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34.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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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사냥을 마친 아오키 일행...아니 카쿠 일행은 지친 몸을 이끌고 던전 밖으로 나왔다.
중간에 퍽치기 무리가 있었지만 카쿠 일행도 이곳 기준으론 실력이 뒤쳐지는 편도 아니었고, 인원도 많은 편이었기에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로 인한 수익이 지난던전에서 얻은 것보다 클 정도.
부산물을 회사에 판매한 금액이 4만 달러 가량인데, 퍽치기를 털어먹어서 나온 금액은 100만 달러를 우습게 넘겼다. 물론 장비값 포함이다.
"장비가 팔리고 나면 대대적으로 정비 좀 하자."
카쿠가 팀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리더인 그를 포함해7인에 달하는 파티.
기존엔 아오키, 카렌, 하루나, 오오쿠, 카쿠까지 5인이었지만, 아오키가 구해낸 2명의 여인이 합류하면서 7명으로 늘어났다.
둘 다 원거리 직업에 한 명은 희귀한 힐러였기에 이전보다 훨씬 원활한 사냥이 가능했지만, 그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받아들이는 거지, 달가워 하는 사람은 아오키 정도밖에 없었다.
"우린 아직 많이 약하고, 또 '그 여자'를 생각하면 절대 안심할 수가 없어."
음식을 먹으면서도 엄마의 잔소리 비스무리한 것을 늘어놓는 카쿠.
하렘궁의 시녀로서 아오키를 비롯한 파티원을 처단하고자 하는 임하얀을 피해 일본에서 떠났다.
아직까진 그녀와 마주치진 않았지만, 궁이 제대로 찾고자 하면 바로 들통날 것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팀원 모두가 전력을 다해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달려야 했다. 그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들은 독일에서 D급 던전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장비 판매 등의 정비가 끝나고 나면, 이번엔 체코로 이동할 거야. 거기엔 잘 알려지지 않은 던전이 있지."
"하아...."
그의 말에 하루나가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독일에 자리잡나 싶었는데 이번엔 체코로 이동한다니.
독일에 오기 전에도 프랑스에서 사냥했었는데 한 달만에 또 이동이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돼?"
"아마도...."
그녀의 칭얼거림에 카쿠가 어두운 얼굴로 운을 뗐다.
"평생...?"
"씨발...."
"가,강해지면 돼...."
아오키가 자신없는 어조로 말했지만 그가 구해낸 2인조를 제외하면 누구도 듣지 않았다.
리더인 카쿠조차 그의 의견은 무시하곤 했으니까. 거의 죄인 취급이다.
"핸드폰도 제대로 못 써, 이메일도 안 돼, 인터넷도 제한. 그리고 한 달마다 거주지 이동. 이게 사람 사는 거야?"
"어쩔수없어. 그리고 핸드폰은 모르는 번호만 받지 말라는 거잖아. 그리 어렵지 않을텐데?"
"그래도!!"
하루나는 빼액 소리지르고는 커다란 빵을 입에 욱여 넣었다.
거의 분노의 먹방 수준이었다.
"야, 들었어?"
"뭘?"
"조만간 D10 총회장이 온대잖아."
"아녜스가? 왜?"
"원래 유럽지부장이었잖아. 세력도 여기에 일궈 놨었고. 그거 때문이 아닐까? 집도 정리해야 되고 말이지."
대각선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무리의 말이 들려왔다.
총회장 아녜스. 협회장 아녜스.
어쨌든 현 D10의 수장인 아녜스 이사벨라를 뜻하는 말이다.
'아녜스 이사벨라...?'
카쿠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아녜스, 아니 던전협력기구는 하렘궁과 적대관계에 있다. 물론 특정 일에 관해 협력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세계의 던전패권을 두고 지구를 나눠먹고 있는 2대 강자중 하나다.
그리고 던전계에 은근히 흘러나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녜스의 가정은 유은 때문에 파멸에 치달았다.
그렇다면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녜스는 정보를 원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궁의 시녀가 우릴 쫓고 있다. 이걸 활용하면 어쩌면 거대단체의 비호아래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확신은 아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애매한 작전이다.
하지만 다신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카쿠는 일행들을 방으로 불렀다.
좀 더 은밀한 대화를 하기 위해 목소리마저 줄였다.
"며칠 내로 던전협력기구 총회장인아녜스 이사벨라가 독일에 올 거야."
"아까 건너편 식탁에서 나왔던 얘기잖아? 그게 왜?"
