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3화 〉41. 헬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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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랑이떠나간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죽은듯 앉아있는 대통령도 있긴 했지만, 그것이 인식되지 않을 정도의 소름끼치는 정적이 있었다.
“….”
그의 입가에는 미소라고 할 지, 아니면 자조라고 할 지 모를 것이 걸쳐져 있었는데,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이가 삶의 마지막 순간 주마등을 마주하는 표정 같았다.
한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한에찬 것 같기도 하고.
운명을 원망하는가.
아니면 포기하여 해탈하였는가.
또르르.
굼뜬 움직임으로 유리잔을 채워넣고 입가에 가져가다 멈추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건가. 끝까지…내가 해야 하는 건가.”
채 마시지 못하고 다시 탁자에 내려놓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사랑은 그의 마지막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심지어는 ‘의미 없는 짓’이라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녀 앞에서 그는 한 순간에 망상을쫓는 한심한 인간이 되었다.
그래.
부정하지는않는다.
망상에 지극히 수렴하는 위험한 도박이니까.
“그래. 내가 해야지. 힘들더라도, 굴욕적이더라도, 내가 지켜내야지.”
또 어떤 결심을 한 걸까.
그는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수화기를 들더니, 긴 망설임 끝에 누군가를 호출했다.
“나대통령입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로서, 내릴 명령이 있습니다.”
-……그…일입니까?
“예.”
-….
그 일이 대체 무엇일까.
무거운 정적이 한동안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먼저 입을 연 이는대통령.
“지금부터…대한민국 국회를…강제 해산합니다.”
-….
“등록된 모든 국회의원, 모든 시의원을 구속하고 전국 계엄령은 무기한 연장합니다.”
-…결국 하시는군요.
“예.”
척.
수화기 너머로 경례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알 수없는 뜨거움도 느껴졌다.
-당신의 앞길에축복만이 있기를.
“제 앞길에 그런 건 없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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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드디어 만난 우리의 사랑씨.
수개월만에 만나는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랫도리가 불끈불끈해진다.
으…이럴까봐 오기전에 서현이랑 잔뜩 하고 온 건데. 의미가 없네. 정력이 너무 강해도 문제라니까.
“보고싶었습니다.”
갑자기 공격(?)해오는 사랑씨.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애정공세란 건가. 근데 그러기엔 표정은 무뚝뚝한데 말이지.
“흠흠…저,저도요.”
아아니 솔직히 사랑씨는 반칙이라니까? 시녀도 아닌데 나한테 꿰인 찐 여친이라고. 솔직히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단 말이지.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위력이 너무 강하단 말씀…
아…이래선 소라누나한테 동정남이라고 까여도 할 말이 없다….
“일단 들어가죠.”
그래도 찐따스럽게 쭈뼛거릴 순 없는 노릇.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으로 인도했다.
듣자하니 대통령을 만나고난 후 바로나를 만나러 왔다던데, 내 집에서 만나도 되겠지만 첫 데이트의 추억을 살리기 위해 근처 고깃집으로 왔다.
그땐 정말 좋은 추억이었지. 사랑씨 가슴을 처음 만진 곳이기도 하고…그리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알바생도 거기서 먹었었고…잘 있으려나?
“삼겹살 4인분 나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주문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먹음직스런 생삼겹이 나왔다.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나와 사랑씨였기에, 알바가 조금 긴장하는 게 보였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리 나라도 갑자기 해코지 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남자고. 전에 그 누나는 역시 없나보다.
“사랑씨, 잘 지내셨어요?”
“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세계는 제가 정복했습니다.”
“아, 들었어요. 루드밀라씨가 엄청나게 황당해 하시던데.”
“그건…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별로 미안해보이지 않는걸.
뭐 상관없지만.
“유은씨는 그 사이 새로운 이세계도 갖다 오셨다면서요?”
“네. 무림의 세계였죠. 사실 넓게 보면 무림만 있는 건 아니고 여러 가지 이능력이 있는 곳이었지만, 무림만 대충 느끼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좀비사태도 있고 또 부인들도 있으니까요.”
“음…그렇군요.”
아차.
부인얘긴 괜히 꺼냈나.
뭐 내가 부인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쁠 수 있잖아? 면전에서 다른 여자얘기라니.
“식은 올리셨나요?”
“네? 식이요?”
“전에 약혼식 올린 건 기억하는데 막상 결혼은 아직이신가 해서.”
“아.”
그랬지.
부인부인 거려서 딱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약혼만 한 사이였지…그러네. 엄밀히 따지면 그냥 여친들이었네. 이럴수가.
순간 내 얼굴이 웃겼는지, 사랑씨가 피식하고 웃었다.
“역시 안 하셨나보네요.”
“으.”
“여자는 그런 거에 민감합니다. 잘 챙겨주세요. 소냐씨라던가. 그분이랑은 약혼식도 안 하셨잖아요.”
“그,그래야죠.”
사랑씨한테 이런 소릴 들을 줄이야.
“그런데 사랑씨는 그…뭐라 안 합니까?”
“뭐가요?”
“본가라던가…솔직히 제가 이미지가 좀 안 좋잖아요.”
“좀은 아니죠.”
“아무튼.”
