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던전은 나만의 기회 (396)화 (395/517)



〈 396화 〉34. 발악.

소냐의 말에 서현은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교육심의회는 바로 해산시키겠습니다.”
“….”


원하는 대답이 나왔는데도 소냐의 시선은 뚱했다.
애초에 앙리에타를 교육대상이 되든 말든 그녀는 전혀 관심 없었다. 말은 ‘빈’이라느니 ‘식구’라느니 했지만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녜스와의 거래가 있었을 뿐.


지금 그녀가 뚱한 얼굴을 하는 것은 서현의 태도에 대한 문제였다.
아무리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성장한 단체라지만, 하렘궁은 엄연히 제국을 표방하는 집단이었다. 잘 쓰이진 않지만 유은은 황제의 자리에 있었고, 그의 부인들은 정식으로 식을 올리진 않았어도 황비로서 취급받고 있었다. 아마 식을 올리면 비를 넘어 ‘후’의 명칭까지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인 운운하며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을 장난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
하렘궁에서 신분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소냐와 서현간에는 범접할  없는 간극이있다.

임서현은 귀인(貴人)이라 하여 ‘시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과는 달리 일종의 귀족이었다. 총 5개의 신분 중에서 2번째로 높은 셈이고,  번째로 높은 신분인 ‘황인(皇人)’이 사실상 유은을 비롯한 4명 뿐이라는  생각하면 제일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다.
지니고 있는 직책역시 『비서실장』이라는 거창한 것으로, 궁에 있는 시녀들을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자리였다.
괜히 대외적으로 실세라고 평가받는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시녀.


신분제가 공고히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소냐 앞에서는 깍듯하게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당연히 평소 그녀가 가장 강조하고 다니는 반사적인 대답과 표정관리도 제대로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소냐의 남편이자 서현의 주인인 유은을 무시하는 일이 되니까.

“서현씨, 기분 나빠하지 마요. 내가 자기 데려다가 갈군 것도 아니잖아? 인신모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부탁 하나했을 뿐인데.”
“죄송합니다…주의하겠습니다.”

서현은 완벽한 저자세로 나서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왜일까.
소냐의 심기는 좋아지질 않았다.

괜히 꼰대처럼 트집을 잡는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 소냐가 주의를 주기 전에 서현이 짓고 있던 표정은 분명히 일그러져 있었다. 본인이 하고다니던 말조차 안 지키는 내로남불형 인간이던가, 아니면 소냐를 너무 편하게 생각하던가 둘  하나다.
그리고 어느쪽이던 소냐의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잡고 늘어지면 괜히 일이커질 수도 있기 때문에 더 뭐라 하기도 애매한 상황.
소냐는 불편한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서현씨.”
“예, 사모님.”
“설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방금 전 일은ㅡ,”
“서현씨야  일도 잘 하고 예쁘니까 언젠가 부인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시녀잖아요.”
“예…명심하겠습니다.”

소냐가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은 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봐요. 교육심의회 해산하는 거 잊지 마시고. 카쿤지 뭔지 하는 인간들은 신경 안 쓸테니 알아서해요.”
“예. 사모님.”

서현은 소파에서 일어난 후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들어올 때보다 더 극진하게 구는  같았다.



소냐의 집무실에서 나온 서현은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법무부 소속의 시녀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은의 부인 앞에서 실수하다니.

다른사람도아닌 그녀가 고작 소냐의  마디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게 아니다. 모든   아녜스 때문.
그 여자가 한 도발이 계속 맴돌아서 분노가 차오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앙리에타에 대한 교육까지 못하게 되자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것.

물론 아무리 아녜스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다지만 그런건 그냥 핑계에 불과했다. 엄하게 따지면 일개 시녀가 부인에게 예를 다하지 않은 거니까. 서현이 세운 기준을 적용하면 빼도박도 못하게 교육대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유은의 부인들이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일까.


유나는 빡치지만 않으면 얌전한 여자고, 소라는 매사에 대충대충 넘어가는 여인이다. 그나마 소냐가똑부러지면서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인인데 그마저도 같은 편에겐 나름 친절한 편이다.

서현은 마음을 다잡고 지하기지 교육에리어로 향했다.
상당히 좋지 않은 기분으로 인해 하마터면 인생까지 망칠 뻔 했으니 이걸 어딘가에서 풀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대상이 있었다.





+++




푸확!


“끄아아악!!!”

날카로운 칼날이 뽑혀나오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순식간에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것이지만, 애초에 이곳에는 피가 낭자해 있어 별 의미는 없었다.


“끄윽…개…새끼들….”
“오.”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진 아오키는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시녀들을 노려봤다.