"...."
카렌의 말에 카쿠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에게 접촉할 거다."
"뭐? 설마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보호해달라 사정하려고? 퍽이나 들어주겠다!"
하루나가 싸늘하게 말했지만, 카쿠는 손을 들어 제지한 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잘 들어봐. D10은 하렘궁과 적대관계야. 아녜스는 심지어 유은 때문에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소문까지 있어. 그러니 그걸 이용하는 거지."
"그건 그냥 뜬소문이잖아."
"어쨌든 적대관계라는 건 사실이니까 정보가 필요할 거야."
카쿠는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아녜스가 왔을 때 유럽 지부를 방문한다.
그리고는 하렘궁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있다는 말로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럼 돼."
"...장난해?"
"이건 좀...."
"카쿠, 너 좀 쉬어야 겠다."
아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더니 팀원들이 하나같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고작 두 줄 짜리 계획이라니. 이딴 건 계획이라 할 수도 없다.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보가 있어요!' 같은 말로 우릴 만나줄 것 같아? 설사 만난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떡할 건데? 아는 정보가 없잖아!"
"맞아. 하지만 우릴 쫓는 시녀는 아는 게 있겠지."
"......미끼가 되자는 거야?"
"그 전에 먼저 던전협력기구 본부에서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지. 그래야 그쪽에서도 시녀를 잡아둘 명분이 생길거고."
"아...."
뒤이은 설명으로 간신히 납득.
여전히 미진한 부분도 많고 일단 '회장과 만난다'라는 대목이 심히 허술해 보였지만 달리 수단이 없었다.
며칠 뒤,
카쿠는 널찍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잔뜩 긴장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짜 통할 줄이야....'
그의 뒤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무표정의 여인들이 서 있었고, 그 뒤에 현 유럽지부장과 총회장인 아녜스 이사벨라가 함께 있었다.
아녜스를 만나겠다는 허접한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일단 전화를 통해 그녀가 이곳에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다음부터 팀원들과 돌아가며 잠복. 직원들에게 몇 번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다행히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아녜스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영화속에 나오는 귀부인.
심히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었으나, 카쿠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하렘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다며 접근을 시도했다.
당연히 수행원들, 그리고 경호들에 의해 제지되었지만 아녜스가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이렇게 엘리베이터.
이렇게 그녀의 방...아니 정확히는 '현 유럽지부장'의 방까지 안내될 예정이다.
보아하니 유럽지부장은 그녀를 극진히 따르는 것 같으니 아녜스에게 잘 보인다면 이곳에 보호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리 좀 비켜줘요."
"예. 편하게 계셔요."
지부장의 방에 도착했을 때, 아녜스는 지부장을 돌려보냈다.
자기 방인데도 축객령을 당하는 기분은 상당히 뭐같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들어와요."
"예,예...."
궁에 관한 중요한 정보라는 걸 감안했는지, 그녀는 수행원들도 모두 밖에 있게 하고 카쿠만을방 안으로 들였다.
들어가자마자 펼쳐지는 베를린의 전경.
한쪽 벽 전체가 전면유리로 되어 있어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래, 하렘궁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노려보다시피 카쿠를 응시하는 아녜스.
"그렇습니다."
카쿠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약 2달 전, 저와 제 팀원들은 일본의 한 던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
시작된 그의 옛날(?) 이야기.
아녜스는 갸웃했지만 일단 들어 주었다.
중간에 수행원 한 명이 노크하고 들어와 차를 내어주고 돌아갔다.
"그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ㅡ,"
"잠깐만요."
한창 진행되는 얘기 속에서, 마침내 끼어드는 아녜스.
그녀는 조금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궁에 대한 정보를 들으려는 거지, 당신 옛날 이야기가 궁금한 게 아니예요."
"아, 물론입니다."
"정보부터 말해요. 당장. 아니면 따로 원하는 거라도있어요? 얼마?"
"그건...."
카쿠는 잠시 생각했다.
막연하게 계획으로 생각했을 때는 자신들을 쫓는 시녀를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닥치고 나니 말을 꺼내기가 퍽 어려웠다.
무려 던전협력기구 회장이라는, 일국의 대통령보다도 더한 권력을 갖고 있는 그녀인데, 애써 시간을 내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사실 지금은 정보가 없습니다. 정보는 우릴 쫓고 있는 시녀가 갖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과연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애매하게 시간을 끄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애초에 시간을 끈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정보가 없으니까.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그는 큰 결심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당장은 정보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