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34.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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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까지 온 임하얀을 만나고 있던 아녜스는 방금전 올라온 보고에 눈쌀을 찌푸렸다.
눈 앞에 있는 여자가 한없이 미워질만한 그런 보고였다.
“…어차피 그런 일은 저희 비서실 산하 집행부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장관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적합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허락? 당신이 데려온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정보부 관저에 데려다 놨던 카쿠들을 강탈당했다는 보고.
사실 말이 강탈이었지, 정보부에 소속된 시녀들이 그냥 열어준 것에 가까웠다.
물론 아녜스가 바보도 아니고 임하얀이 양동이라는 걸 진작에 눈치채서 어느 정도 대비는 해 두었다.
자기 직속의 시녀를 관저에 배치하는 한편, 시녀가 아닌 노블레스의 일원 역시 몇 명 보내둔 상태였다.
하지만임서현의 전권을 위임받고 날아온 임하얀과 시녀들을 막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저어, 장관님…. 죄송합니다만 『비서실장』님의 의지가 확고하십니다. 제게 전권을 위임하셨을 정도로 이 일에 신경쓰고 계세요.”
“….”
아녜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비서실장이 신경 쓰고 나발이고간에 명백하게 정보부의 관할을 무시하고 쳐들어와 심지어 강탈까지 해간 것이다.
안 그래도 원수지간이라 감정이 참으로 좆같았는데 이번 일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바람까지 친절하게 지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시작은 아녜스다. 애초에 그냥 간단하게 ‘실수하셨네요’정도로 넘어가면 될 걸 굳이 비아냥대면서 감정을 건드렸으니까. 하지만 딸을 납치하고 능욕당하게 한 원수에 대고 그 정도 비아냥으로 그친 것만 해도 엄청나게 참은 것이다.
아무튼 아녜스는 카쿠들을 앉은 자리에서 빼앗겼고, 정보부에 배치된 시녀들은 별 힘이 되지 못했다.
그녀들도 시녀인 이상 황궁비서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하렘궁의 미숙한 권력분배의 허점이었다.
“이따위로 할 거면 부처는 왜 나눠놨어?”
임하얀이 떠난 후에도 한참동안 분노를 삭히던 아녜스.
솔직히 카쿠들이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 없었지만, 이대로 그냥 있으면 앙리에타는 교육심의를 통해 교육대상자로 분류될 것이고, 어쩌면 아녜스 본인조차 교육을 받아야 될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선택이 불러온 끔찍한 사태.
이런 가운데 그녀는 문득 어젯밤 떠올렸던 묘수를 다시 꺼냈다.
정말 같은 하늘 아래 지내고 싶지 않은 여인. 그러나 별 수가 없음을 깨닫고는 결국 전화를 들었다.
이소냐와의 연결은 바로 되지 않았다.
몇몇 사람을 타고 나서야 간신히 연결이 되었고, 그마저도 별로 많은 시간을 얻어내진 못했다.
-의외네요. 제일 연락 안 줄 것 같은 사람한테 연락이 오다니.
제법 놀란 그녀의 얼굴이 전화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긴이 할 말이 있어서요.”
-…뭔가 감이 안 잡히네요. 이사벨라씨가 저한테 할 말이라니.
“이소냐씨, 세 부인 중 첫째가 되고 싶으시죠?”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미약하나마 제가 도와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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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카쿠들은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통해 강남으로이송되었다.
별 다른 일은 없었지만, 일행간의 충돌이 있었다.
분노와 절망을 참지 못한 하루나가 비교적 자유로운 발을 이용해 아오키를 폭행한 것이다.
비록 아녜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분을 미루었다곤 하지만, 하루나를 비롯한 여성들은 옷이 벗겨진 상태로 부위별 사진을 찍혀야했고, 그걸 강제로‘등록’당했다. 시녀복을 입거나 유은에게 직접 임명받지 않았을 뿐, 사실상 시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절망할 수밖에.
물론 처해있는 상황만 보자면 남자들이 더 암울할 것이다. 그들은 마치 가축처럼 스탯을 쪽쪽 빨린 후 아무렇게나 처분될 운명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그들은 임서현의 수중에 있었다. 온갖 모진 고문을 다 당하다가 스탯화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튼 그들은 무사히(?) 황궁 지하에 있는 교육 에리어까지 끌려갔고, 거기서 칼이나 가위 따위를 들고 있는 열댓 명의 시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것들인가?”
“쯧쯧쯧. 하고많은 자살법 중 이딴 걸 고르다니.”
그녀들은유은의 충실한 받이임에도 그들을 동정했다.
물론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서실장님 오시기 전에 가볍게 손만 봐주는 거다. 죽이면안 돼.”
“예.”
