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화 〉37.검후(劍后)
“?!”
갑작스레 등장한 목소리.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이고 딱히 살기가 실려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홍은 전신이 쭈뼛 일어나며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누…구…?”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상가의 기와 위에 살포시 발은 얹고있는 여인이 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발.
마치 은화의 그것처럼, 저어가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풀거리는 한푸(漢服)는 그림속에 그려진 날개옷 같이 보였다.
“서,설마!”
단장이 남긴 암호문과, 저 특출난 인상착의.
소홍은 한 가지 불길한 추측을 떠올리곤 바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걸까, 여인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웃었다.
“후흐. 본녀 외에도 여고수가 있기는 했나보구나. 하긴, 이리도 넓은 천하에 본녀만이 좌에 오르진 않았겠지.”
다행히 그녀의 시선은 소홍을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뒤의 세이코…아니 그보다 너머 유은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는 만남이다만, 우선은….”
안심하려던 찰나,
검후의 눈동자가 돌연 소홍쪽으로 이동했다.
“!”
검후의 시선을 받자마자, 소홍의 전신이 말 그대로 경직.
놀라거나 겁을 먹어 몸이 굳어버리는 그런 흔해빠진 현상이 아니다.
이만한 원거리서 시선만으로 혈을 짚은 것이다.
“예의없는 쥐새끼 먼저 처리해야겠지.그나마 여인으로 태어난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
검후의 오른쪽 허리춤에 있는 가방에서 작은 검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곧장 소홍을 향해 진격.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간 그것은 오직 찰나의 순간 만으로 소홍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카앙 - !
세이코가 아니었다면.
“호.”
소홍이 꿰뚫리기 직전,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속도로 그녀 앞에 나서면서 검후가 던진 칼을 받아냈다.
“….”
찌이잉.
일말의 자비심(?)으로 강기(剛氣)를 두르진 않았다지만, 그래도 무려 천하십대고수(天下十代高手)의 일인인 검후의 칼이다. 타격이 없을 리 만무.
측면으로 쳐냈을 뿐인지라 내상을 입진 않았지만, 칼이 부러져 버렸다.
“아….”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벌어진 일.
소홍은 잠시 넋놓고 있다가 곧 감사를 표했다. 마음 같아서는 고개라도 숙이고 싶었지만 혈이 막힌 관계로 불가.
“안쪽에 워낙 강한 여인이 있어 신경쓰지 않았다만…네녀석도 한 수 하는구나. 본녀의 검을 쳐내다니.”
자신의 공격을 방해했음에도, 검후는 전혀 기분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쾌하다는 느낌.
하지만 세이코의 몸을 자세히 살피고는 그제서야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몸에 묻어있는 액체.
남자를 알고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설마 이곳의 기녀는 아닐테고…윤간(輪奸)…도 아닐 것이고. 대체 무엇이냐.”
세이코만한 고수가 그런 험한꼴을 당할 리 없다 여긴 그녀가 의아한 얼굴이 했다.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이 싸지른 양은 아닌데, 윤간이 아니라면 난교를 즐기는 걸까?
“세이코는 내전용이거든. 다른 남자따위 몰라.”
서현이 입혀준 옷을 다 입고, 마침내 유은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침일찍 일출을 바라보듯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검후는 감히 여성들의 세계에 끼어드는 남정네를 응징하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감ㅎ…?”
소홍에게 했던 것처럼, 기를 보내 혈을 짚으려는 심산.
그러나 유은의 능글맞은 얼굴을봤을 때, 그녀는 몇 초간 얼어붙은 듯이침묵했다.
아까는 서현의 강렬한 기운을 느끼느라 미처 보지 못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피부도 곱상하고 이목구비의 배치도 심히 이상적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외견상 보이는 몸매도 뛰어나다.
“….”
거의 10초가 넘어가는 시간동안 유은을 뚫어져라 쳐다본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다 음탕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이거 참….”
그리고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오늘은 여러모로 수확이 좋은 날이로구나. 좋다. 용서하마. 너희들의 무례.”
그렇게 말을 맺고는 무슨 생각인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홍매!!!”
그리고 그 즈음, 가까스로 검후의 행적을 쫓아온 남궁유이가 단원들과 함께 도달,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소홍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단장님!”
“무사하셨군요. 홍매. 다행입니…에?”
검후가 너무 빨리 가서 이미 죽은 건 아닐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기쁜 표정으로 해후(?)를 나누었다.
하지만소홍을 보호하듯 검후와의 사이에 나와있는 세이코의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고 음란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저….”
“오셨군요.”
뭐라 말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하는 남궁유이.
