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화 〉41. 헬게이트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일본의 상징이었는데, 이젠 한낱노예가 되어 유은을 대변하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수많은 시녀들 중에서 유은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자리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봤자 대외적 인식은 성노예일 뿐이고,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자리에 몰락했다고는 해도 한 국가의 공주였던 여인이 떡 하니 서 있으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아마 이를 보는 수많은 후지산 자치령의 사람들은 상당한 굴욕과 모욕감,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회장이 시장바닥처럼 시끌시끌해진 가운데, 세이코가 입을 열었다.
“지난날, 상제께서는 인류의 발자취를 넓히고 생존력을 상승하기 위한 영토확보 등을 위하여 친히 두 번째 이세계를 방문하시었습니다. 그곳은 소위 말하는 ‘무림’과 같은 세계였으며, 지리적인 요건, 대략적인 역사, 국가, 민족구성 등은 이곳 지구의 역사와 비슷하였습니다.
사실상 평행세계로 보이며, 그곳에서 수많은 자원과 영토를 확보하시어 인류의 지평을 저 먼 곳까지 확장하셨습니다.”
그저그런 이야기.
아니, 분명 이세계와 무림 이야기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지금 그것들을 신박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역대급의 사건이 터진 상황이었다.
한동안 관심도 없는 무림얘기를 늘어놓던 세이코가 말로서 마침표를 찍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변하고 분위기가 변했다.
“…!”
왔다!
기자들은 직감했다.
드디어 원하던 것이 왔다고.
“다음은 현재 세계적으로 발발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어는 없었지만 누가 듣더라도 좀비사태에 대한 내용.
바로 옆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끌시끌하던 회장이 조용해지며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먼저 전 인류적인 재앙의 발생과, 이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은하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국가와 기관에서는 이로 인해 발생한 난민을 대상으로 관대한 포용정책을 펼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기자들은 타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스마트폰을 활용한 녹음만을 하며 조용히 숨죽였다.
“상제께서는 이세계로부터 복귀하시고 나서 곧바로 이 사실을 인지하셨으며, 이에 따른 지원책을 마련하라 말씀하셨습니다.”
“!!”
기자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자세한 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개입을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하여 황궁 비서실과 각종 실무진들과의 긴밀한 회의 끝에 수 차례에 걸친 지원방안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초롱초롱해지는 눈빛.
평소의 혐오와 두려움이 깃든 눈이 아니었다.
“우선 최우방국인 대한민국에 관한 지원책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전체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500만 명의 난민을 수용중에 있으며, 이로 인한 각종 포화상태가 심각한 문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상제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곤 총 50조 원 규모의 인도적 도움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말이 50조지, 50조 원이면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분에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단순히 계산한다면 500만 명의 난민에게 1000만 원씩 줄 수 있는 거금.
그런데 이걸 지원해준다고? 딱히 가난한 나라도 아닌데?
“또한 주요 입국지인 인천공항과 인천항, 부산항 등 15곳에 나노로봇 살포기를 배치하여 바이러스 그 자체를 입구에서부터 사멸시킬 것이며, 당연히 이 역시 무료로 제공될 예정입니다.”
기자 몇몇이 손을 들었다.
뜬금없이 나온 ‘나노로봇 살포기’가 무엇인지 물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코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두 가지만 되어도 대한민국은 안정화될 것이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안전지대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전 지구적인 지원책입니다. 우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난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리기 위하여 대형 수송선 1,700만여 대를 전 지구 상공에배치할 계획입니다. 발달된 본 제국의 기술력으로 건조된 것으로서, 수직이착륙이 가능하며, 최대 25마하까지 가속하면서도 중력가속도를 상쇄하여 일반인은 물론 병자도 무리없이 탑승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지며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저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마하 25로 가속하면서 중력가속도를 상쇄한다고? 이게 도대체 어느행성의 기술이지?
게다가 그런 수송선을 전 지구적으로 무려 1700만 대를 배치한다고 한다. 1700대만 돼도 엄청난 것인데 1700만 대라니.
“수송선을 통해 호송된 분들은 1차적으로 시공전함 육림으로 배치될 것이며, 여건에 따라 월면도시, 지하기지 등에 배치될 수 있습니다.의식주가 모두 제공되며 점수여하에 따라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시민권 역시 발급해드릴 예정입니다.”
