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6화 〉36.무림출두
36.무림출두
“…설마 그새 옮긴건가?”
흑단처럼 고운 머리칼을 휘날리며 묘령의 여인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수사관처럼 수심어린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그 속도가 심히 빨랐다.
“분명 한 달 전 까지만 해도….”
하얀 앞니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암암리에 무림을 잠식하려 했던 혈교.
그러나 무림맹도 흑천맹도 바보집단이 아니었기에 그 낌새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각 맹에서 개별적으로 조사대를 파견, 혈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와 소탕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무림맹에서 파견된 여러 조사단장 중 한 명인 것이다.
단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무력집단으로, 보통 10명에서 12명 정도로 구성된다.
당연히 단 하나로 무림을 어지럽히는 무리를 소탕하는 건 불가능. 때문에 규모가 큰 이들을 발견했을 땐 단 차원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렇게그녀가 단의 상위개념인 대(10개의 단, 약 100~120명)를 이끌고 왔을 때는 이미 모든 사람과 물자가 사라진 뒤였다.
“다른 곳으로 옮긴 건 아닌 것 같소.”
그녀, 남궁유이의 곁으로 여인처럼 길게 머리를 찰랑거리는 미남자가 다가왔다.
귀공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었고 귀공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부채까지 완벽했다.
그 역시 남궁유이와 같은 단장으로, 역시 혈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와 소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덥지도 않은데 부채를 휘적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군데군데핏자국이 있는 걸 보면 옮긴 것이 아니라 모두 살해됐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과연.누가 그런짓을 했을까요?”
유이의 물음에 남자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흑천맹이 아니겠소? 혈교의 무리는 그들로서도 눈엣가시일테니.”
“으음.”
남자는 흑천맹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궁유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세히 보면 핏자국들이 하나같이같은 방향으로 튀어있다.
만약 많은 무인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소탕했다면, 싸우는 과정에서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질 것이다.
그런데 한 방향으로 뿌려져 있다니? 마치 일순간에 모든 이들을 처리한 것 같지 않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뭔가 대량의 기를 발산했다던가…그렇게 해서 혈교놈들을 모조리 도륙…아니,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나?”
제 아무리 무공이 천지를 뒤흔드는 것이라 해도, 결국 인간의 힘이다. 한 사람이 그것도 한 순간에 백을 가볍게 넘기는 이들을 도륙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본거지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건물 안에서도 핏자국이 발견됐는데, 이들 역시 한 방향으로 피가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건물에는 흠집하나 나 있지 않으니,귀신이 통탄할 노릇.
“대체 뭐지?”
문득 강한 불안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잠깐만요.”
결국 아홉단장들을 불러모았다.
한창 주변정리를 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던 그들이 일순간에 모여들었다.
딱히 남궁유이가 그들을 지휘하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십단장 중 거의 막내인 구단장이었으니, 겉으로 보여지는 계급 자체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십단장의 홍일점. 게다가 미녀다.
그것만으로 고추밭에서는 실세 중 실세가 될 수 있는데 심지어 거대세가인 남궁세가의 여식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오?”
가장 먼저 달려온귀공자.
그는 상징인 부채를 촤락 펼쳐 입을 가리고 미소지었다.
“1단장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가장 먼저 달려온 만큼 가장 먼저 유이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만으로 그는 입이 귀에 걸렸다.
“무엇이 그리 이상하오?”
“핏자국이 전부 한 방향으로 뿌려져 있어요. 제대로된 싸움이 벌어졌다면 절대 이런식으로 자국이 남을 리 없죠.”
귀공자를 비롯한 나머지 단장들이 거의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맞아. 좀 이상하긴 했어.”
구단장들은 일단 맞장구를 쳐줬다.
하지만 결국은 부정.
“그런데 이상하긴 해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흑천맹에서 소탕했다고 보는 게 가장 합당해.”
“그렇습니다. 이만한 규모의 혈교도들을 소탕하려면 일개문파로는 힘들겠지요. 결국 양맹이냐 마교냐 둘 중 하나인데, 마교가 여기까지 왔을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랬다간 벌써 난리났을 것이오.”
“그러니 흑천맹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남궁유이의 실력을 보고 흠모하는 게 아니다. 그저 가문과 미모만을 바라볼 뿐.
그렇기에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남궁유이역시 이를 느꼈다.
오늘뿐만 아니라 입맹한 이후로 꾸준히 느껴왔다.
“남궁소저의 꼼꼼한 면은 높게 치고 있으나, 이번일은 그저 우연이 곂친 것으로 생각합시다. 때로는 말이 안 돼 보여도 그게 정답일 때가 있으니.”
결국 구단장들은 하던 그대로 보고서 작성을 이어갔다.
몇몇 단장이 남아 그녀에게 찝적거리긴 했지만, 그딴 건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
“정의를 위하여!”
““위하여!””
근처 마을 주점.
