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화 〉40.역류
거의 막무가내.
궁지에 몰려 이성을 상실한 황제에게 제대로 된 논리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
“폐하, 이미 목적이 있는 고려군을 우리의 뜻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하북성은 내주어야 하옵니다.”
“뭐라? 하북성을?”
하북이라면 현재 순천부가 있으며 정파의 명문 하북팽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는 고려의 요서와 맞닿아 있으며 사실 한 국가가 하북과 요서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그 모두를 합쳐 ‘하북성’이라 불렀을 정도로 연이 깊은 지역.
그러면서 중원 깊숙이 들어와 무림맹 총단이 있는 하남과 맞닿아 있으니, 하북을 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중원의 심장을 내주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하다! 짐 역시 그곳에 거하고 있거늘! 어찌 저들에게 하북을 내준단 말이냐!”
“…그것조차 최소이옵니다 폐하. 일이 그릇되면 동북삼성(산서,하북,산둥)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하의 말에 황제는 숨이 턱 막혔다.
하북성만 해도 말도 안 되는데 동북삼성이라니. 그리되면 영토는 명이 여전히 더 넓을지 몰라도 생산성에서 고려가 명을 압도하게 된다.
게다가 그 정도로 깊게 고려의 영토가 침투한다면 이는 현재의 역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종래에는 명의 종말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이 역도들만 몰아내고 순순히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사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황제를 말렸다.
다른 국가도 아닌 고려의 개입 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로 자체적인 천하관을 꾸리고 있는고려가 개입해 온다면 이는 커다란 명분이 될 것이고, 명은 그날로 천자국의 지위를 잃어버린 채 한낱 위성국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명나라 황실의 떨어진 위명은 물론이고 그에게 봉사하는 명나라 관료들의 위신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그건….”
“병력도 일으키지 못해, 고려도 활용할 수 없어. 그럼 저 가증스런 것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이더냐!”
“폐하, 결국은 시간만 끌면 되는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천하의 정병이 알아서 일어날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을 어찌 끌라는 말이냐!”
말을 꺼낸신하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역도들의 괴수인 자는 심히 망측하고 천박하여 여색을 즐긴다 들었습니다. 오는 길목마다 처녀들을 비치하시어 시간을 늦출 수 있을 줄 아옵니다.”
“...호?”
정신나간 방법이었지만 형식 자체는 굉장히 신박했다.
본래 사람이란 궁지에 몰렸을 때 입에 바른 소리보단 그럴듯하면서도 신박한 개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헌데 그자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절세가인이라하였는데, 그런 방법이 통하겠느냐?”
“절세가인이라 해봤자 천것들의 기준 아니겠습니까. 막상 여염집 처녀들을 마주한다면 그 향기와 미모에 눈을 떼지 못할 것이옵니다.”
“흠.”
황제는 고심했다.
아무리 처지가 궁해도 백성들을, 그리고 귀족들의 딸들을 그런식으로 사용하는 건 양심에걸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아무런 수도 나오지 않는 상황.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황궁의 고를 열 것이니 뜻대로 하라.”
“예, 폐하.”
+++
“뭐야 대체.”
“뭔가 비정상적이네요.”
명의 황궁이 있는 순천부까지 진군하면서, 유은은 무수한 여인들을 만났다.
단순히 만난 거라면 놀랄 일도 없었겠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모종의 뜻을품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의 미색과 화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유은이 얻은 여무사들에 비한다면 별 거 아니었지만.
아무튼 가는 길목마다 일종의 여관 같은 건물에 그러한 여인들이 꽉 들어차 있으니 바보라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적의 황제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자 두는 게 수작이야?”
“주인님께서 호색한이라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을테니 그에 맞는 전략을 짠 것이겠죠.”
“진짜 병신 같은 방법이네. 좀 이쁜애들을 데려다 놨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유은은 실망했다.
이 여인들을 이용하여 미인계를 쓰려 했다면 적어도 그녀들을 ‘미녀’라고 인식해야 할 텐데, 유은의 기준으론 택도 없었다.
‘설마 주예령만 예외고 나머지 황족은 알고보니그냥 추녀라던가 평범이라던가 그런 거 아냐? 그럼 좀 깨는데.’
대충 어느정도 즐긴 무림이었기에, 남은 즐거움이라곤 황족을 따먹는 일 정도인데, 그에 대한 기대감이 사그라들었다.