그녀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일행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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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들이 시녀들에 의해 가벼운(?) 고문을 받고 있을 무렵, 임서현은 뜻밖의 호출을 받았다.
바로 하렘궁의『법무부장관』이자 안방마님 중 하나인 이소냐였다.
아무리 궁의 실세로 비춰지는 임서현이라 할지라도 이소냐를비롯한 부인들에게는 유은에게 하듯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창 새로운 여자를 찍어누르고 있는 유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소냐가 있는 법무부처로 향했다.
어차피 그래봤자 같은 건물 내에서 이동하는 것이었지만.
불과 5분만에 이소냐의 집무실에 도착한 임서현이 소냐의 비서에게 말을 전달했다.
곧 문이 열리며 백지 위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소냐의 모습이 드러났다.
“들어와요.”
그녀는 임서현의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그 반대편 소파에 본인의 몸을 얹었다.
사각형의 유리 테이블을 중심으로 대면하게 된 임서현과 이소냐.
서현은 감히 소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 불렀어요.”
“예.”
소냐는 비서가 간단한 차를 내올 때까지 말을 꺼내지 않다가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운을 뗐다.
“요새 서현씨가 그렇게 세다면서요?”
“예?”
“특히 궁 내에서라면 더더욱. 사실상 2인자 취급을 받고 계시더라고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주인님의 충실한 시녀일 뿐입니다.”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은 듣기 좋네요. 근데 난 좀 불안하네.”
“불안…하다뇨?”
소냐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싸했다.
“아니 뭐, 나도 혹시책잡히는 게 있나 해서. 교육심의 같은 거 들어오면 어떡해?”
서현이 화들짝 놀랐다.
“교육심의라뇨? 그 무슨 말씀을….”
“내가 아무리 아이템을 사용했다지만 나이 50이 넘잖아요. 비서실에서 하는 교육, 들리는 소문도 별로 안 좋던데. 나 그런 거 감당 못해~.”
“아…교육은 시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육심의도 마찬가지고요. 사모님께서 그 대상이 되실 일은 절대 없습니다.”
서현은 영문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대꾸했지만, 소냐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앙리에타를 대상으로 교육심의회를 구성했다면서요? 서현씨가 직접 지시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앙리에타는ㅡ,”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명목상이든 어쨌든 앙리에타는 우리 남편의 ‘빈’이예요. 부인이라구. 그러니 무섭잖아. 나는 새도떨어뜨린다는 비서실장님께서 우리 ‘식구’에게까지 칼날을 들이밀고계시니.”
“…저…앙리에타에 관해서는 주인님께서ㅡ,”
“서현씨, 지금 말대꾸하는 거야?”
“…아닙니다.”
서현은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꾹 깨물었다.
솔직히 좀 많이 억울했지만 어쩌랴. 시녀가 돼서 유은의 부인인 이소냐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난 개인적으로 서현씨 좋게 보고 있어요. 싹싹하고, 일처리도 잘 하고, 예쁘고.”
“감사합니다.”
“근데 선은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
서현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 그녀에게 소냐가 비로소 웃어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럼 알아들은 거 같으니, 교육심의건은 오늘내로 풀어줘요.명색이 빈인데 가오는상하면 안 되잖아?”
맑은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녀.
그러나 서현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
서현은 지금 망설이는 것이었다.
일단 앙리에타는 누가 보더라도 명목으로만 ‘빈’일 뿐, 좀 잘나가는 시녀에 불과했고, 막상 유은에게 당하는 대우도 형편없었다.그리고 그만큼 그녀가 유은을 대하는 태도역시 개차반이었기에 기준을 적용한다면 명백한 교육대상자이기도 했다. 그놈의 ‘명목’때문에 굳이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지….
게다가 앙리에타는 단순히 교육대상자일 뿐만 아니라 서현의 심기를 박박 긁어놓은 아녜스의 딸이기도 했다. 그냥 심기를 긁은 정도가 아니라 유은을 전부로 여기는 서현에게 일을 대충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모욕을 줬다. 자존심 이전에 그녀의 인생 자체에 대한 부정을 들어놓고 그냥 물러나기가 너무나 억울했다.
물론 그건 그녀의 사정일 뿐이었지만.
탁.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은 소냐가 서현을 노려봤다.
“서현씨, 왜 대답 안 해요?”
“아..죄송합니다.”
“왜 이러실까. 평소 표정관리와 대답을 가장 강조하시는 분이. 지금 보면 표정관리도 제대로 안 하시는 거 같고.”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망설임 때문에 소냐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황급히 표정을 고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소냐는 한없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예 자세까지 바꾸고는 가만히 서현을 쳐다봤다.
“좀 당황스럽네…. 서현씨, 내가 하는 말이 그렇게 기분 나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