보통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면 누구나 눈을 깔고 제발 살려달라며 빌기 마련인데, 아오키는 오히려 더 강인한 마음으로 나약함을 물리쳤다.
그것이 몹씨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이런 인간이 없었던  아니었지만 극히 드물었기에.


“얘좀 봐. 아직도 눈빛이 팔팔해.”
“남자만 아니었으면 딱 주인님이 좋아하실 텐데.”

시녀들은 저마다 쑥덕거리며 마치 동물원 속 원숭이를 구경하듯 카쿠를 곁눈질했다.

“이딴 걸로 굴복할 줄 알아아아?!!”
“응!”

시녀는 해맑에 웃으며 아오키의 상처부위를 발로  눌렀다.
피가 짜내지듯 울컥울컥 나오며 그의 비명소리가 방을 가득 울렸다.

“끄으으읍!!”
“너 근데 대체 왜 참는 거야? 뭐 때문에?”

아오키는 첫 번째 순서였다.
어차피 지금 하는 건 서현이 오기 전에 하는 몸풀기 정도이기 때문에 반쯤은 장난이다.
그래서 나름 생각한 것이 바로 순번.

처음 지정한 인간이 버틸 때까지 고문하다 그자가 버티다 못해 항복하면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게 더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심리적으로….

아무튼 아오키는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동료를 위해 그러는  같은데, 시녀들이 보기에는 하등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비서실장님 오시면 쟤네들도 본격적으로 당할 텐데.”

눈물을 흘리며 아오키를 바라보는 동료들을 쿡쿡때며 바라본다.
참고로 아오키가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며 동료들을 지키고 있을 때, 막상 그 동료들은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흑흑거릴 뿐.

“뭐 저런 애들을 지키겠다고 그러냐. 너도 참 고생이다.”

시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대면서 혀를 찼다.

“야, 재미없는데 그냥 다른 애 할까? 곧 오실지도 모르잖아. 다들 너무 멀쩡하면 괜히 우리가 깨질수도 있어.”
“아. 그러네.”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오키를 내버려둔 채 다른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안 돼!! 약속이 다르잖아아아!!”

아오키가 아픈 몸으로 시녀들의 발목을 꽉 잡으며 외쳤다.
그러나 그런 애타는 외침은 시녀들에게 밟히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일구어내지 못했다.

“뭐래. 약속은 무슨 약속? 황당하네.”


시녀는 그의 발을 쳐내고 다시 걸어갔다.

마침 그때,



“비서실장님 들어오십니다.”

서현이 도착했다.


그녀는 임하얀을 비롯한 시녀와 비서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동안 아오키들을 괴롭히던 시녀들이 바짝 긴장하며 좌우로 도열했다.




한 눈에 봐도 기분이  좋아보이는 서현은 장내를  둘러보다 고문을 받았다기에는 너무나 깨끗한 몰골의 하루나들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쟤들은  저렇게 멀쩡해요?”
“아, 그게.”


시녀가 찬찬히 설명해주고 나서야 얼굴을 푸는 그녀.


“흐음. 끝까지 버텼다고?”
“예.”

서현은 여전히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는 아오키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별 볼일 없어보이는데시녀들의 고문을 견뎌내다니. 아무리 몸풀이 정도로 했다지만 날붙이가 살에 닿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소름끼치고 끔찍한 일이다. 그걸 참아냈다면 필시 보통인간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바로 아오키입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죠.”
“뭐야. 지가  망쳐놓고 동료들을 위하는 ‘척’ 하는 거야?”

서현이 피식하고 비웃자 아오키는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더러운 것들.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우리 주인님이야. 용서하고 말 것도 없지.”


가뿐하게 대꾸해준 서현이 손짓하자, 시녀들이 나머지 동료들을 그녀 앞으로 끌고왔다.


아오키를 제외한 남자 두 명에 여자 넷.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절망과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너희들 억울하지 않아요?”

서현의 갑작스런 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동료들의 얼굴이 의문과 함께 들렸다.

서현은 시녀가 가지고 온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보고는  들었어요. 이것만 아니었으면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며?”
“….”
“이래서 오지랖 넓은 것들은  된다니까. 오지랖은 관심이 아니라 민폐야. 그렇지 않아?”
“…우릴…어떻게 할 셈입니까….”


카쿠가 힘없이 물었다.
그러자 서현이 그를 응시하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하긴. 아무리 억울하대도 결국 일은 벌어졌잖아? 남자는 스탯화하고 여자는 천인(賤人) 정도일까. 아, 천인이라는 건 신분인데, 쉽게 말해서 밑바닥 노예라는 거야. 무슨 노옌지는 알고 있겠지.”
“아,안 돼…!”
“히익!”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일행들을 둘러보던 서현이 두 여자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가리켰다.

“쟤네 둘, 죽었어야 할 것들이 아직도 살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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