자연스레침묵이생겼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네녀석이 단서라도 남긴 모양이지?”
그 침묵을 검후가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살기는 없었다.
“뭐, 됐다. 용서하마. 후후.”
아니, 오히려 기분이 심히 좋아보였다.
그녀는 금새 유이들에 대한 신경을 꺼버리고 유은에게 시선을 던졌다.
“거기 너, 얼굴이 참으로 곱상하구나. 근육 배치도 아주 적절해. 발기는 잘 되느냐?”
“…응?”
“손보다는 크겠지? 만져보고 싶구나.”
생각지도 못한 검후의 말에, 유은이 잠시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서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지금 성희롱 당한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항상 하는 입장에 있다가 처음으로 희롱을 당하니 뭔가 묘하면서도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유은이마조인 건 아니다. 단지 검후가 엄청난 미녀이기에그리 느껴질 뿐.
“후흐흐…간만에 동하는구나. 본녀가 취해야겠다.”
“에…싫다면?”
“싫다? 후흐흐흐.”
검후는 음침하게 웃다가 기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거절…좋지. 아주 짜릿해.”
그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소매로 입을 가리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웃음을 흘렸다.
사악하면서도 음탕한 웃음.
츄릅.
그녀는 유은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 거절과 함께 통째로 강간해주마.”
“…와…서현아 나 섰어.”
“….”
서현이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얼굴로 유은을 쳐다봤다.
물론 진짜로 그런마음을 먹은 건 아니고, 그저 썩은 눈이 되었을 뿐이다.
‘흐음. 그나저나 나를 강간하겠다니. 내 힘은 못 알아보나보네?’
세이코나 서현의 강함을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스탯의 힘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인데, 막상 유은을 읽지는 못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협지 같은 거 보면 자기보다 엄청 강한 사람은 잘 못 읽잖아? 그런 건가?’
그런 거라면 일이 꽤 짜릿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재밌는 상황극이 아닌가.
유은은 속으로 작게 웃음을 흘리며 연기를 시작했다.
“큿…세이코! 서현! 저년을 막아라! 나를 지켜!”
“…? 알겠습니다!”
서현은 잠시 의문을 표하다가 일단 그의 명령대로 검후를 막기 위해 훌쩍 뛰어내렸다.
세이코 역시 근처에서 검을 주워 검후와 대치했다.
“….”
한편 고래 사이에 낀 새우처럼 되어버린 유이들은 틈을 타 슬쩍 옆으로 빠져나왔다.
“홍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공자는 왜 주루에 있는 거죠? 저 나신의 여인은? 시체들은 또 뭐고….”
“그게….”
막 도착했을 땐 인식하지 못했지만,주변이 온통 피바다다.
그야말로 전쟁터.
소홍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유이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결국 검후도 그렇고 유은도 그렇고 둘다 악인이란 얘기 아닌가.
이쯤되면고려의 첨병이든 아니든 척살대상이다.
세상에 관군과 동시에 수백의 무림인들을 도륙하다니. 게다가 그 전에는 일반 양민들도 죽였다지 않은가.
“하아…혼란스럽네요. 대체 뭐가 뭔지….”
유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소홍의 조심스런 제안.
“단장님…도움받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지금 일단여기서 빠져나갔다가 맹에 보고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뭐라고요?”
“어차피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차라리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음….”
그러고보니 혈교무리가 있던 공동은 사실 그들의 총교단이었고, 거기에는 엄청난 양의 영약과 무림서적, 각종 보물 등이 즐비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를 발견하는 이가 나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맹에 사실을 알려야 한다.
거기에 검후의 출현과 하렘궁이라는 자들의 출현 역시.
그녀의 안에서 후퇴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조금 비겁하지만…어쩔 수 없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승낙.
단원들도 납득했다.
“뭐야. 가는 거야?”
유은은 멀어져가는 유이들을 보며 아쉬워했지만 검후와의 즐거운 섹스를 위해 일단 그녀들을 놔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에 만날 때는 적 비스무리한 관계가 될 테니 그때 실컷 맛보고 즐기면 된다.
그보다 지금은….
카앙 - !
“커헉!”
“느리구나. 그래가지고 네 주인을 지킬 수 있겠느냐!”
검후와 두 여인의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헉…헉….”
라곤 해도 세이코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리타이어.
거의 실신 직전이다.
검후는 허리춤에 패용된 검을 뽑지도 않았다.
게다가 싸우는 중간중간 유은을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서현까지 가세하여 싸우고있는데도 여유만만이다.
‘강하긴 진짜 강하네. 설마 검후급이 널려 있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