그녀는 다 자글자글 익어가는 고기를 가위로 자르더니 잠시 신음을 내보였다. 아무래도 대답하기 힘든 모양이다. 역시 ‘그런 놈은 만나지 마라!!’라거나 하는 말들이 오가는 걸까.
음…그럴지도 몰라. 무려 대장가문이잖아. 뭔가 엄청나게 기강을 잡고 그러지 않을까?
“실은 전에 물랑이랑 말랑이를 본가로 보낼 때 말고는…딱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엥.”
돌아온대답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
뭐지. 설마 말로만 듣던 자유방임주의인가.
딸이 무려 나랑사귀고 있는데도 아무 연락조차 없다니. 이게 가능한가.
“저보다는 오히려 다른분들이 문제 아닐까요. 저는 자유의지지만….”
듣고보니 그러네. 시녀들도 다 부모가 있을텐데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잖아.
음…
아니 잠깐. 이거 좀 심각한 거 아닌가? 왜 아무것도 몰랐지. 좀 섬뜩한데. 서현이라던가 뭔가 했을 거 같잖아 불안하게.
“다 익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
.
아무래도 스탯이 높아서인지, 삼겹살은 우리의 배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술도맛은 없었지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마셨는데 이것도 장난 아니게 들어왔다.
우리끼리거의 20명분의 매출은채워주지않았을까.
“저기로 가죠.”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땐 마음같아서는 그 길로 모텔에 들어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랑씨이기도 하고, 또 그 모습과 자태가 심히자극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뭐랄까…
시녀를 비롯한 스킬효과가 아닌 진짜로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니 그렇게 막 끌고다니기 힘들다고나 할까…뭔가 심리적인 장벽이 있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다음 행선지는 카페.
카페에서도 이것저것 시킨 우리는 고깃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배조차 못 채울 때가 되었을 땐 코인노래방 같은 곳을 돌았는데, 뭔가 중간부터 사랑씨의 표정이 썩 좋지가 않다.
흠…
뭐지.
우뚝.
어느순간 손에 들고있던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어치운 그녀가 멈추더니 나를돌아봤다.
주변은마침 모텔촌.
사람이라고는 간간이 오가는 커플들 밖에 없고, 그나마도 내 얼굴을 보곤얼른 다른쪽으로 피신하곤 했다.
설마 내가 사랑씨 옆에서 NTL이라도 할까봐? 쯧쯧쯧.
“뭔가 이상하네요.”
“네? 뭐가요?”
“유은씨요.”
“저는 항상 똑같은 사람입니다.”
사랑씨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달라요.”
“음.”
뭔데.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하고 난 뒤 만족스럽게 헤어졌는데 집에가서 전화해보니 여친이 화나있다’는 상황인건가. 비록 집은 아니지만.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네.
“평소의 유은씨는 이러지 않았어요.”
죄송하지만 우리 데이트라고 해봐야 네 번 정도입니다만. 평소의 저를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뭔가 좀 더 제멋대로에 좀 더 생각없고 좀 더 막무가내여야 하는데 말이죠…좀 더 그쪽으로 불끈불끈하고.”
“음.”
듣고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아. 내가 너무 의식했나. 소오오오오올직히 귀두의 황태자 같은 직업이 아니었으면 유나씨와 소라씨, 그리고 소냐씨 등등 그분들이 내 애인이 됐을 리는 없잖아? 그렇게 따지고 본다면 사랑씨야말로 첫 여친인 건데…
아니지 사랑씨도 내 능력이 아니었으면 사귀지 않았으려나?
음. 복잡하네.
아무튼 사랑씨는 온리 원 같은 느낌이라…뭔가…대하기가…
“제가 어려운가요?”
그때 사랑씨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불쑥 물어왔다.
언제나 늠름하신 여군님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청순가련 그 자체.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만 같다. 미녀가 왕에게 이런 표정으로 뭔가 해달라 하면 해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그새 제가 어려워지셨나봐요. 아니면 어색해졌거나.”
“설마요. 그렇지않습니다.”
어찌할줄을 몰라 어떻게든 말해보았지만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고개를 저어대고 계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절 대할 때 망설임이 보여요.”
“….”
모르겠다.
어쩌라는 거지.
내가그렇게 벙쪄있자, 갑자기 그녀가 피식하고 웃었다.
???
“유은씨, 연애해본 적 없죠. 모쏠이죠?”
“네? 아니 그 무슨 모욕적인.”
“하는 행동이 딱 그런데요.”
“아아아아니 모쏠이라니요. 제가 얼마나 여자가 많은데.”
생각해보니 사랑씨야말로모쏠출신 아닌가????? 그런 그녀가 나한테 모쏠이냐니이 무슨.
“그래도 다른 외부요인 없이, 진실로 유은씨를 좋아하는 건 제가 처음 아닌가요.”
거 팩트폭행 자제합시다.
“사실은 절 특별히 여기고 있을지도. 그래서 망설이고 쭈뼛거리는 거죠.”
“…아닌데요.”
“그럼 이왕 특별취급하는 거,”
그녀는 멋대로 단정지어놓고는 작은 가방을 주섬주섬 뒤졌다. 그리고는 뭔가를 꺼내는데….
“저랑 결혼할래요?”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