여인의 신분도 흥분도에 큰 영향을주지만,기본적으로 이뻐야 하는 것이 당연. 그런데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뭐, 좀 이쁘다 싶은 애들 중에서도쩌리들만 보낸 거겠죠.”
“그렇겠지?”
“그럼요. 주인님이시라면 정말 자기 눈에 차는 미녀들을 이런 먹힐지 안 먹힐지 알 수 없는 수단에 소모하시겠어요?”
“절대 안 그러지.”
자연스럽게 납득가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진짜 미녀라면 자기가 끼고돌지 이런식으로 소모하진 않을 것이다.
“좋아. 그럼 희망을 더 가져보자고.”
황제와 신하들이 나름 고심해서 사용한 트랩을, 유은은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더는 그렇게 설치(?)된 여자들에게 시간을 뺏기지 않고(수집하긴 했지만) 오히려 더 속도를 내서 진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황궁에 전달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안을 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신하는 목이 잘렸고, 황제는 급한대로 대피하기 위해 채비를 꾸리기 시작했다.
모양새는 심히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만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러기엔 유은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랐고, 순천부는 너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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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비호하는 친위대(금의위)와 5만의 정예군. 그리고 대고려방면으로 파견나가있던 무림맹의 잔여세력들이 황궁을 박차고 나왔다.
황제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망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머지않아 유은이 데려온 1만 대군과 대치하게 되었고, 전장엔 전운이 감돌았다.
단순히 수적으로 계산해 보면 명나라쪽의 압도적인 우위라 할 수 있다.
일단 정예무사인 금의위만 해도 1천이 넘었고, 5만의 중앙군이 있었으며, 거기에 1만 가량의 정예무사(무림맹)까지 6만을 넘어 7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으니 머릿수는 무려 7배나 된다.
하지만 유은의 병력은 이미 주예령에 데리고 간 중앙군과 근방에서 끌어모은 관군 수만, 그리고 무림맹의 주병력까지 깨부순 전적이 있다.
그때 천하에 퍼진 위명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수적으로 앞선다 해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오히려 명나라 진영엔 암울한 기운이 감돌 정도였다.
“왠지말야. 군대는 이렇게 내보내놓고 자기들끼리 도망칠 궁리할 거 같지 않아?”
유은은 웬일로 엄청난 촉을 발휘했다.
역시 여자가 걸린 문제라 그런지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움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안 되지. 황비와 황녀가 있어야만 이 모든 게 의미있는 건데.”
유은은 저편에서 펄럭이는 금의위의 깃발을 바라보며 은소령을 쳐다봤다.
“소령씨, 전에 왜 자기한텐 일 안 맡기냐고 하셨죠?”
“내가 언제?”
“이번에 맡겨드릴게요. 이 군대를 지휘하시면서 적의 군대를 무찌르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뭐? 넌 어쩌게?”
“서현이랑 황족탐방 갈겁니다.”
“미친새끼. 사령관이란 놈이 지가 끌고온 군대 갖다 버리고 계집질 하러 가냐? 제정신인가 진짜.”
그녀는 잔뜩 혐오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유은은 개의치않고 그녀의 어깨를 톡톡 토닥였다.
“뭐, 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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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럇!”
파다다닥.
좁은 길목을 이용하여 부리나케 달리는 마차의 무리.
말을 이끄는 마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마편을 휘둘러댔다.
“더 속도를 내라!!”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이 거하고 있는 마차.
본래의 화려한 색을 잃고 어기마저 버린 채 묵묵히 바퀴를 돌렸다.
그 무리는 황제의 것이라 하기에는 심히 조촐했는데, 금의위 백 명에 시중을 드는 종 오십과 시녀 삼십. 그리고 황제 본인을 포함한 황족 열 둘이 전부였다.
현재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섬서성. 비록 그곳도 하렘궁의 영향이 미친다지만 최소한 황궁 보다는 안전할 것이었다.
빙 돌아가는 탓에 이렇게 속도를 높이고 있어도 예상되는 소요시간은 꽤 길었는데, 빠르면 3주, 늦으면 한 달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달이야.”
“예, 마마.”
“도대체 어째서 우리가 이리도 꼴사납게 도망쳐야 한단 말이냐. 나는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흔들리는 마차속.
고운 흑발을 빗으로 매만지던 여인이 구슬픈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황실을 수호하는 금의위나동창 모두 정예이고, 이들을 받쳐주는 병사들 역시 정병일진데, 고작 1만의 역병에 기겁하여 이리도 예민하게 구니 천하가 웃을까두렵구나.”
“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