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34.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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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궁을 무너뜨릴 방법이 없겠습니까?"
흰머리가 희끗하게 자라있는 중년의남성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기존에 있던 일본의 총리대신은 던전사태에 대한 총체적인 대책실패와 그로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 한국군의 주둔, 거기에 사실상 하렘궁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현상황 등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로인해 새롭게 총리대신으로 뽑힌 '니시다 이치구미'.
그는 비록 일본의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앞길이 막막한 현실에 남몰래 눈물까지 흘렸다.
실질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언젠가 궁에서 지령이 내려온다면 그에 맞춰정책과 법을 짜야 한다.
게다가 궁의 수장이 유은이라는 초절정 색마인 만큼, 언제든지 해괴한 요구를 해올 수 있는 상황.
니시다 총리의 물음에, 보좌진들이 침묵했다.
그들이라고 무슨 뚜렷한 방법이 있겠는가. 앞도적인 힘 앞에는 그 무엇도 의미 없다.
장관 중 한 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중국 사태를 보시면...아무래도 방법이 없는 것으로...사료됩니다."
'그' 사태가 입에 올라오자, 회장에 있는 전원이 부르르 떨었다.
무려 10억이 넘는 사람을 떼몰살 시켜버린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학살.
중국이 멸망하면서 10억 가량의 보지니아가 탄생했다지만, 그녀들은 숙주를 죽이고 태어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중국인'이라는 존재를 90%이상 박멸한 셈이다.
남자는 일고의 고민도 없이 죽여버리고, 여자라 해도 기준에 차는 미녀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제거해 보지니아의 숙주로 삼아버린다.
그로 인해 탄생한 보지니아는 순식간에 국가를 재정비해서 산업과 경제를 되살리고 군사력까지 보충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힘은 고스란히 하렘궁으로 오는 상황이고.
덕분에 전 세계가 무릎을 꿇으며 아부하지 않았던가.
항상 패권국임을 천명하고 드높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미국조차 궁 앞에서는 허리를 낮췄다.
미국이 그럴진데, 일본이 궁에 대적할 순 없는 노릇. 애초에 일본은 신흥군사대국인 한국조차 감당 못해서 수도 도쿄에 한국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가 입을 다무는 상황에서, 총리가 바르르 떨리는 턱을 열었다.
"그래도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대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해서 언제까지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가 살기 위해선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단을 통해 궁을 와해시켜야만 우리 일본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겁니다."
힘겨운 말이었다.
요즘 시국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총리라 해도 힘들었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그리해야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문명들이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그들은 '이룰 수 없는 기적과 같은 것'을 해내야만 그 벽을 넘을 수 있었다.
대다수는 포기하거나 실패하여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살아남은 문명 또한 존재한다.
빠르고 정확한 상황판단과, 그로 얻어낸 대책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
총리는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항구적인 살길이라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의 하렘궁은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기존의 패권들과는 너무나 많이 다릅니다."
"막말로 보지니아 10개체만 일본에 풀어도 사태를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궁은 그런 보지니아를 10억 개체나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보다도 무서운 게 보지니아란 말입니다."
보좌진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그렇다 해도 지금의 하렘궁은 차원이 다른 집단이다.
특히 보지니아의 존재는 재앙 그 자체. 고작해야 현대국가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리는 포기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저 역시 많은 고민과 절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아요! 궁의 식민지가 되어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희망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씀이십니까? 보지니아국에 대한 경제제제라도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와 같은 자를 일본에서도 찾아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예?"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에게, 총리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렘궁이라는 단체, 그리고 보지니아라는 존재, 그들이 모두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유은이라는 자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유은이라는 자로 인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죠. 1년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입니다. 유은이라는 자는 대체 어떻게 하렘궁을 설립하고 보지니아를 창조했을까요?"
"...던전의 힘 때문이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는 흥분했다.
벌써 해결법을 찾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모험가가 되었고, 던전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던전이 생겨난지는 이제 겨우 5년을 넘어 6년을 바라보는 시점입니다. 이게 무엇을 시사하는 지 아시겠습니까?"