뭔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구의 얘기가 아닌 영화속 이야기 같은 느낌?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되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느꼈으니, 저런 말도 안 되는 기술과 생산력을 가진 곳이 있으니 좀비 따위는 금세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제께서는 본 제국의 영토, 그리고 식민지 혹은 자치령에 준하는 곳의 치안과 안전을 확실하게 보증하셨으며, 본 제국은 그 뜻을 받들어 인류 여러분의 생존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작 모두가 원했던, 그러니까 좀비들에게 쳐들어가 닥치는대로 때려 부수고 마침내 지구를 정상화하는 그런 내용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난민이 생기면 흔쾌히 받겠다.’ ‘원한다면 점수 여하에 따라 시민권도 준다.’ ‘대한민국은 안전하게 지킨다’ ‘식민지도 지킨다’ 정도의 내용을 읊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도 대단히 큰 역할이다. 미국조차 감히 엄두도 못내는일이며,(애초에 미국은 현재 입국금지다.) 단순히 생각하면 역사적인 찬사를 받을만한 일들이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결국 ‘내 땅이랑 식민지는 지킬거임. 나머지는 알아서 하셈 ㅋㅋ 정 힘들면 이쪽으로 이민 오던가 ㅋㅋ’ 이런 뜻이다.
결국 세이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모든 기자들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병력투입에 관해서는 말씀이 없으신데요, 좀비들을 소탕할 계획은 없으신 겁니까?”
“유은 상제가 돌아오기 전에도 난민은 꾸준히 받아왔습니다만, 달라진 게 있긴 한겁니까?!”
“현재 UN과 EU를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에서 끊임없이 연합군 가맹을 요청하는 걸로 아는데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노로봇이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잔뜩 달아오른 회장.
하지만 세이코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묵묵히 마이크를 잡아 입을 가져가더니,
“좀비소탕에 관한 계획은 현재 없습니다.”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
-帝國, 이번에도 개입 없어.
-은하제국 ‘난민 수용하겠다.’ ‘소탕계획은 없어.’
-신은 정녕 인류를 버린 것인가.
-美, ‘은하제국은 지닌바 힘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세이코의 기자회견이 나가자마자 전 세계가 뒤집혔다.
그래. 유은이 없었을 때는 세력의 대표가 없으니 개입을 하지 않았다 치자.
하지만 지금은? 유은도 돌아왔고,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도 소탕계획이 없단다.
이 말은 앞으로도 안하겠다는 것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애초에 기대도 안했습니다.”
미 국방성 회의.
대통령도 참석한 이곳에서 사람들은 매일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지구를 대상으로 비상령이 떨어진 지금, 세계의경찰노릇을 하고 있던 미국은 매일같이 병력을 파병보냈고, 미사일도 매일같이 퍼부었다.
하루하루 사용되는 군비에 그 미국조차 손이 덜덜 떨릴 정도.
그럼에도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그쪽의 대표인 유은이란 인간은 뇌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정치하는 이는 임서현이라는 여자와 현재 황제를 칭하고 있는 소냐라는 여인이죠. 그 중에서도 황제의 힘이 강할 테니, 그녀가 개입을 거부한 이상 유은이 돌아오든 말든 달라질 건 없는 겁니다.”
국방부장관의 냉정한 평가.
확실히 은하제국의 정치는 사실상 소냐가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녀가 개입을 거부한 이상 그 기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하제국이 등장하고, 아니 그 이전에 하렘궁이 등장하고나서 미국에게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그 하렘궁의 힘이라도 절실한 상황인데 개똥도 필요할 땐 없다고 정말 역겨울 정도로 힘을 아끼고 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일종의 메세지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 밑으로들어오라는 거겠죠.”
“…동감합니다. 최우방국인 대한민국과 식민지인 후지산 자치령은 철저하게 챙긴다고 하였으니, 은연중에 내보낸 것이죠. ‘식민지가 되면 지켜준다’라고.”
“정말 잔인한 여자입니다. 그걸 위해 10억이 넘게 희생되는 걸 방조하고 있으니.”
“잊으셨습니까? 15억에 달하는 중국인을 모조리 학살하고 10억 마리의 괴물을 양산하는 걸 보고만 있던 여인입니다. 어쩌면 뒤에서 직접 명령했을지도 모르고요. 10억 명이야 뭐 대수겠습니까.”
다들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 결국…그 수를 써야겠군요.”
“그것밖엔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모였습니까?”
“현재 1억 2천만 개 가량 모였습니다.”
“음.”
대통령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어쩔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