올려 날 가만히 응시하는 여자와 시선을 맞추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자살을 추천드립니다."
내 진심에 가장 가까운 말은 덤이었다.
설마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그녀가 아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자살을 추천한 것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전이라는 딱지가 붙긴 했어도 한때 성녀라는 이름으로 추앙받던 여자가 아니던가?
마족 놈들의 손에 잡히게 되면 어떤 꼴이 될지 굳이 보지 않더라도 눈에 훤했다.
분명 노리개처럼 굴려지다가 종극에 가서는 트로피처럼 전시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꼴로 전락해버리겠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그 꼴을 당하는 것보다야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죽는 편이 본인의 정신건강에도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추천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전 성녀님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당신은.. 미쳤어.."
미쳤다고?
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좆같은 꼴을 무려 다섯 번이나 봤는데 정신이 멀쩡하면 그게 오히려 더 비정상아닐까?
아무튼 깔끔하게 끝낼 생각은 없어보이니..
"그럼 좀 나가주시겠습니까? 피차 더 할 말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담담하게 뇌까리며 허리춤에 달고 있던 지휘관용 예도를 뽑아들었다.
개인적으로 검으로 하는 자결은 총으로 하는 것보다 많이 아파서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총도 개발못한 문명적으로 덜떨어진 세계인 것을.
가볍게 기운을 발출하니 푸른 기운으로 몸을 휘감은 채 도도하게 빛나는 검날을 바라보다가 성녀였던 여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얼른 안 꺼지고 뭐하냐는 뜻으로.
마치 마왕보다 더한 괴물이라도 바라보는 것마냥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그녀가 주춤주춤 물러나 도망치듯 막사를 빠져나간 순간.
내 다섯 번째 생도 끝을 고했다.
사인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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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졌던 의식이 돌아온 걸 느끼며 감고 있던 눈을 뜬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시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천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ㅈ같은 로딩공간이라 부르고, 집안에서는 발령대기소라 부르는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뒤통수를 퍽퍽 소리가 나도록 부딪혔다.
졸지에 해꼬지를 당한 침대가 제멋대로 출렁거리며 뒤통수 쪽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도저히 그걸 멈출 수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주인공이라는 놈한테 이렇게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게 될 거라고는 아무리 나라도 예상 못했으니까.
주인공이 생각치도 못하게 허무하게 뒈져버려서 망한 적은 있어도 주인공 놈의 통수질로 망한 건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예정되어 있었던 싸움만 제대로 풀린다면 엔딩을 볼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서 더 빡이 쳤다.
"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바아아아아아알."
그렇게 한참동안 침대에 누워 발버둥을 쳐대고 있으니 눈앞으로 떠오른 것이 내 화를 더 돋구었다.
[다음 발령지를 물색중입니다.]
-한줄 팁 : 가끔은 주인공들을 좀 풀어주는 건 어떨까요? 주인공들은 센서티브한 경향이 있어서 과한 구속을 받게 될 경우 망가져버릴 수도 있답니다!
센서티브?
좀 풀어줘야 한다고?
방금 내 다섯 번째 발령이 어떻게 씹창이 났는지 보고서도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여대는 걸까?
그렇게 격렬하게 분노를 뿜어내던 나는 누군가 주장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마냥 급격하게 우울해졌다가 종극에는 체념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힘들어.. 이제 그만할래.."
그래도 다섯 번째 발령을 떠나기 전까지는 실낱같기는 해도 내게도 어느 정도 희망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렇게 시작했던 다섯 번째가 이렇게 씹창이 나버리니 도저히 희망을 품을래야 품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조상님 때문이었다.
그 조상님인지 조상놈인지 하는 놈팽이가 쓸데없이 배신만 안 했어도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고생을 하는 일도 없었을텐데.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조연의 저주라는 놈에게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그동안 쌓이고 쌓인 것들이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하니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시발 주인공이라는 새끼들은 히로인이라는 년들하고 하하호호 연애질도 하면서 떡도 치는 데 누구는.."
연애?
그런 걸 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주인공이 사고친 걸 수습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뭣보다 어지간한 여자들은 다 주인공 놈의 차지였다.
그런데 의욕이 날 리가 있겠냐고.
"아, 안해요 안해. 더는 못해먹겠으니까 죽이든 살리든 소멸시키든 알아서 하십쇼."
혹시라도 그렇게 지껄이면 누군가에게 닿을까 싶어서 배째라는 식으로 나가봤지만 돌아온 것이라고는 다음 발령지를 물색중이라는 무기질적인 메세지 뿐이었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배째라는 식으로 나가봐도 이 조연의 저주라는 놈은 내가 주인공 놈을 도와서 한 세계의 엔딩을 보기 전까지 날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걸.
그렇지만 이제 조연 역할은 더는 무리였다.
맹세코 누군가 내게 또 그딴 역할을 강요한다면 1초만에 난죽택을 시전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