"...유은과 같은 자가 또 나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그것도 일본에서 말입니다!"
그는 앞에 있는 회의용지 뒷면에 재빠르게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던전이 일본에 있습니다. 비록 하렘궁 소유로 되어 있어 그들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만, 지리적으로 일본에 대단히 유리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죠."
"그건...너무 현실성이 없습니다. 유은은 돌연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특출난 힘을 지닌 자이고, 그런 자가 또다시 나타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하렘궁을 몰아내고 우리 일본국의 안녕을 추구할 방법이 달리 있느냔 말입니다."
"...없습니다."
"그럼 해야지요! 가능성이 낮아도 해야지요!"
흥분한 총리는 보좌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답정너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아무튼 가장 등급이 높은던전을 보유한 일본에서 유은과 같은 이레귤러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건 궁에서도 알고 있겠죠. 그러니 궁에서 집요하게 찾아다니는 모험가가 있다면 바로 그가 앞으로 궁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궁의 정보에 접촉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다 잘못걸려서 중국처럼 몰살당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아니, 미래를 생각한다면 멸망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대로는 필멸할 테니까요. 저항해야 합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1%라도 가능성이 생깁니다."
보좌진, 기타 장관들과 나중에는 같은 당의 의원들까지 나서서 그를 말려보았지만 총리는 강행했다.
이것이 일본의 살길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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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깊은 던전.
퀴퀴한 냄새와 어둠에 덮인 이곳에서 커다랗고 무거운 상자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런 것이 생기는 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이 상자를 열면 각종 보상 아이템들이 튀어나온다.
때로는 정말 잡템이 나올 때도 있고, 때로는 로또당첨 뺨치는 고가의 장비가 나올 때도있다.
"루팅 박스다!"
"이게 몇 번만이지?"
"후우."
연이은 사냥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일행들은 하나같이 모여 상자를 열었다.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진 않는데."
"검이네? 내가 쓸까?"
투박해 보이는 검.
옛날 서양에서 썼을법한 롱소드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날이 다 빠져있는 것이 도저히 좋은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겉으로는 잡템이지만 알고보니 엄청난 아이템?' 같은 클리셰가 아닐까 하여 정보를 스캔해 봐도 마찬가지.
그냥 잡템에 가까운 무기였다.
"하아...고작 나온 게 이딴 거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흑발의 여인이 검을 콱 집더니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이딴 거 백만 개 모아봤자 그것들한텐 1의 데미지도 못 줄거라고!"
"진정해 하루나."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별 수 없잖나. 일단 사냥은 여기서 마치고 정비하자."
차분한 남자의 말에 하루나라 불린 여인은 씩씩거리면서도 검을 다시 주워 인벤토리에 넣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궁시렁대는 건 잊지 않았다.
"벌써 2달째인데 어느 잘나신 리더님 덕분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보상도 없고...."
그녀는 고운 눈을 날카롭게 흘기며 누군가를 노려봤다.
파티의 前 리더였던 '이타루 아오키'가 바로 그 대상.
그의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마저 나락으로 빠졌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들을 구하겠답시고 나서서는 나머지 팀원들을 모조리 위험에 빠뜨린 원흉.
덕분에 예전의 우정은 온데간데 없고 거의 원수처럼 지내는 상황이다. 현 리더인 '마지메 카쿠'가 아니었다면 이 팀은 진작에 해산됐을 것이다.
"...."
하루나의 투덜거림에 아오키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그녀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기에 그녀의따가운 눈초리는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려팠다.
"후...어쩔 수 없잖아. 이제 그만 좀해."
하루나와 아오키를 지켜보던 또 다른 여인 '우에노 카렌'이 하루나를 말렸다.
그녀도 처음에는 아오키를 원망했지만 이미 2달이나 지난 일이고 그를 탓한다 해서 바뀌는 것도 없다.
그저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 최선.
"지금은 살아남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자."