남궁유이를 제외한 구단장은 이 근방에서 발견된 혈교무리의 수색 및 소탕을 종결시키기로 합의하고이를 축하하기 위해 잔을 들었다.
일단 명분은 사건을 잘 해결한 남궁유이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어쨌든 발견한 건 그녀였으니까.
“이걸로 우리 남궁소저도 드디어 한 건 올렸군!”
“축하합니다. 남궁소저.”
“…감사합니다.”
커다란 방에서 한 사람씩 그녀에게 덕담을 건냈다.
하지만 정작 덕담을 받는 그녀는 그다지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
일단 그들의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도 거슬렸지만, 무엇보다 찐득한 시선이 상당히 불쾌했다.
워낙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인이라 평소 사방에서 음흉한 시선을 받아왔지만, 자신들을 정인군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구단장들은 그래도 좀 덜했다. 나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고나니 결국 그들도 남자의 본능이 깨어났고, 대놓고음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술에 취하기라도 한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역겨워.’
그래도 동료들은 나름 괜찮은 남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짐승.
그녀의 안에서 혐오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
.
“여기서 무얼 하고 있소?”
“…1단장님.”
간신히 빠져나와 바람을 쐬고 있을 때, 그놈의 귀공자가 슬쩍 따라나왔다.
본인을 진정한 귀공자라고 생각하는건지, 이 순간에도 부채를 빼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뺀질나게 굴러다니며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얘도 똑같아.’
평소에는 가장 욕망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남자다.
하인이나 부하에게도 잘 대해주고 여인에게도 예를 다한다.
하지만 술을 통해 나타난 본성은결국 똑같은 짐승.
“아까 그것때문에 그런 것이오?”
“…예.아무리 생각해도 핏자국이 걸려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하오. 하지만 아까 5단장도 말했듯, 때로는 전혀 말이 안 돼 보이는 것이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오. 그리고 이번이그런 경우고. 한 가지 이상한 것이 포착되긴 했으나, 전체적인 정황은 ‘흑천맹에 의한 혈교무리 소탕’이 정답이오.”
“….”
아까와 똑같은 얘길 하고있는 1단장. 그러면서 여전히 그녀의 얼굴이나 몸매를 훑고있다.
그녀는 급속도로 기분이 불쾌해졌다.
“뭐, 누구나 시행착오는 있는 법이오. 이번에 혈교무리를, 그것도 이렇게 큰 규모를 발견한것은 분명 큰 업적이오. 나는 물론이고 나머지 다른 단장들도 분명 좋은 평가를 내릴 것이니 안심하시오.”
그는 이후에도 쓸데없는 말들을 주욱 늘어놓았다.
그 중 가장 가관은 듣고 싶지도 않은 시를 딴에는 분위기를 띄운다며 읊는 것인데, 정말 죽빵을 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궁세가의 여식이라해도 그런짓을 했다가는 미래에 장애가 생긴다.
게다가무공수위도 1단장인 그에 비하면 한참이나낮은 수준.
무려 ‘남궁세가’의 여식인데도그녀의 경지는 이류에 지나지않았다.
그렇다고 나이가 어리냐?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18세. 어엿한 성인이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명문의 대제자쯤만 되어도 18세 무렵에 일류에 이르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그녀는남궁세가의 여식이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영약과 가문의 상승무공을 전수받았음에도 아직 이류라는 건 그만큼 그녀의 재능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거대문파’ 기준으로 떨어진다는 거지, 강호 전체적으로 보면 18세에 이류무사라는 것도 충분히 재능이 넘치는 편이다. 영약을 들이붓긴 했지만.
다음날.
맹에 보고하러 간다는 구단장과 달리, 남궁유이는 어제의 고집을 이어 추가적인 조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단장들의 얼굴.
축하연까지 열고 사건을 종결시킨 뒤 맹에 보고까지 하러 가는데 그와중에 단장 한 명이 추가조사를 하겠다며 남는다면 모양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궁소저, 꼭 이래야겠소?”
“제 안에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저와 자매들은 조금 더 조사하고 갈테니 먼저 가셔요.”
“….”
단장들은 떨떠름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단장 뿐만아니라 단의 일원들, 심지어는 남궁유이가 이끄는 단원들조차 ‘얘는 왜 유난이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 단은 독립적인 존재. 대장의 명령이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함께 남도록 하지. 나머지 단장들은 맹에돌아가 보고해주시오.”
“1단장님!”
“그럼 저희도 남겠습니다.”
단장들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앞다투어 남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궁유이가 거부.
초보의 작은 판단 때문에이미 해결된 사건에 무림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고상한 명분을 들어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핏자국이 낭자하고 사람의 기색이 없으니 조사만이라면 저희들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과분한 전력투여는 낭비일 뿐이니 선배님들은 맹에 돌아가주셔요.”
포권까지 해보이며 그리 말하자, 결국 단장들이 물러갔다.
물론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